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86

그령 / 윤남석

그령 / 윤남석 【듬성듬성 돋은】 그령을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긴다. 잔디 마당에 바소 모양 잎사귀가 어지간히 거슬리게 한다. 몇 번이고 뽑고 호미로 뿌리까지 캐냈지만, 잠자리 눈곱만 실뿌리라도 남아있으면 어김없이 살아나 성가시게 한다. 마당에는 그령뿐 아니라 질경이, 토끼풀, 새포아풀, 피막이풀, 바랭이 등이 여간 자드락거리는 게 아니다. 정말 잡초와의 긴 싸움에서 치러야만 잔디밭을 지켜낼 수 있다. 잡풀의 질긴 근성은 마치 불겅거리는 ​ 쇠심떠깨(힘줄이 섞여 있어 질긴 쇠고기) ​ 같다. 화사하거나 우아하지도 못해 눈 밖에 난 찬밥 신세지만, 은근히 시선 잡아끌려고 갖은 수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이음달아 줄기를 키워내는 왕성함에 눈길이 온통 잡풀로 쏠리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그중에서도 질경이와..

좋은 수필 2021.05.10

창 / 김이랑

창 / 김이랑 그놈 참 똑똑하다. 아무 때나 손가락만 까딱하면 바깥세상을 내다보고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찾는다. 멀리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널리 나를 알릴 수도 있다.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이 부리는 요술은 상상을 넘어선다. 옛집에도 조그마한 창이 있었다. 창호지를 손바닥만큼 뜯어내고 유리를 붙이면 뙤창문이 되었다. 인기척이 들리거나 바깥이 궁금하면 눈을 갖다대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밖이 희미하게 보일 때, 입김을 호호 불어 먼지를 닦아내면 깨끗하게 보였다. ​ 뙤창문으로는 마당만 보일 뿐, 산 너머 세상은 보이지 않았다. 바깥세상에서 오는 건 활자와 소리였다. 굽이굽이 고개를 넘느라 신문도 하루 늦게 오는 하늘아래 첫 동네에는 전파도 숨을 헐떡거리며 왔다. 지지직대는 소리를 잡으러 귀를 기울이..

좋은 수필 2021.05.10

이별 / 김경

이별 / 김경 밖이 잠잠하다. 이른 아침부터 그렇게도 요란하더니 어느새 정적이 감돈다.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하고 애꿎은 시계만 쳐다보던 터다. 목을 빼고 내다보니 우리 집 창문 위로 뻗어있던 고가 사다리가 없다. 이제 정말로 간 건가. 애써 담담했던 마음이 무너진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입주를 해서 여태 살았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 그녀와 친구로 지냈다. 며칠 전 이별주를 나누면서 밤이 늦도록 이 식당 저 카페를 전전했다. 우리가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에 부슬비 내리는 밤길을 우산도 없이 걸어 집으로 왔다.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던 그녀가 갑작스런 이유로 가게 된 사실에 적응되지 않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삼십대의 끝에서 우리는 처음..

좋은 수필 2021.05.10

카펫을 깔며 /김순희

카펫을 깔며 김순희 카펫을 깔았다. 아이들 호흡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한동안 수납장 속에 넣어 두었었다. 정해진 공간에 넣기 바빠 카펫의 형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구석진 곳에 넣기 위해 여러 번 겹접었다. 오랜만에 펼쳐 놓으니 판판하지 않다. 접혔던 선이 선명하다. 자근자근 눌러서 가라앉히려 해도 조금 지나면 등허리가 불룩 튀어나온다. 울룩불룩한 카펫 위를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그 등쌀에 이리저리 밀릴까 봐 소파 발을 빌어 한 귀퉁이씩 눌러 놓았다. 식구들이 번갈아 가며 등도 대주고 엉덩이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할까 보다. 며칠은 그렇게 달래야지. 달래야 할 것은 카펫만이 아니다. 요즘 내 마음이 마음이 아니다.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오래 접혔던 카펫을 펼친 것처럼, 아무리 혼자 삭히려 해도..

