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86

유통기한/이근화

유통기한 이근화 오늘은 검은 비닐봉지가 아름답게만 보인다 곧 구겨지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사물의 편에서 사물을 비추고 사물의 편에서 부풀어오르고 인정미 넘치게 국물이 흐르고 비명을 무명을 담는 비닐봉지여 오늘은 아무렇게나 구겨진 비닐봉지 앞에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무 물건이나 잘 담는 비닐 주머니를 시인은 바라보고 있다. 노란빛 귤, 가을의 감, 식품, 마실 것을 담는 비닐봉지다. 때로는 먹을거리의 질름거리는 국물조차 담는 비닐봉지다. 곧 구겨질, 싸구려 봉지이지만 사물의 편에 서는 비닐봉지다. 인정이 많고, 참을성이 있고, 덕스러운 비닐봉지다. 비닐봉지는 대개 유통기한이 길지 않다. 한두 번 사용하고 휴지 조각처럼 버려진다. 그러나 비닐봉지는 얇고 넓적하거나 길고 둥글거나를 상관하지 않고 묵묵하게..

좋은 시 2021.05.20

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 조정은

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 조정은 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장으로 갔다. 석 달 만의 외출이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씩씩하게 걸으려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모든 것이 낯설어 걸음이 자꾸 허방을 짚었다. 십 수 년을 살아온 이 거리가 이렇게 낯설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낯설었다. 생선 가게를 기웃거리는데 누가 내 팔을 툭 쳤다. 전에 근처에서 비디오 가게를 하던 형님이었다. 그녀는 몇 년 전 이혼을 했는데, 그때 이미 가게마저 남편의 빚잔치로 넘어간 다음이라 갈 곳이 없었다. 한 겨울, 불도 들지 않는 우리 집 지하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말없이 사라졌다. 어디 가서 죽었으면 어째? 한동안 걱정을 많이 했다. “아니, 형님! 살아 있었수?” “그럼, 나야 잘 지내지.” 그녀는 ..

좋은 수필 2021.05.20

솔기/박종희

솔기 / 박종희 어머니가 또, 옷을 벗었다. 밤 도깨비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혼자 숟가락질도 못 하시는 분이 단추가 달린 환자복을 술술 벗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노인병원의 간병사는 "그러니 이곳에 계시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건 괜찮은데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죠."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은 퍽 언짢은 표정이었다. 밤새 환자복과 실랑이하던 어머니는 날이 밝으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싶어 고민하다가 어머니가 벗어놓은 환자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뒤집힌 환자복의 솔기 부분이 내가 입어도 불편할 만큼 거칠었다. 수선이 필요없는 환자복이라 그런지 겨우 솔기를 박을 수 있을 만큼 좁은 시접이 휘갑치기도 안 된 채 뭉쳐있었다. 그제서야 옷을 벗는 어머니 심정..

좋은 수필 2021.05.20

생짜배기/박종희

생짜배기/박종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흙구덩이에서 꺼내놓은 투박하고 촌스러운 무를 보면 왠지 자꾸 시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자란 환경이 달라서인지 시댁에 가면 모든 게 낯설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댁에 갔을 때였다. 저녁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들어서다가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 앞에 펼쳐진 부엌은 아주 어렸을 적에나 봤음 직한 구식 부엌이었다. 순간, 새 사람을 격하게 반기듯 입이 찢어지라 웃는 것이 있었다. 마치, 쇠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기세등등한 아궁이를 보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세월의 더께로 윤기 잃은 가마솥과 넙데데한 나무 주걱 등, 부엌살림을 훑느라 잠깐 방심하는 사이 한쪽 발이 허방다리를 짚을뻔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보니 아궁이 앞이 둥그스름하게 파여 있었..

좋은 수필 2021.05.20

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동시대에 수십억이 함께 산다. 우리 각자는 수십억 중 하나다. 그렇지만 남과 차별되는 유일한 자기만의 얼굴을 가진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아무리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라도 곁에서 들여다보면 확실히 다른 점이 발견된다. 뻔한 얘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표정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어린 아기의 얼굴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신생아실에 나란히 눕힌 아기들에게 엄마 이름을 쓴 팔찌를 채우는 건 얼굴만으로는 엄마도 제가 방금 낳은 아기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첫아기를 낳던 때 우리나라 산부인과는 아기를 신생아실로 데려가버리고 산모 곁에 눕혀주지 않았다. 하루에 몇 차례씩 아기를 보러 널따란 유리벽이 있는 신생아실로 내려가야 했다. 그 유리방 안 작..

