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81

고딕과 명조/김현지

고딕과 명조 / 김현지 모니터 속 글자들이 내 처분만을 기다리는 듯 모여 있다. 크고 작은 글자들은 제각각의 개성을 살려주어야 하기에 수십 가지의 서체들을 대입시켜 보지만 영 마뜩잖다. 한참을 이 옷, 저 옷으로 바꿔 입혀 보다가는 정해진 결론처럼 고딕과 명조로 마무리한다. 모두들 제 나름의 일을 하고 살아간다. 나는 글자들을 배열하고 다듬는 일을 한다. 타자기로 문서를 작성하던 시절에는 틀에 박힌 글자 모양만도 충분했던 때가 있었다. 컴퓨터가 보급되고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수많은 글자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고딕과 명조는 글자체의 기본 중에 기본이다. 고딕은 제목 글자체로 탁월하다. 우직하고 곧은 획은 어떠한 역경에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있어 본문을 이끌어 가기..

좋은 수필 2021.05.13

부엌의 불빛/이준관

부엌의 불빛 이준관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 무릎처럼 따뜻하다. 저녁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의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 한다.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하늘엔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 별이 태어난다. ―이준관(1949~ ) 불, 모닥불을 피우고 모여서 이런저런 것들을 구워 먹고 살았습니다. 그 바깥에 기둥을 세우고 얽어서 지붕을 올려 '집'이라는 것을 지었습니다. 부엌만 있는 집이지요. 그 집의 자애로운 왕은 어머니! 식구들을 골고루 나눠 먹이고 키우는 왕이지요. 지금 자리에 없으면 남겼다가 나누는 공..

좋은 시 2021.05.12

굳은살/김정임

굳은살/김정임 그는 내 무릎에 발을 올려놓고 잠이 들 었다. 남편의 발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있었던가. 억세게 보이는 발꿈치에는 온통 굳은살이다. 사람을 대할 때 가장 나중에 보게 되는 것이 발이 아닐까.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될 때쯤 발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그의 낯선 뒷모습을 보듯 가만히 그의 굳은살을 살펴본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잠시 낮잠에 빠져든 남편, 굳은살은 그의 발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 말하지 못한 어려운 일들이 가슴 한구석에 층층이 굳은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잠든 그의 얼굴에 자리 잡은 굵은 주름이 지난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아침이 되면 남편은 정확한 시계처럼 출근을 한다. 가끔 그의 구두를 닦을 때마다 구두 뒤축..

좋은 수필 2021.05.12

가자미 한 토막 / 정재순

가자미 한 토막 / 정재순 좋아하던 것이 갑자기 싫어질 때가 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입은 마음의 상처가 컸거나, 잘못을 저지른 걸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눈이 한쪽으로 몰린 생선을 멀리한다. 바다에서 나온 음식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하지만, 납작하게 생긴 가자미는 이름이 얼씬거리기만 해도 고개를 돌리게 된다. 옆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정을 다녀왔다며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현관에 들어서는데 맛있는 냄새가 진동해 식욕이 돋았다. 식탁에는 금방 지어서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밥과 따끈한 미역국과 몇 가지의 반찬이 깔끔하게 차려져 있었다. 친구는 가스렌지 불을 끄고 가자미조림을 쟁반에 수북이 담아왔다. 가자미를 보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 몇 해 전, 만..

좋은 수필 2021.05.12

파장罷場과 노을 / 김원순

파장罷場과 노을 / 김원순 파장의 새벽은 늘 소리와 냄새가 연다. 갓 뽑아온 풋것들에 딸려 온 흙내, 풋내들, 붉은 고무물통 속의 잉어나 가물치들의 육탁과, 난장을 들썩이는 뻥튀기 소리, 제 살과 뼈를 바순 깨소금, 고춧가루 냄새도 이에 질세라 앞을 다툰다. 원초적 본능이 꿈틀대는 삶의 개펄이다. 난장 구석받이에서 펄펄 끓는 선지국 가마솥은 팔려나온 강아지, 닭 울음도 훌쳐서 푹 고으고 있다. 신산한 삶에 부대낀 속을 훑어줄 듯 시뻘건 관능미로 유혹하는 저 몸짓! 검은 가마솥이 척 걸쳐지는 장날은, 무싯날엔 볼 수 없는 정겹고 활기찬 한 폭의 풍속화다. 굳은살 박힌 생生들이 새벽부터 하나, 둘 샛강처럼 모여든 난장이다. 미처 털어내지 못한 노동의 단내와, 밤새도록 부스럭대던 선잠도 따라와 난전을 편다. ..

