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81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이기철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제게 알맞은 여자 얻어 집을 이루었다 하루 세 끼 숟가락질로 몸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볕드는 本家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 채로 주소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에 실었다 우리 사는 뒤뜰에 달빛이 깔린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 이기철 -

좋은 시 2021.05.27

경주 감은사터 -바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 박시윤

경주 감은사터 -바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 박시윤 구절양장 추령을 넘으니 내리막길 끝에 널따란 대지가 펼쳐진다. 신비로운 세상이 나타날 것처럼 순하고 연한 땅이다. 추수가 끝난 들녘은 느슨하고, 아직 남은 일이 있는지 손을 더하는 사람들의 동작은 촘촘하다. 메마른 하천엔 이름 없는 돌들이 호기롭게 누웠다. 저기 코앞이 바다인데 굴러갈 내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 이것이 인생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것, 그러기에 오늘만큼은 조금 게을러도 괜찮다. ‘끼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또 지나칠 뻔했다. 여전한 곳을 왜 매번 가늠하지 못하는지. 그만큼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오늘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팔았던 것도 같다. 감은사 터에 왔다. 우습게도 무심히 지나던 곳에 답이 있었..

좋은 수필 2021.05.27

유리로 만든 창/김현숙

유리로 만든 창 김현숙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휴일오후. 나는 버스 맨 뒤 칸 창가에 앉아 그 햇살을 삼키며, 털 고르는 고양이마냥 권태를 즐겼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국도변의 추루한 풍경은 재채기를 부를 만큼 건조했고, 그곳 사람들의 기름기 없는 일상은 부서질 듯 파삭했다. 버스가 신호에 잡혔고 [건너 다방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 주인의 말처럼 건너 순댓국집 유리창에 내가 비쳤다. 내 가슴팍에 안겨 이 사이에 낀 점심 찌꺼기를 후비적대고 있는 중년의 남자, 그 위엔 인력소개소의 낡은 창문이 있고 그 틈으로 참말 비듬 같은 햇살이 쏟아졌다. 나도 ..

좋은 수필 2021.05.25

그럼에도 불구하고 / 윤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 윤영 꽃잎 빨아 쓰듯 젖은 날 많은 당신이 싫었습니다. 거름 자리마다 붉은 달리아 꽃을 심어놓고, 태풍에 쓰러진 꽃대나 묶어주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울에 봉숭아가 흰 꽃을 피웠다고 ‘참하다, 참하다.’ 말씀하시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햇살 들지 않는 부엌 찬장 옆에 노란 감국 꽂아놓고 ‘곱다, 곱다’ 말씀하시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차디찬 골방에 비틀린 가시선인장 들여놓고, 천 쪼가리 칭칭 동여 매주고 ‘봄날까지 잘 견뎌야 하느니라.’라던 당신의 읊조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창고 문을 열어보면 수북하게 쌓인 거라고는 비료 포대나 나일론 끈 따위가 전부였습니다. 부뚜막에 꽝꽝 얼어붙은 행주, 뜨거운 물에 녹여보면 해진 런닝구 쪼가리였습니다. 겨울밤 윗목..

좋은 수필 2021.05.25

낙장불입/ 김현숙

낙장불입/ 김현숙 이미 패牌는 내 손을 떠났다. 8월 공산명월이 갔다. 던져진 팔 광光에 엄마가 눈독을 들였다. 아차, 엄마 앞에 놓인 패를 읽었지만 늦었다. 저 팔 광을 엄마가 가져간다면 이번 판은 요대로 끝이다. 광 박 제대로 쓰게 생겼다. 엄마는 당신 왼속에 거머쥔 패와 바닥에 깔린 패를 번갈아 훑으면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쥐고 계신다는 말이다. 분명 저 손안에 기러기 떼 날아가는 공활한 하늘 있다. 아까부터 내 시선을 피하는 엄마, 어떤 표정도 들키지 않겠다는 저 포커페이스 좀 보소. 두 눈을 공산명월에 꽂은 채 입을 쭉 내밀고 등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몸을 흔들고 계셨다. 나만 아는 표정이다. 당신 앞에 놓인 화투 패는 잘 못 읽어도 당신 속마음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칠푼아, 어데 가서 고..

