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받이의 발명
배종영
의자는 누구든 앉히지만
스스로 앉아본 적은 없다
의자가 특히 이타(利他)적 사물인 것은
등받이의 발명 때문이다
사람의 앞이 체면의 영역이라면
등은 사물의 영역이지 싶다
기댄다는 것, 등받이는 혈족이나 친분의
한 표상이지도 싶다
갈수록 등이 무거운 사람들
등받이에 등을 부려놓고
비스듬히 안락을 느끼는 것이다
언젠가 본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취한 남자가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몸에 등받이 달린 의자 하나
들어 있지 싶었다
취약한 곳에는 대체로
이타적인 것들이 함께 있다
혈혈단신한테도 온갖 사물이 붙어있어
결코 혼자인 것은 아니지 싶다
등받이는 등 돌리는 법이 없듯이
나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등에서
절대적인 등을,
등받이를 배운 사람이다
계산 없이 태어난 사물은 없지만
정작 사물은 계산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물은
일상사 대부분의 표준이 된다.
우수상
나들이
홍경나
할머니와 나들이를 갔다 흰 머릿두건을 두른 할머니는 꼬신내 나는 콩고물 묻힌 주먹밥과 호미 담은 대광주리를 옆에 끼고, 나는 할머니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재 너머 할아버지 묘가 있는 콩밭
할머니 묏등 위 다보록이 돋은 성깃성깃 자란 띠풀을 뽑아 들고 가만히 봉숭아꽃물 진 얼굴로 저 먼 데 하늘을 점두룩 바라봤다 해 들면 덥다 여기서 놀거라 잎 큰 아주까리 아래 나를 데려놓고 예닐곱 이랑이랑 콩밭을 맸다
가끔 때까치들이 할머니가 김을 매는 밭고랑 사이를 푸르릉 푸르릉 다녀갔다 나는 혼자서 붉은 흙을 쑤시고 파고 다독여 아주까리 이파리로 지붕 얹은 개미집도 만들고 달개비꽃 따다 꽃밥 짓고 콩이파리 따다 콩잎자반 재고 새금파리 그릇 삼아 상을 차렸다 맛나지 할머니, 우리 할머니 냠냠 묵자 할머니가 내게 그러듯 할머니께 밥 떠먹이는 숭내를 냈다 이도 저도 시장스러지면 아주까리 그늘에 엎드려 콩고물주먹밥을 오물거렸다 되새김질하는 우리 집 누렁소처럼 입을 놀리다가 거물거물 잠이 들었다 꼼지락꼼지락 콩밭귀로 내려오던 산그늘이 두툼해지면 젖은 등더리에 업혀 어느덧 집으로 돌아왔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할머니는 색동원삼 명주옷 곱게 차려입고 꽃상여 타고 혼자 나들이를 떠났다 믈그름 감또개 툭! 툭! 떨어지는 고샅길을 돌아 나랑 다니던 나들잇길로 재 넘어 할아버지한테 가버렸다 새벽부터 는개가 듣던 그날 삼베두건을 쓴 상두꾼 직동할배가 그날은 할머니를 따라가면 못쓴다고 타일렀다 오호오 오호오 상엿소리가 나 대신 재 너머까지 할머니를 길게 길게 따라갔다
아주까리 너른 그늘로 때까치 왕개미 떼지어 놀고 할머니 백목 치맛자락 꼭 쥐고 콩밭으로 나들이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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