좋은 수필 2021.05.12

호박잎타령/권갑하

호박잎타령 권갑하 연둣빛 더듬이 세워 아득한 허공 길을 팍팍한 돌서덜엔 환히 밝힌 호롱불꽃 덩굴손 움켜쥔 사랑 주렁주렁 맺어 놓고 김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쌈해 먹는 밥물에 살짝 쪄낸 풋풋한 그 맛이란 강된장 구수한 향에 꺼끌꺼끌한 식감까지 잔칫집 돼지고기 시장에선 꽁치 조기 천렵 갈 땐 된장 고추장 주섬주섬 싸가던 넓적한 음식 보자기 가난마저 감쌌었지 넘실남실 넌출넌출 타고 넘는 한 생이라 후두둑! 빗발쳐도 온몸으로 받아내는 아버지 손바닥 닮은 뭉툭하니 두터운 정

좋은 시 2021.05.11

막걸리/최영철

막걸리 / 최영철 쌀뜨물 같은 이것 목마른 속을 뻥 뚫어 놓고 가는 이것 한두 잔에도 배가 든든한 이것 가슴이 더워져 오는 이것 신 김치 한 조각 노가리 한 쪽 손가락만 빨아도 탓하지 않는 이것 허옇다가 폭포처럼 콸콸 쏟아지다가 벌컥벌컥 샘물처럼 밀려들어오는 이것 한 잔은 얼음 같고 세 잔은 불 같고 다섯 잔 일곱 잔은 강 같고 열두어 잔은 바다 같아 둥실 떠내려가며 기분만 좋은 이것 어머니 가슴팍에 파묻혀 빨던 첫 젖맛 같은 이것 시원하고 텁텁하고 왁자한 이것 어둑한 밤의 노래가 아니라 환한 햇볕 아래 흥이 오르는 이것 반은 양식이고 반은 술이고 반은 회상이고 반은 용기백배이다가 날 저물어 흥얼흥얼 흙으로 스며드는 순하디 순한 이것

좋은 시 2021.05.11

옻닭/손택수

옻닭 / 손택수 1 그늘만 스쳐도 살갗에 소르르 소름이 돋는다 해마다 한 번씩 자신을 스쳐간 폭염과 홍수 팔을 뚝뚝 부러뜨리던 폭설의 기억을 비벼 꼬아 제 속을 치잉칭 결박하는 나무 속을 쥐어짜 잎잎이 푸르디푸른 신음을 뱉어낸다 허나 독기라면 닭도 지지 않는다 한평생을 옥살이로 보내온 그가 아닌가 톱날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벼슬과 부리, 쇠창살 사이로 모가지만 간신히 빼내어 댕강 참수를 당하는 그 순간까지 제 것이 아닌 몸뚱이를 키우며 살아온 그가 아닌가 지독에 이른 동물과 식물이 한 몸이 되기 위해 부글부글 끓고 있다 2 독기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 나를 무심코 집어삼킨 세상에 우둘투둘한 옻독을 옮기리라 뚝배기 국그릇 속에 코를 쥐어박고 아버지와 함께 옻닭을 먹는다 두 편에 오만 원 어쩌다 받은 원고료로..

좋은 시 2021.05.11

홍어/이명윤

홍어/이명윤 죽음도 조금씩 숙성될 수 있어 좋다 죽음을 항아리에 담아 꽃처럼 피우는 일, 죽음이 차마 못다 한 말들 달빛 쏟아지는 담장 밑에 묻어 두고 그 울분을 천천히 삭이는 일 죽어도 무대가 끝나지 않아 좋다 납작 엎드린 생이던 구차하게 코가 낀 생이던 살아온 날들 알싸하게 발효되어서 좋다 어느 날 벌떡 일어난 죽음이 삶의 코끝을 쿡 찔러서 좋다 죽음의 지독한 말이 세상에 널리 널리 퍼져서 좋다 죽음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잎을 피운 죽음의 맛에. 엄지 척 즐거워하는 문상객들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좋다 죽음을 키워서 파는 동네에 가면 오랫동안 붉은 눈을 뜬 죽음이 곱절로 맛있다

좋은 시 2021.05.11

식사법/김경미

식사법 김경미 ​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 가지 반찬만일 것 ​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 명에나 못 죽는 것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것 마저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잘 넘길 것

좋은 시 2021.05.11

메밀전병/전윤호

-메밀전병/전윤호- 강원도 정선 오일장에 가면 함백산 주목처럼 비틀어진 할머니들이 부침개를 파는 골목이 있지 가소로운 세월이 번들거리는 불판에 알량한 행운처럼 얇은 메밀전을 부치고 설움을 잘게 다진 묵은지로 전병을 만들지 참 못생기고 퉁명스런 서방이 대낮에 이불 둘둘 말고 자빠진 모양 한입 씹으면 시금털털한 사는 맛을 느끼지 함석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들으며 옥수수막걸리를 마시던 친구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뒤통수만 보여 주며 달아나던 처녀들도 간 곳 없는데 이 땅의 하늘을 떠받친 태백산맥 아래 아라리 흐르는 강 사이로 메밀전병 부치는 할머니들은 고소한 기름 냄새 풍기며 아직 그 자리에 있지