좋은 수필 2021.05.25

연근/김은

연근 김 은 진흙 먹으며 집 지켰고 가뭄으로 지붕이 내려앉을 땐 소금쟁이 다리 끝에서 생기를 얻었지 곧게 서서 물위에 푸른 지붕을 얹고 연분홍 황녀 같은 꽃 피워내어 증발하는 물 막고 비단잉어의 새끼도 받았다 살갗엔 거뭇거뭇한 반점들이 있으나 매끄러운 살빛에선 여자의 분 냄새도 난다 연근이 뽑혀나간 못 여기저기 둥글게 퍼낸 저 흔적은 숭숭 구멍 뚫린 어머니의 가슴팍이다 그녀가 부재중인 진흙은 어쩌면 자정능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꼬르륵 연못의 배 앓는 소리 들릴 때 힘겹던 그 세월, 우리 백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까 말갛게 씻겨 도마에 오른 알몸 위에서 내 어머니 골다공증의 이력을 다시 본다 시집 『시계는 진화 중』 2021. 지혜사랑 [출처] 연근 / 김 은 |작성자 마경덕

좋은 시 2021.05.24

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전장석

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전장석 고갯마루를 마수걸이한 마을버스가 몇 사람과 접점하고는 내리막길로 이항한다 간판이 분필로 쓰인 책방은 방금 새로운 이론을 설명하려던 중이다 ​저녁 산책의 중력파가 만리동까지 미치면 거기, 작동이 멈춘 낡은 탁자 위의 시간들 수공이 되어 나를 내부 수리한다 무중력의 이 도시를 용감하게 횡행하던 한 권의 시집, 단 한 줄의 문장 속엔 궤도를 이탈한 소우주가 지구본처럼 떠돌고 평생 떨어진 사과를 줍다 허리 휜 내 이력이 통증이 가시지 않은 호롱불로 밤새 매달려 있다 막대그래프 같은 아파트와 낮은 곡선의 지붕들 그 아찔한 간극에서 자주 멀미하던 바람이 서점 어딘가에 불편한 기록으로 꽂혀 있다는데 언제쯤 그것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불구의 시간들이 버릇처럼 그리움으로 발화되면 나는..

좋은 시 2021.05.24

낭송수필과 단수필의 이론과 실제/박양근

낭송수필과 단수필의 이론과 실제 박 양 근 들어가며 문학이란 작품을 통하여 작가와 독자 간의 정서적 지적 교감을 이루는 소통체계를 말한다. 하지만 인류의 정신적 문화를 집적하고 있는 예술 형태로 인정받아 온 문학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 문학의 위기가 거론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작가의 죽음, 정전(正典)의 와해, 의미의 해체 등 한때 충격적이었던 말들이 이제는 진부하게 들릴 정도다. 멀티미디어, 정보화, 세계화, 디지털 혁명 등과 같은 슬로건이 속도전을 연상시켜 주듯 현대사회 속에서 문학은 그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 문학이 처한 현실을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시대 변화를 예견하며,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하여 삶의 가치를 재확인하라는 문학에 대한 요구는 문학적 이상에 대한 단순한 향수..

수필 이론 2021.05.24

큰 나무가 서 있던 자리 / 은옥진

큰 나무가 서 있던 자리 / 은옥진 창문을 열기에도 아직 이른 시간이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에 내다보니 집 앞 빈터에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가 막 넘어지고 있다. “저 일을 어째.” 나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갔다. 함성 같기도 하고 통곡 같기도 한 소리에 이어 쿵, 와지끈하는 땅 흔들림이 이어졌다. “어머나!” 비명이 내 목구멍에서 막힌다. 저 큰 나무가 땅바닥에 누워서 사지를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러진 밑동에는 굵은 밧줄이 감겨 있고, 그보다 조금 위쪽은 또 하나의 밧줄로 매여 있다. 길게 늘어진 밧줄 끝은, 저만치서 부르릉거리고 있는 덤프트럭 꽁무니에 매달려있다. 저 괴물이 잡아당긴 것이 분명하다. 엇비슷하게 잘린 그루터기는 물기 어린 속살이 드러나 처참하고, 잔가지에 매..

좋은 수필 2021.05.24

광어와 도다리 / 최민자

광어와 도다리 / 최민자 오 억 오천만 년 전, 세상은 일테면 장님들의 나라였다. 캄브리아 대폭발로 진화의 포문이 열리기 전까지, 느리고 평화로웠던 저 식물적 시대는 눈의 탄생이라는 지구적 사건으로 시나브로 종결되어 버린다.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빛을 이용해 시각을 가동시키기 시작한 동물들은 생명의 문법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다. 조용했던 행성이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포식과 피식의 격전지가 되어갔다. 먹히지 않기 위해 외피를 강화하거나 지느러미를 발달시키고, 사냥을 위해 힘센 앞발과 송곳니를 장착하는 등 군비경쟁이 시작되었다. 공격과 방어, 양수겸장의 초병으로서 눈의 역할이 지대해졌다. 한번 켜진 빛 스위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눈이 다섯 개나 달린 녀석도 생겨났다..