좋은 수필 2021.05.20

실수/나희덕

실수 / 나희덕 옛날 중국의 곽휘원(廓暉遠)이란 사람이 떨어져 살고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받은 아내의 답시는 이러했다. 벽사창에 기대어 당신의 글월을 받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흰 종이뿐이옵니다. 아마도 당신께서 이 몸을 그리워하심이 차라리 말 아니하려는 뜻임을 전하고자 하신 듯 하여이다. 그 답시를 받고 어리둥절해진 곽휘원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아내에게 쓴 의례적인 문안 편지는 책상 위에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그 옆에 있던 흰 종이를 편지인 줄 알고 잘못 넣어 보낸 것인 듯했다. 백지로 된 편지를 전해 받은 아내는 처음엔 무슨 영문인가 싶었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 말로 다할 수 없음에 대한 고백으로 그 여백을 읽어내었다. 남편의 실수가 오히려 ..

좋은 수필 2021.05.20

참외는 참 외롭다/김서령

참외는 참 외롭다 / 김서령 참외의 '외'는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외아들·외딴집 할 때의 그 '외'다. 영어로도 참외는 'me-lone'이다. “Are you lonesome tonight?” 할 때의 그 'lone'이니 역시 '혼자'라는 뜻이다. 한자의 외로울 고孤자에도 참외 하나瓜가 들어앉아 이쪽을 말갛게 건너다본다. 우리말과 영어, 한자를 만든 이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한 것도 아니련만 '혼자'라는 의미에 똑같이 '외'라는 과일을 사용한 건 희한한 일이다. '슬기'가 '슬기-롭다'가 되고 '지혜'가 '지혜-롭다'가 되는 우리말 구조를 따져보면 '외-롭다'는 '외'로부터 나온 게 확실하다. 그들은 왜 '외로움'이란 의미를 밭에 돋아 홀로 열매가 굵어가는 저 보잘것없는 초본식물로부터 만들어 냈을까. ..

좋은 수필 2021.05.20

약산은 없다 / 김서령

약산은 없다 / 김서령 ​ ​ 오늘 낮 백석의 시를 읽었다. 내게 백석의 시는 읽는다는 말로는 적당하지 않다. 소설처럼 죽 페이지를 넘겨가는 방식이 아니고 시집을 눈앞에 두고 집히는 대로 뒤적거리다 맘 가는 아무 페이지나 코를 박고 들여다보다가 또 저만치 던져놓는 식이다. 그러니 읽는 게 아니라 코를 박는다거나 저만치 던져놓았다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읽다말고 저리로 던져둔다는 건 시가 별 볼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읽기를 계속할 수 없을만큼 가슴 속이 뻑뻑하게 격해져 오기 때문이다. 그걸 다스릴 시간이 필요해 시집을 저만치 던져놓게 된다. 이것도 노화의 일종인지 버거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꼭짓점까지 올라가지 않으려 애쓴다. 8부쯤에서 멈추려 애쓴다. 그러자면 읽던 책을 저만치 던져두는 ..

좋은 수필 2021.05.20

구월이 왔다 / 김서령

구월이 왔다 / 김서령 연일 하늘이 맑다. 바람이 연일 산들산들 잘도 분다. 땅에 돋아난 모든 식물들, 나무든 풀이든 농작물이든 땅에서 솟은 것들은 지금 물기가 살짝 걷히고 있다. 열매엔 단맛이 깊이 스미고 이파리는 슬쩍 시들고 알곡은 탱탱하게 익어간다. 그 섭리를 관장하는 것이 저 바람이다. 부드럽고 감미롭되 가차 없고 잔인한 저 바람. 햇살은 다만 무심한 기록자일 뿐이다. 물기를 잃는 양을 정교하게 기록할 의무를 배당받았다는 듯 진행과정을 땅 위에 또렷하게 새겨넣는다. 무심하게 밝게 완벽하게 뿌리 인근에서부터 시작되어 땅 위로 길게 드러눕는 나무와 풀의 그림자. 물론 그 그림자는 고정되지 않는다. 바람결을 따라서 함께 흔들린다. 흔들 흔들 흔들… 연일 세상이 온통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면서 나무들은 ..

좋은 수필 2021.05.20

꽃구경에도 윤리가 있다/김서령

꽃구경에도 윤리가 있다/김서령 20년 넘게 내가 사는 뜰에는 목련이 피었다. 해마다 꽃 피는 전과정을 지켜봤다. 책상 앞 바로 눈높이에 목련이 있어 눈을 들면 절로 목련과 마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이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차츰 볕이 달궈지는 어느 날, 가슴 안쪽에서 문득 수상한 동계가 감지되는 어느 날, 목련의 첫 꽃은 툭 소리를 내며 터진다. 나는 흥분해서 4월 3일 혹은 4월 6일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날을 기록했다.​ 20대엔 그저 좋기만 했다. 잎 없는 가지에서 커다란 목련을 불러내는 주체가 뭔지도 몰랐다. 무뚝뚝한 회색 가지 안에서 무심코 꽃이 툭 튀어 나오는 줄만 알았다. 내 기분이 좋으면 팝콘처럼 즐겁게 터지는군 싶었고, 내 심사가 사나우면 뭐가 좋은 세상이라고 철없이도 피어대는군 싶었..

