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86

먼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

먼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 드린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잘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빈 위(胃)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

좋은 수필 2021.05.17

남편 길들이기 - 유 영 자

남편 길들이기 - 유 영 자 나는 처녀 적에 마음이 여리고 곱다는 소리를 들었다. 상스런 소리도 할 줄 몰랐고 거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볼 때 보호해주고 싶은 그런 모습으로 몸도 왜소하고 연약했다. 키 158센티에 몸무게 45킬로그램으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 남자는 다름 아닌 나의 남편이었다. 뱃살이 디룩디룩 붙으면서 그 뱃살만큼 뱃장이 두둑해지고 강심장이 된 것도 물론 남편 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편의 공을 치하하자면 끝이 없다. 어쩌면 남편은 나를 새로운 여성으로 이 세상에 재탄생시켜준 은인이라고나 할까. 나를 낳은 분은 생모였고 나를 키운 분은 고모였지만, 나를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사람은 남편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제 세상에서..

좋은 수필 2021.05.17

스물과 쉰/장 영 희

스물과 쉰/장 영 희 오후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때는 인정받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친구는 오륙 년 전에 소위 '명퇴'를 당하고 그냥 이런저런 봉사 활동을 하며 소일한다고 했다. "아직도 일하라면 잘할 수 있을 텐데 이제는 어디 가나 무용지물에 퇴물 취급이나....봉사 나가는 곳에서도 젊은 사람들을 더 좋아하더라고. 넌 젊은 애들 사이에서 살아서 모를 꺼야. 난 젊은애들 앞에서 주눅 들어" 허탈하게 말하는 친구에게 나는 대답했다. "얘, 주눅은 무슨 주눅! 죽자 사자 열심히 살았는데 무슨 죄 지었어?" 친구가 간 후 볼일이 있어 백화점에 들렀다가 배가 고파지자 식품 매장에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1층을 가로질러 가는데 얼핏 화장품 진열대에 놓인 거울에 내 얼굴이..

좋은 수필 2021.05.17

단어의 무게 / 민명자

단어의 무게 / 민명자 # 고프다 며칠을 몸살감기로 꼬박 앓았다. 손발 꼼짝 못하고 죽을 듯이 누워있어 보기는 처음이다. 남편 혼자 밥을 챙겨 먹었다. 내게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묻고, 이런저런 음식을 해주거나 사다주었지만, 음식생각만 해도 입덧을 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보리차로만 연명하기를 며칠, 어느 아침에 내 몸이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어렴풋이 보내왔다. 고프다. 아, 살아나는 거구나. 식욕은 숭고한 거구나. 그렇다면 형이하학적 욕구나 욕망이란 단어에 보냈던 경멸은 거둬들여야 한다. 정신은 고고한 것이고 육신은 비천한 것이라 여겼던 형이상학적 욕망이야말로 얼마나 어쭙잖고 편협한 오만이었던가. 먹을 것이 없어 ‘고프다’를 채우지 못하면 인간만이 지킬 수 있는 존엄성도 허물어진다. ‘고프다’엔 생명..

좋은 수필 2021.05.17

커튼콜 / 김희정

커튼콜 / 김희정 “소나기,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시처럼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봐/ 남의 얘기 말고 너를 말해 봐/ 급한 간결체 말고 지루한 만연체로 자세히 말해 봐” -소나기에게- ​ 번개가 기척하며 갈라진 천장이 급한 물줄기를 쏟는다. 프롤로그다. 하늘이 온통 세로 줄무늬다. 소나기다. 비에 긁힌 허공 가득 느낌표다. 비의 언어기호는 말줄임표다. 단락을 끊을 수 없는 연속 문장이다. 간격은 불문율에 부친다. 화면은 세로로 장치된다. 비 오는 풍경을 가로로 자르면 한 폭 그림이 되지 않는다. 비의 간격마다 세로로 잘려야 풍경이 된다. 그래서 다음 장면을 보려면 옆으로 넘기지 않고 위아래로 넘긴다. 비의 온도는 계절마다 달라서 체온으로 느낀다. 비의 정서는 넘치게 미학적이다. 테마는 판타지다..

좋은 수필 2021.05.17

나는 도리깨질에 길들여진 멍석이요/이영미

나는 도리깨질에 길들여진 멍석이요 / 이영미 “훠이 훠이” 아침부터 경을 친다. 마흔이 넘어 붙어버린 게으름 탓에 간밤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부엌의 싱크대에 남아있던 유리 컵 위에 해바라기 하듯 붙어 있는 도마뱀 한 마리, 어미 품을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연한 회색 몸뚱이는 사람과 섞여 산 지 얼마 안 돼 눈치도 없다. 저를 해할 가능성이 있는 무리 중 가장 조심해야 할 인간을 알아보지 못 한다. 기어이 행주에 한 대 맞고야 벽 타기를 시도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이 작은 생물을 잡을 생각은 없다. 서투른 몸짓의 도마뱀과 아직 곤히 자고 있는 네 살 된 둘째와 오버랩 되는 아이러니함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 땅에 나보다 아니, 이 적도의 땅에 제일 먼저 발을 디뎠을, 한국인보다..