좋은 수필 2021.05.24

그날 /곽효환

그날 - 곽효환(1967∼ ) 그날, 텔레비전 앞에서 늦은 저녁을 먹다가 울컥 울음이 터졌다 멈출 수 없어 그냥 두었다 오랫동안 오늘 이전과 이후만 있을 것 같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밤, 다시 견디는 힘을 배우기로 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고대’라는 말이 어울리던 옛날에 시는 노래였다. 그저 그런 노래는 아니고, 낮은 땅에서 높은 하늘을 향해 솟구치던 노래였다. 솟구치려면 힘이 세고 나아가는 방향도 분명해야 한다. 영웅서사시를 떠올려 보자. 그때의 시는 저만치 별처럼 빛나는 신이라든가 영웅을 향해 날아갔다. 날아가는 기세나 느낌은 마치 폭죽이나 불꽃놀이 같았을 것이다. 분명 그것은 ‘상승의 시’였다. 아주 오랜 후, 그러니까 ‘지금’의 시는 낱말의 집합이 되었다. 방향은 수천으로 나뉘었고 ..

좋은 시 2021.05.23

은는이가 /정끝별

은는이가 ―정끝별(1964∼ )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

좋은 시 2021.05.23

동질(同質)

동질(同質) ―조은(1960∼ )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나지금입사시험보러가잘보라고해줘너의그말이꼭필요해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지하철 안에서 전화기를 생명처럼 잡고 있는 절박한 젊은이가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신도 사람도 믿지 않아 잡을 검불조차 없었다 그 긴장을 못 이겨 아무 데서나 꾸벅꾸벅 졸았다 답장을 쓴다 -시험꼭잘보세요행운을빕니다! 아름다운 에피소드다. 불특정 다수에게 유독가스 같은 ‘악플’을 살포하면서 제 아까운 삶을 하찮게 만들고 남의 정신과 감정을 시들게 하는 이들이여, 스마트폰에 이런 훈풍이 불기도 한다오. 실수를 깨달은 뒤에 젊은이는 모르는 이가 보내온 답장으로 세상을 향해 한결 따뜻한 감정을 품을 테다. 그랬으면 ..

좋은 시 2021.05.23

찐빵이 익어가는 저녁 / 김만년

찐빵이 익어가는 저녁 / 김만년 오랜만에 오일장을 찾았다. 시장좌판이 풍성하다. 봄 산을 막 내려 온 두릅 취나물 다래 순들이 청향을 뽐내며 장돌뱅이들의 입맛을 돋운다. 갑자기 목안이 컬컬해진다. 노찬탁자에 걸터앉아 데친 두릅에 막걸리 한 사발 벌컥, 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나를 꿰뚫어 보는 아내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아 참는다. 뱅뱅 돌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게 장돌뱅이 아닌가. 방임된 시간은 파장 무렵으로 유예해두기로 한다. 난전을 돌아 나오다가 찐빵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엄마가 만든 찐빵 짱^^맛있어요!", 광고라면 이만한 광고가 또 있을까. 절로 미소가 번진다. 삐뚤삐뚤한 필체를 보면 필시 이집 코 흘리게 아이가 쓴 것이 분명하리라. 어쩌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밤새 엄마의..

좋은 수필 2021.05.22

장롱 속의 구두/최종희

장롱 속의 구두 최 종 희 휑한 기운이다. 주인을 떠나보낸 애절함이 집안 구석구석에서 맴돈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지팡이가 마루 끝에 덩그마니 쓰러져 있다. 책장 속의 빛바랜 고서에서 묵은 냄새가 폴폴 날린다. 오래된 사진첩에 흑백의 젊은 아버지가 밝은 미소를 보낸다. 장롱 문을 연다. 아버지를 감싸고 있던 옷들이 슬픈 듯 축 늘어졌다. 장롱 깊숙한 곳의 유품을 정리하는 손끝에 둔탁한 물체 하나가 와 닿는다. 뜻밖에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새 구두다. 팔순이 넘은 아버지는 별다른 불편함 없이 노년을 보냈다. 노인들의 기력은 예측이 어려운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지팡이를 의지하여 마실을 다녀오시곤 하였다. 그 기력마저 없어지자 과거인지 현재인지 오락가락하는 기억 속에서 대문 ..