좋은 수필 2021.05.20

부엌/김서령

부엌/김서령 어려서는 흙바닥에 물두멍이 있고 두 개의 아궁이에 가마솥과 동솥이 걸려 있는 부엌에서 지은 밥을 먹었다. 큰 솥엔 밥을 하고 작은 솥엔 국을 끓인 후 큰 아궁이에는 된장찌개 냄비를 얹고, 작은 아궁이에는 석쇠를 올려 김을 굽거나 간고등어를 구웠다. 뜨겁고 어둡고 바쁜 부엌이었다. 나는 고작 열세 살에 그 부엌을 떠났다. 그 후 내 소유의 부엌을 여러 개 거치면서 밥상을 차렸고 혼인을 했고 아이를 길렀고 나이를 먹었다. 요즘도 나는 여전히 부엌을 서성거리며 밥상을 차린다. 아마 죽기 전까지 언제나 그럴 것이다. 쌀을 불리고 국거리를 다듬고 마늘을 다지고 양파 껍질을 까고 찌고 굽고 튀기고 삶으면서.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

좋은 수필 2021.05.20

좌판에 앉아 / 김서령

좌판에 앉아 / 김서령 연신내 시장 볕 안 드는 한 구석, 좌판에 앉아 국수를 먹는다. 곁에는 열살짜리 새순 같은 딸을 앉혀두고 비닐봉지에 덕지덕지 싼 시장 본 물건들은 한켠에 세워두었다. 숱한 사람들이 김칫국물을 흘린 조붓한 나무 판자 아래 뺑뺑 돌아가는 동그란 비닐의자를 곁들여둔 좌판, 거기 기대앉아 느긋하게 시장 안을 둘러보며, 이렇게나 세상과 분리된 나는 이제 막 내 곁을 스치고 달아나는 30대에 대한 조사를 쓰려고 한다. 30대, 그렇다. 스물몇이었을 땐 턱없이 청춘이 괴로웠고, 어디로 한발 제겨디딜 틈조차 없다는 불안에 시달렸고, 그 혼란을 타넘고 나와 비로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서른을 넘긴 두 아이의 엄미가 되어 있었다. 아이 둘을 업고 안고 쩔쩔매다 그 아이가 "엄마 죄송해요. 친구..

좋은 수필 2021.05.20

원고지 위의 여행자

원고지 위의 여행자 라는 여행에세이를 쓴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날 아침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3년간의 긴 유럽여행을 떠났습니다. 단지 북소리의 특별한 느낌에 몸은 반응했고 그것이 떠남의 이유가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긴 여행에서 돌아와 깨달은 것은 글을 쓰는 일, 즉 자기가 하는 일 그 자체가 바로 여행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내가 가졌던 생각에 무언가를 (삭제)하고 거기에 무언가를 (삽입)하고 (복사)하고 (이동)하여 새롭게(저장)할 수 있다는 것에서 얻은 깨달음이었습니다. 백지로 머물러있는 원고지 위의 여행.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 대로라면, 작가 여러분들은 무엇보다 사랑하는 우리의 모국어를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훌륭한 여행자가 아닐까요?

향기로운 글 2021.05.20

여인은 꽃잎 같지만 엄마는 무쇠같다 ​

여인은 꽃잎 같지만 엄마는 무쇠같다 ​ 여인은 꽃잎 같아서 항상 관심에 물을 주고 별빛 같은 눈빛으로 자기만 바라보기를 고집하며 가끔은 퀴피트 화살을 맞아 쓰러지길 원하며 가르치는 선비보다 유머가 풍부한 코미디언을 더 좋아한다. ​ 여인으로 살아갈 때는 꽃잎이 피는 것에도 화들짝 놀라며 감동을 하며 풀잎에 애처롭게 매달린 이슬을 보아도 안쓰러워 눈물을 흘리지만 ​ 엄마로 살아갈 때는 꽃을 꺾으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며 소슬바람에도 흔들리며 감동하던 여인이 태풍에도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엄마가 되더라. 여인으로 살아갈 때는 명품이 아니면 옷이 아니라고 쳐다보지도 않고 외식을 할 때 갈빗집이 아니면 외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투정을 부리던 여인이 엄마로 살아갈 때는 장날표 싸구려도 유명..