좋은 수필 2021.05.17

부부는 이런 거래요

부부는 이런거래요 부부는 항상 서로 마주보는 거울과 같은 거래요 그래서 상대방의 얼굴이 나의 또 다른 얼굴이래요 내가 웃고 있으면 상대방도 웃고 내가 찡그리면 상대방도 찡그린대요 그러니 예쁜 거울속의 나를 보려면 내가 예쁜 얼굴을 해야겠지요 부부는 수평과 같아야 한대요 그래야 평생 같이 갈 수 있으니까요 조금만 각도가 좁혀져도 그것이 엇갈리어 결국은 빗나가게 된대요 부부는 도를 지키고 평생을 반려자로 여기며 살아가야 한대요 부부는 무촌이래요 너무 가까워 촌수로 헤아릴 수 없대요. 한 몸이니까요. 그런데 또 반대래요 등 돌리면 남이래요 그래서 촌수가 없대요 이 지구상에 60억이 살고 있는데 그 중의 단 한 사람이래요 얼마나 소중한 이 세상에 딱 한 사람... 둘 도 아니고 딱 한 사람... 나에게 가장 귀..

향기로운 글 2021.05.16

콩나물 촌감(寸感) /허석

콩나물 촌감(寸感) /허석 ​ 말아 쥔 악보 속에 높은 음표들이 유희한다. 슬픔을 날것 그대로 토해내는 비탈리 ‘샤콘느’의 음계며 선율일까. 의뭉스러운 삶의 비정을 맛본 느낌표와 의문형의 기호들이 세상 앞에 단독자처럼 버티고 있다. 아니다. 잎도 없이 연둣빛 꽃망울을 머리에 이고 올라온 석산 꽃대공들이다. 미끈하고 탄력적이며 날렵한 몸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그대로이다. 건강에 좋다며 지인이 재배한 까만 쥐눈이콩을 선물 받았다. 크기는 좁쌀만 하지만 오동통하고 앙증맞은 모습이다. 콩나물 기르는 일은 남자도 할 수 있다고 부추겼다. 혼자만의 살림에 항아리 들여놓기도 부담스러워 투명한 페트병을 이용해 조그만 시루 두 개를 만들었다. 성장기는 일여드레, 일차를 두고 기르면 사나흘에 한 번꼴로 콩나..

좋은 수필 2021.05.15

내 생의 은밀한 파수꾼 / 최영애

내 생의 은밀한 파수꾼 / 최영애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유한 형태나 소리로 자신을 드러낸다. 새벽은 어둠의 커튼을 올리며 서서히 다가오고, 시간의 전령을 마다 않던 닭도 붉은 벼슬을 세우고 새벽을 향해 목청을 높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러나 존재감이 없는 것들은 숨어 소리를 키운다. 유년의 내 옷 속에서도 그것은 필수적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밀한 위치에 숨어 자기의 기능을 다한다. 산소 방울로 올라오는 투명한 기포처럼 빛나다 사라지는 기억의 그물 안에서 건져내는 은빛 갈치의 눈알처럼 동그랗게 빛나던 존재. '꽃마리' 처럼 작은 그 존재의 언어. 그것은 마치 '똑', 한 발짝 딛고 기우뚱하다가 내딛는 첫돌배기의 서툰 한 박자의 걸음처럼, 한 템포 쉬고 잠시 머뭇거리다 '딱'으로 되돌아온다. ..

좋은 수필 2021.05.15

멸치 똥을 따며 / 심선경

멸치 똥을 따며 / 심선경 나이 오십이 넘어 소주 맛을 알게 되었다. 새벽녘에 내린 소낙비에 잠이 깨어 아무리 뒤척여도 다시 잠들기가 힘들다. 부엌에 나와 냉장고에 든 소주 한 병을 꺼낸다. 기껏해야 마른 멸치 한 줌을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이 안주의 전부지만, 이제 안주 없이도 술맛이 쓸 때와 달 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멸치 대가리를 떼어내고 새까만 똥을 빼낸다. 멸치 똥을 쉽게 빼내려면 아가미 쪽에 이쑤시개를 넣고 아랫배 부분을 들어 올리듯 하면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멸치 똥만 제거할 수 있다. 이 방법을 몰랐을 땐 멸치를 반으로 쪼개어 속에 든 새까만 똥을 긁어내느라 멸치 몸통이 부스러진 게 태반이었고 깔아놓은 신문지엔 멸치가루가 수북했다. 멸치의 어원은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데..