좋은 시 2021.05.11

국수/장석주

국수 장석주 지느러미도 깃털도 없는 나를 위해 노모가 점심 식사를 내오셨다. 직립인의 고요한 식욕에 부응하는 이것, 뼈도 근육도 없는 이것, 비늘을 가졌거나 가시를 가진 것도 아닌 이것, 두드리고 때려 단련시켰건만 물과 만나 허수히 무너지는 이것, 여럿이되 하나고 단순하되 극적인 이것, 한 끼니의 편이, 미끈거리는 촉감의 허영심, 오랜 명망과 혁명의 동지들, 가느다란 養生의 꿈들!

좋은 시 2021.05.11

잡탕밥/박수서

잡탕밥/ 박수서 여기 잡탕밥 둘! 사는 게 뭐라고 그까짓 인생이 뭐라고 섞고 볶다 보면 그게 그거 아니겠어 새우의 갑옷을 벗기고, 오징어를 칼등으로 으깨고, 해삼을 능지처참하고, 전복을 비응도飛鷹島 우럭처럼 날리고, 소라의 어깨를 긁어 고추기름, 식용유, 대파, 마늘, 간장, 굴소스가 떡 하니 입 벌려 날름 밥을 받아먹고 뒹굴다 보면 잡탕밥 아니겠어 사는 일이 짬짬하고 싱거울 때 삶의 날것들을 모아 채썰기라도 하여 모아두면, 아니 이 삶과 저 삶 위에 달걀 하나 툭, 까 올려 비비고 볶아 본다면 알겠지 사는 일이 뭐라고 지지고 볶으며 날마다 날마다 잡탕밥을 짓고 있는 일이라고 - 시집『해물짬뽕 집』(달아실, 2018)

좋은 시 2021.05.11

노각正傳/김현주

노각正傳 김현주 끝물을 수확한 오이 밭고랑에서 노각이 흔들흔들 술毒에 누렇게 쇤 할아버지를 끌고 가는 녹슨 자전거 바퀴가 흔들흔들 어젯밤 천둥번개에도 끄떡없던 노각이 쿵, 하고 누렇게 쇤 등짐을 아무렇게나 부려놓네 아이코, 이 웬수야! 비틀거리는 생의 주름살을 늦은 햇살이 잡아당겨 칭칭 감고 있네 어지러움 증처럼 천천히 되감기는 녹슨 바퀴살 사이로 망망한 갈증을 견디고 있는 노각의 굽은 등을 바라보네 헝클어진 몸을 반듯하게 눕히고 흙 묻은 껍질을 벗기자 낡은 런닝 밑으로 쉰내 나는 땀방울이 물컹한 슬픔으로 만져지네 어둡고 험한 삶의 고랑을 더듬더듬 넘을 때마다 더러는 치밀어 오르는 홧덩이를 천천히 꺼내 휙, 내던지던 곳, 슬픔 같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저기 한 뼘 허공에 머물기 위해 쿵, 하고 맨땅에..

좋은 시 2021.05.10

궤적(軌跡) /윤남석

궤적(軌跡) /윤남석 오동나무 줄기는 뒷날개 보호망 아래쪽에서 앞날개 보호망 위쪽으로 관통되었다. 굵은 줄기는 전․후망 고정 장치를 사정없이 찢었고, 보호망의 외주연테는 표피에 잔인한 궤적을 퍼렇게 그리고 있다. 마치 오동나무 토막이 유선형의 날개를 꿀꺽 삼켜버린 듯하다. 축받이에 달려있는 날개는 강하게 회전하며 찰나적으로 예리하게 후벼 판 듯 박혀 있다. 전동기가 회전축에 붙은 날개를 힘껏 돌리려했지만, 오동나무는 몸통이 심하게 베이면서도 악물스럽게 날개의 회전을 막아선 것처럼 보인다. 오동나무는 복부에 박힌 그 플라스틱 날개 때문에 여태껏 겨워하는 표정이다. 게다가 전․후망 고정 장치가 터지면서 질긴 스테인리스 재질의 외주연테가 오동나무 줄기를 심하게 옭아매고 있다. 통고痛苦의 여파가 얼마나 컸으면,..

