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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가정/박선희

에세이향기 2021. 5. 29. 11:11

가정

 

박선희

 

 

열무 썰어 소금 뿌리자 숨이 죽었다

한길을 흐르는 물관과 체관

뻣뻣한 아빠의 티격을

태격으로 되받는 엄마의 말끝처럼

소금은 단단한 쪽과 부드러운 쪽을 오가고 있었다

 

삐죽삐죽 고개 드는 열무는 다독여 재우고

햇살을 팽팽하게 당겨 질겨진 잎은 흔들어주고

베트남 우즈베키스탄에서 건너와

한국말 익히며 김치라는 발음을 섞어 만든 김치를 익히는 여자들

그들의 어둔한 말투만큼 싱거워진 김치맛에 주고받는 눈빛은 짜다

 

소금을 머금고 뱉으면서 수위 조절하며

단단한 성질 절여질 때를 기다리는 엄마

펄펄 뛰던 숨 부드러움에 절여지는 아빠

기세 조금씩 역전되고

소금은 열무를 통째로 뒤집게 만든다

이국땅서 온 저들도 곧 이렇게 버무려질까

 

풀 죽은 아빠의 등 뒤,

물속으로 녹아들지 못해 오소소한 소금들

갓 취직한 나는 언제쯤 숨죽여야 하는지

자꾸만 태어나지도 않은 베트남 엄마 아기가 걱정된다

 

하늘로 땅으로 뻗던 힘 다 빼고

함께 버무려져

아! 아른한 맛

밀물도 썰물도 모세도 다녀간

모래펄을 맨발로 걷는 해변의 맛

모래알이 숨죽일 때까지

바다는 소금을 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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