좋은 수필 2021.05.21

유통기한/이근화

유통기한 이근화 오늘은 검은 비닐봉지가 아름답게만 보인다 곧 구겨지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사물의 편에서 사물을 비추고 사물의 편에서 부풀어오르고 인정미 넘치게 국물이 흐르고 비명을 무명을 담는 비닐봉지여 오늘은 아무렇게나 구겨진 비닐봉지 앞에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무 물건이나 잘 담는 비닐 주머니를 시인은 바라보고 있다. 노란빛 귤, 가을의 감, 식품, 마실 것을 담는 비닐봉지다. 때로는 먹을거리의 질름거리는 국물조차 담는 비닐봉지다. 곧 구겨질, 싸구려 봉지이지만 사물의 편에 서는 비닐봉지다. 인정이 많고, 참을성이 있고, 덕스러운 비닐봉지다. 비닐봉지는 대개 유통기한이 길지 않다. 한두 번 사용하고 휴지 조각처럼 버려진다. 그러나 비닐봉지는 얇고 넓적하거나 길고 둥글거나를 상관하지 않고 묵묵하게..

좋은 시 2021.05.20

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 조정은

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 조정은 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장으로 갔다. 석 달 만의 외출이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씩씩하게 걸으려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모든 것이 낯설어 걸음이 자꾸 허방을 짚었다. 십 수 년을 살아온 이 거리가 이렇게 낯설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낯설었다. 생선 가게를 기웃거리는데 누가 내 팔을 툭 쳤다. 전에 근처에서 비디오 가게를 하던 형님이었다. 그녀는 몇 년 전 이혼을 했는데, 그때 이미 가게마저 남편의 빚잔치로 넘어간 다음이라 갈 곳이 없었다. 한 겨울, 불도 들지 않는 우리 집 지하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말없이 사라졌다. 어디 가서 죽었으면 어째? 한동안 걱정을 많이 했다. “아니, 형님! 살아 있었수?” “그럼, 나야 잘 지내지.” 그녀는 ..

좋은 수필 2021.05.20

솔기/박종희

솔기 / 박종희 어머니가 또, 옷을 벗었다. 밤 도깨비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혼자 숟가락질도 못 하시는 분이 단추가 달린 환자복을 술술 벗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노인병원의 간병사는 "그러니 이곳에 계시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건 괜찮은데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죠."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은 퍽 언짢은 표정이었다. 밤새 환자복과 실랑이하던 어머니는 날이 밝으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싶어 고민하다가 어머니가 벗어놓은 환자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뒤집힌 환자복의 솔기 부분이 내가 입어도 불편할 만큼 거칠었다. 수선이 필요없는 환자복이라 그런지 겨우 솔기를 박을 수 있을 만큼 좁은 시접이 휘갑치기도 안 된 채 뭉쳐있었다. 그제서야 옷을 벗는 어머니 심정..

좋은 수필 2021.05.20

생짜배기/박종희

생짜배기/박종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흙구덩이에서 꺼내놓은 투박하고 촌스러운 무를 보면 왠지 자꾸 시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자란 환경이 달라서인지 시댁에 가면 모든 게 낯설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댁에 갔을 때였다. 저녁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들어서다가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 앞에 펼쳐진 부엌은 아주 어렸을 적에나 봤음 직한 구식 부엌이었다. 순간, 새 사람을 격하게 반기듯 입이 찢어지라 웃는 것이 있었다. 마치, 쇠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기세등등한 아궁이를 보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세월의 더께로 윤기 잃은 가마솥과 넙데데한 나무 주걱 등, 부엌살림을 훑느라 잠깐 방심하는 사이 한쪽 발이 허방다리를 짚을뻔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보니 아궁이 앞이 둥그스름하게 파여 있었..

좋은 수필 2021.05.20

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동시대에 수십억이 함께 산다. 우리 각자는 수십억 중 하나다. 그렇지만 남과 차별되는 유일한 자기만의 얼굴을 가진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아무리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라도 곁에서 들여다보면 확실히 다른 점이 발견된다. 뻔한 얘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표정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어린 아기의 얼굴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신생아실에 나란히 눕힌 아기들에게 엄마 이름을 쓴 팔찌를 채우는 건 얼굴만으로는 엄마도 제가 방금 낳은 아기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첫아기를 낳던 때 우리나라 산부인과는 아기를 신생아실로 데려가버리고 산모 곁에 눕혀주지 않았다. 하루에 몇 차례씩 아기를 보러 널따란 유리벽이 있는 신생아실로 내려가야 했다. 그 유리방 안 작..

좋은 수필 2021.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