좋은 수필 2021.05.10

그령 / 윤남석

그령 / 윤남석 【듬성듬성 돋은】 그령을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긴다. 잔디 마당에 바소 모양 잎사귀가 어지간히 거슬리게 한다. 몇 번이고 뽑고 호미로 뿌리까지 캐냈지만, 잠자리 눈곱만 실뿌리라도 남아있으면 어김없이 살아나 성가시게 한다. 마당에는 그령뿐 아니라 질경이, 토끼풀, 새포아풀, 피막이풀, 바랭이 등이 여간 자드락거리는 게 아니다. 정말 잡초와의 긴 싸움에서 치러야만 잔디밭을 지켜낼 수 있다. 잡풀의 질긴 근성은 마치 불겅거리는 ​ 쇠심떠깨(힘줄이 섞여 있어 질긴 쇠고기) ​ 같다. 화사하거나 우아하지도 못해 눈 밖에 난 찬밥 신세지만, 은근히 시선 잡아끌려고 갖은 수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이음달아 줄기를 키워내는 왕성함에 눈길이 온통 잡풀로 쏠리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그중에서도 질경이와..

좋은 수필 2021.05.10

창 / 김이랑

창 / 김이랑 그놈 참 똑똑하다. 아무 때나 손가락만 까딱하면 바깥세상을 내다보고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찾는다. 멀리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널리 나를 알릴 수도 있다.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이 부리는 요술은 상상을 넘어선다. 옛집에도 조그마한 창이 있었다. 창호지를 손바닥만큼 뜯어내고 유리를 붙이면 뙤창문이 되었다. 인기척이 들리거나 바깥이 궁금하면 눈을 갖다대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밖이 희미하게 보일 때, 입김을 호호 불어 먼지를 닦아내면 깨끗하게 보였다. ​ 뙤창문으로는 마당만 보일 뿐, 산 너머 세상은 보이지 않았다. 바깥세상에서 오는 건 활자와 소리였다. 굽이굽이 고개를 넘느라 신문도 하루 늦게 오는 하늘아래 첫 동네에는 전파도 숨을 헐떡거리며 왔다. 지지직대는 소리를 잡으러 귀를 기울이..

좋은 수필 2021.05.10

이별 / 김경

이별 / 김경 밖이 잠잠하다. 이른 아침부터 그렇게도 요란하더니 어느새 정적이 감돈다.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하고 애꿎은 시계만 쳐다보던 터다. 목을 빼고 내다보니 우리 집 창문 위로 뻗어있던 고가 사다리가 없다. 이제 정말로 간 건가. 애써 담담했던 마음이 무너진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입주를 해서 여태 살았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 그녀와 친구로 지냈다. 며칠 전 이별주를 나누면서 밤이 늦도록 이 식당 저 카페를 전전했다. 우리가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에 부슬비 내리는 밤길을 우산도 없이 걸어 집으로 왔다.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던 그녀가 갑작스런 이유로 가게 된 사실에 적응되지 않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삼십대의 끝에서 우리는 처음..

좋은 수필 2021.05.10

카펫을 깔며 /김순희

카펫을 깔며 김순희 카펫을 깔았다. 아이들 호흡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한동안 수납장 속에 넣어 두었었다. 정해진 공간에 넣기 바빠 카펫의 형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구석진 곳에 넣기 위해 여러 번 겹접었다. 오랜만에 펼쳐 놓으니 판판하지 않다. 접혔던 선이 선명하다. 자근자근 눌러서 가라앉히려 해도 조금 지나면 등허리가 불룩 튀어나온다. 울룩불룩한 카펫 위를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그 등쌀에 이리저리 밀릴까 봐 소파 발을 빌어 한 귀퉁이씩 눌러 놓았다. 식구들이 번갈아 가며 등도 대주고 엉덩이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할까 보다. 며칠은 그렇게 달래야지. 달래야 할 것은 카펫만이 아니다. 요즘 내 마음이 마음이 아니다.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오래 접혔던 카펫을 펼친 것처럼, 아무리 혼자 삭히려 해도..

좋은 수필 2021.05.10

문(問), 문(門)을 열다 / 허 석

게시글 본문내용 문(問), 문(門)을 열다 / 허 석 닫혀있는 문이다. 아니, 열리지 않는 문 속에 산다. 소통이 없는 문의 안과 밖은 다른 세계, 너와 나, 관계의 단절로 이어져 서로가 서로를 들여다볼 수 없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거나 아파트 현관문처럼 견고한 벽으로 가로막고 있어서 허락 없이는 한 발자국도 자기 영역을 침범할 수 없는 문이다. 통로가 되어야 할 문이 움직이지 않는 경계가 되어버렸다. 시골에 거주할 때였다. 조용하고 한적하게 지낼 곳을 찾아다녔는데 마음에 든 집이 그랬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큰길 쪽은 아래채가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고 대문은 일부러 숨겨둔 것처럼 좁다란 골목 안쪽에 나 있었다. 집 내부가 다른 사람에게 전연 들여다보이지 않고 집안에서도 바깥이 전연 보이지 않아 남을..

좋은 수필 2021.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