향기로운 글 2021.05.20

반딧불이처럼/최윤정

반딧불이처럼/최윤정 슬픈 발광이다. 열흘 뒤면 풀숲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생의 마지막을 맞으리라. 우주 안에서 미천하기로는 저나 나나 매양 한가진데 별걱정 다 본다는 듯 반짝이는 엉덩이를 눈앞에 들이민다. 저수지 둑을 한참이나 서성이다 겨우 찾아낸 녀석이건만 저를 쳐다보던 내 눈빛만 괜히 머쓱해진다. 생의 절정기를 맞은 반딧불이가 여름밤을 간질이고 있다. 어린 시절, 사내 녀석들은 반딧불이의 꽁지를 떼어내 이마에 문지르곤 했다. 번득이는 얼굴로 달려드는 여름밤의 시답잖은 귀신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지만, 사내아이들이 우-하고 달려오면 계집애들은 와-하고 도망가 주었다. 나는 놀이에 엮인 무언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얼굴에 짓이겨진 반딧불이가 가엽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해서 치를 떨며 도망 다녔다. 오랜..

좋은 수필 2021.05.20

이끼/최윤정

이끼 최윤정 죽은 게 아니다. 물기 사라진 몸으로 돌을 꽉 붙들고서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새파랗게 생기 있던 몸피는 겨우내 누렇게 색이 바랬지만 그 안에는 낮게 엎드린 생명이 잠들어 있다. 가만히 귀를 대면 ‘바스락’하고 마른 숨소리가 들릴 것 같다. 이른 봄,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차분한 몸가짐으로 쬐고 있는 이끼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린 시절 외가의 마루에 앉아 고서를 읽고 계시던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운율에 맞추어 앞뒤로 천천히 몸을 흔들며 책을 읽으시던 외할머니의 목소리는 노년의 오수처럼 나른하고도 따뜻했다. 이끼는 원래 석부작에 붙인 풍란의 뿌리를 감싸던 것이었다. 석부작은 누가 봐도 꽃봉오리가 맺힌 풍란이 주(主)가 아니겠는가? 특별한 관리 없이 통풍과 분무만 열심히 해 주면 된다..

좋은 수필 2021.05.20

빈집/최윤정

빈집/최윤정 ​ 버림받은 지 오래인 듯하다. 그의 상처는 이제 아물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아픈 속살을 바람 앞에 다 내놓고서 신음조차 내지 않고 서 있다. 무덤덤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의 한쪽으로 기운 어깨에 앉아있던 새가 날아간다. 그와 나는 허공으로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소멸하는 한 점의 새를 그저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 먼지를 뒤집어 쓴 버스가 하루에 몇 차례 오갈 뿐인 시골길은 조용하다. 그 길을 따라 마을 깊숙이 들어가 본다. 버려진 집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오랫동안 방치된 집은 떠돌이 짐승조차 쉬었다 가고 싶지 않을 만큼 을씨년스럽다. 세상 이치에 무관해 보이는 바람만이 폐가의 뼛속 깊은 곳까지 드나들고 있다. ​ 마을 어귀부터 몇 채의 폐가를 지나쳤다. 마을 ..

좋은 수필 2021.05.20

흉터/최윤정

흉터 /최윤정 눈보라가 치는 밤이었다. 머리에 버짐이 번져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지는 걸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오던 길이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들르는 마을버스는 일찍 끊겨 버렸고, 눈보라를 맞으며 한 시간은 족히 걸어가야 집에 갈 수가 있었다. “춥제?”하고 자꾸만 물어보시던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도 못하고 눈보라와 씨름하던 그때, 내 나이 아홉 살이었다. 걸음을 걷는 다리조차 감각을 느끼지 못할 만큼 온 몸이 꽁꽁 얼어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지 집이 깜깜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찬바람이 확 덮쳐왔다. 아버지는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더듬거리며 불을 켜자 아무것도 없는 빈 방이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방안에 서있으려니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왔다. 나는 어..

좋은 수필 2021.05.20

그 여름의 끝/이성복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좋은 시 2021.05.19

밥숟가락/이사라

밥숟가락 ㅡ이사라(1953~). 식탁 위에 놓인 밥숟가락이 한 덩이씩 생을 담고 나를 기다려요 아주 조그만 한 입의 생은 제 목이 멜 때까지 나를 기다려줘요 차지게 서로 뭉치면서 사는 밥알들처럼 세상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반쯤 둥글게 몸을 웅크리며 나는 살아가요 밥숟가락 안의 생은 모든 것을 반원이거나 둥글게 만들죠 한 덩이씩의 생이 어쩌다가 움푹 파인 구덩이에서 잘못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죠 하나씩 밥술 놓고 떠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도 밥숟가락은 나를 기다려줘요 (…) 그래요 밥숟가락이 봉분이 되고 당신들 무덤이 세상의 밥숟가락이 되어 나를 기다려줘요 ■ 밥숟가락은 생명의 알레고리. 세상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있는 것도 밥이 경전이기 때문. 또한 시인은 밥숟가락에 소복이..

좋은 시 2021.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