좋은 수필 2021.05.15

봄바람/한경희

봄바람 한경희 무르익은 봄이 흰 전시 벽을 휙휙 지나간다. 뭐가 그리 급한지 여름으로 달음질을 친다. 다르면서도 같은, 고만고만한 화폭들이 지루해질 때쯤 한 청년이 인솔자에게 다가와 소곤거린다. 이내 고개를 들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상큼하다. 청년은 어디 하나 거슬리는 부분이 없다. 귀 위로 짧게 쳐낸 윤기 나는 머리카락, 생기 있고 뚜렷한 이목구비, 반듯하고 넓은 어깨에 긴 팔과 뽀얀 손,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적당한 체격에 세련된 옷과 깨끗한 운동화 차림이다. 아름다움이란 ‘조화로운 상태’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전시회를 다 둘러보기도 전에 나는 벌써 미술 기행이 실어다 준 봄바람에 푹 빠져 버렸다. 나도 모르게 청년의 뒤만 졸졸 따른다. 청년은 커다란 펜화 앞에 멈춰 섰다. 자목련이 ..

좋은 수필 2021.05.15

엄대/김옥한

엄대/김옥한 잠든 남편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마른논바닥 같은 그곳엔 구석구석 크고 작은 주름이 떼를 이루고 있다. 이마를 가로 지르는 주름과 눈 가의 잔주름들이 다투어 피어 있다. 마주볼 땐 몰랐는데 잠든 얼굴에서 더욱 선명하다. 어떤 주름은 분절음처럼 뚝뚝 끊기기도 했고 어떤 주름은 이랑처럼 골이 깊다. 언젠가 보았던 엄대 같다. 엄대는 옛날의 외상장부다. 반찬 가게나 푸줏간에서 외상 거래할 때 물건 값을 표시하는 길고 짧은 금을 새긴 막대기를 말한다. 엄대에다 들여놓은 물건의 분량만큼 금을 그어놓고 나중에 한꺼번에 계산을 했다고 한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장부역할을 대신했다. 몇 해 전 여행길에 삼강주막에서 엄대를 보았다. 부엌은 물론 바깥벽까지 금을 그어 놓았다. 흙벽에 부지깽이로 그은 흔적..

좋은 수필 2021.05.15

누름돌/최원현

누름돌/최원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 세상을 사신 분들의 삶이 결코 나만 못한 분은 없다는 생각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서가 아니다. 그분들이 살아왔던 삶의 날들은 분명 오늘의 나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과 조건의 세상살이를 하셨다. 그런 속에서도 묵묵히 그 모든 어려움과 아픔을 감내하면서 지신의 몫을 아름답게 감당하셨던 것이다. 요즘의 나나 오늘의 상황을 살펴보아도 그분들보다 어렵다고는 할 수 없겠고, 특히 그분들이 처해 있던 시대는 지금에 비교도 할 수 없이 열악한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대였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보다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엄격하게 당신들 스스로를 절제하고 희생하셨다. 그분들의 어느 한 삶도 결코 오늘의 우리만 못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저 잘났다는..

좋은 수필 2021.05.15

누름돌/정성려

누름돌/정성려 그런대로 아담하고 반질반질한 항아리 속에서 노란빛이 어린 오이지를 꺼냈다. 펄펄 뛰는 오이들을 사뿐히 눌러 진정시켜주던 누름돌을 들어내니, 쪼글쪼글해진 오이들이 제 몸에서 빠져나간 물에 동동 뜬다. 항아리 속의 오이는 볕이 들지 않은 음지에만 있어야 하기에 조금은 서먹하지만, 누름돌 무게로 숨을 죽이며 제 몸속 물을 토해내고, 간기가 스며들면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숙성되어 짜릿하고도 오독거리는 맛을 냈다. 이렇게 숙성된 오이를 맛깔스럽게 썰어 참기름을 치고, 갖은 양념을 넣어 무치면 그야말로 침이 절로 돌며 식욕을 돋운다. 그래서 오이지는 여름철 내내 우리 집 밥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밑반찬으로 각광을 받는다. 오이지를 유독 우리 집 식구만 좋아해서는 아닐 것이다. 입맛이 없거나 시간에 ..

좋은 수필 2021.05.15

소반/류재홍

소반/류재홍 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 왔다. 모태로부터 물려받은 강인한 의지와 묵직함을 자랑으로 여긴다. 더러 모질다는 소리도 듣는다. 산다는 일이 그리 만만한 일이던가. 내 안의 나보다 더 독해져야 할 때도 있느니, 이것이 4대째 쇠심줄처럼 살아남은 생의 비밀일지도 모르겠다. 소반(小盤)이란 이름으로 태어나던 날이 까마득하다. 보리가 제법 파랗게 살이 올랐을 때였다. 한 부인이 맏아들 혼사 때 쓸 것이라며 공방에 들렀다. 그 공방은 근방에서 꽤 소문난 집이었다. 목공은 다른 것들보다 달포나 더 씨름한 끝에 나를 완성했다. “백 년 묵은 귀목 통판을 그대로 쓴 놈이니 요긴하게 쓰일 것이오.” 그는 내가 아까운 듯 몇 번이나 쓰다듬다 건네주었다. 주인을 따라 집에 오던 날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앙..

좋은 수필 2021.05.15

빈집/류재홍

빈집/ 류재홍 녹슨 철문을 민다. ‘삐거덕’ 된소리를 낼 뿐 그만이다. 팔에 힘을 실어 밀어 제치자 그제야 무거운 몸을 비켜선다. 마당은 그새 풀밭이 다 되었다. 인기척에 놀란 잡초들의 수런거림에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내가 오히려 뒷걸음질이다. 자기들이 주인인양 기세가 대단하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태어나는 질긴 목숨일진대, 두 달 여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니 오죽할까. 툇마루는 더욱 가관이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흙부스러기들을 잔뜩 안고 있다. 올려다보니 천정 한쪽이 허물어져 흙덩이 몇이 또 떨어질 기세다. 민망하여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닌 게야. 하기야 훈기도 없는 집에 무슨 낙으로 제 몫들을 하려고 들겠나. 살 비비며 눈 맞춤해야 사랑이든 미움이든 생겨날 게 아닌가. ..

좋은 수필 2021.05.15

연필로 쓰기/정진규

연필로 쓰기/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반편도 거두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

좋은 시 2021.05.15

‘디귿’과 돌고 돌아 / 민명자

‘디귿’과 돌고 돌아 / 민명자 디귿, 너를 생각하면 ‘돌고 돌다’가 먼저 떠올라.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 했던가. 그런데 돌고 도는 게 어디 인생뿐이겠니? 지구도 돌고, 굴렁쇠도 돌지. 수레나 자전거나 자동차 바퀴도 돌고 돌아야 제구실을 하지. 가만, 생각해 보니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세월 따라 인심도 돌고 돌아. 디귿이 없으면 ‘돌다’도 없지. 오늘은 디귿, 너와 더불어 디귿의 나라를 돌고 돌아볼까? # 다 ‘다’, 모으고 흩트리며 마치는 힘이 있지. ‘다’는 ‘우리, 모두, 함께’와 친해. 이것도 모으고 저것도 다 모아. 아니, 모두 다 버리기도 해. 오늘은 우리, 모두, 다, 함께 모여 마음을 나눠볼까? 노래나 한바탕 불러볼까? 놀이동산에라도 가볼까? 아니야, 모두 다 흩어져서 제..

좋은 수필 2021.05.14

토렴 / 문경희

토렴 / 문경희 한때 오지 중의 오지였다는 함양땅 상림이다. 아직도 이곳은 사람보다 꽃과 나무와 새들로 북적거린다. 그들이 미처 채우지 못한 자리는 이름 모를 풀들이 가녀린 목숨을 빼곡하게 꽂고 있다. 이따금 손 없는 바람에 멱살을 잡히기도 하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앉은자리를 지켜낸다. 개개의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하나를 우리는 숲이라 부른다. 숲의 구성원들은 경쾌한 팔분음표가 되는가 하면 묵직한 쉼표가 되기도 하며 웅장한 숲의 악장을 이끌고 나간다. 나서면 물러설 줄 알고, 취하면 버릴 줄도 아는 오래된 약속이 살아 있는 곳. 간만에 그들만의 세상에서 청정한 하루를 탁발해 볼 욕심으로 우중불사 달려왔다. 나무는 숲을 이루지만 인간은 결코 숲을 이루지 못하는 족속이라고, 어느 칼럼니스트가 꼬집어 놓은 ..

좋은 수필 2021.05.14

각도/박지영

각도/박지영 주인보다 늠름한 지팡이가 초인종 없는 대문을 대신 두드린다. 여든 중반인 친정아버지 친구 분들이 병문안을 오셨다. 느닷없는 의식불명으로 일주일가량 병원 신세를 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신 게다. 관절염 환자인 엄마에게,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치매 증상을 보이는 아버지의 간병은 무리였다. 그래서 환자에게 환자를 맡길 수는 없다는 판단 하에 잠시 동안 친정에서 아버지를 간병하던 터였다.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수 없어 달려 나가 대문을 열어 드렸다. 녹슨 대문은 엄마 무릎을 닮았는지 여닫을 때마다 삐걱거린다. 삐걱, 그 여운의 말미쯤에 할아버지, 할머니 대여섯 분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신다. 당장 병원 신세를 지지는 않고 있을 뿐, 병문안이라면 가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익숙한 분들이다. 그 어려운 ..

좋은 수필 2021.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