좋은 수필 2021.05.10

문(問), 문(門)을 열다 / 허 석

게시글 본문내용 문(問), 문(門)을 열다 / 허 석 닫혀있는 문이다. 아니, 열리지 않는 문 속에 산다. 소통이 없는 문의 안과 밖은 다른 세계, 너와 나, 관계의 단절로 이어져 서로가 서로를 들여다볼 수 없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거나 아파트 현관문처럼 견고한 벽으로 가로막고 있어서 허락 없이는 한 발자국도 자기 영역을 침범할 수 없는 문이다. 통로가 되어야 할 문이 움직이지 않는 경계가 되어버렸다. 시골에 거주할 때였다. 조용하고 한적하게 지낼 곳을 찾아다녔는데 마음에 든 집이 그랬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큰길 쪽은 아래채가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고 대문은 일부러 숨겨둔 것처럼 좁다란 골목 안쪽에 나 있었다. 집 내부가 다른 사람에게 전연 들여다보이지 않고 집안에서도 바깥이 전연 보이지 않아 남을..

좋은 수필 2021.05.10

믹서/김영미

​ ​ ​ 믹서 ​ ​ 원산지에 따라 생육사가 다른 각양각색의 과일들 믹서에 넣는다 ​ 스위치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 격동의 한 세기가 몰려온다 굉음을 울리며 칼날의 검은 회오리 속으로 빨려든다 꿈결처럼 빨강과 초록, 극좌와 극우가 손을 잡고 주황과 연두, 중도와 보수가 섞인다 과육 속 붉게 영근 따가운 햇살이 섞이고 지중해의 염분과 아열대를 적시는 오후의 소낙비 몬순의 당도가 섞인다 기적처럼 껍질과 알맹이의 근원적 대립이 몸을 풀고 열 번의 만남과 스무 번의 헤어짐 마침내 모든 입자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꿈결 같은 탁자 위, 한 잔의 코스모 폴리탄! ​ 원심분리 되지 않는 그대와 나 믹서에 넣는다 뼈와 몸뚱이 비극처럼 회오리처럼 ON OFF ON OFF ​ ​ ​ 여름철 주방기구의 주인공은 단연 믹서! ..

좋은 시 2021.05.09

태그매치(Tag match) / 김단

태그매치(Tag match) / 김단 해가 중천에 떴는데 기척이 없다. 빼꼼히 방문을 열고 안의 동태를 재빨리 살핀다. 이불이 규칙적으로 들썩거린다. 휴~ 다행이다. 살아 있네! 다음은 무관심이다. 무얼 하든, 어딜 가든, 밤늦게라도 잊지 않고 집에만 들어오면 된다. 난 아침형인간이고 그는 올빼미족이라 아침은 각자 해결이다. 난 내 방에서 소리로 그의 행동반경을 감지한다. 저녁이 되면 말없이 서로의 얼굴은 보지 않고 밥 먹는 일에만 전력을 다한다. 밥에 돌이라도 들어갔는지, 반찬에 머리카락이 있는지, 눈에 불을 켜며. 그는 문간방에서, 난 거실을 독차지하고 TV를 본다. 어차피 선호하는 채널이 달라 같이 볼 수 없다. 예전엔 보고 싶지 않은 프로도 무심히 정답게 같이 보았지만, 거실 스탠드를 켜놓고 내가..

카테고리 없음 2021.05.08

왕뚜껑전/김지영

왕뚜껑전/김지영 나하고 같은 교무실을 쓰는 종익이 형은 별명이 왕뚜껑이다. 그는 키가 160센티를 겨우 넘고, 머리는 반쯤 벗겨졌는데, 그나마 남은 머리털마저도 희끗희끗하다. 배는 볼록 튀어나오고, 눈은 왕방울처럼 크고 부리부리하다. 나한테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자기의 얼굴을 내 얼굴에 맞닿을 듯 대고 심각한 말이라도 하듯 한다. 그럴 때마다 내 얼굴에 침이 튀어 죽을 맛이다. 말을 할 때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며 침까지 튀겨,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듣는데도 그는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할말을 다한다. 그가 왕뚜껑이란 별명이 붙은 것은 느닷없이 화를 잘 내기 때문인데 한 번 화를 내면 아무도 못 말린다. 언젠간 수업을 하다가 문이 부서져라. 열고, 복도로 달려 나와 씩씩거렸다. 마침 나는..

좋은 수필 2021.05.08

주먹/정진희

주먹 정진희 손목뼈에 금이 가 한 달 넘게 석고붕대를 하고 나니 손가락이 굳었다. “이러다간 평생 주먹을 못 쥐어요.” 의사가 으름장을 놓는다. 물리치료와 운동을 한 지 석 달 째인데도 여전히 주먹은 쥘 수가 없다. 손가락 끝이 손바닥에 닿지 않는 것이다. 뼈는 천천히 붙어도 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손을 못 쥐면 영영 주먹을 쥘 수가 없다고 한다. 잠시라도 손을 펴고 있으면 편대로, 쥐고 있으면 쥔대로 굳어져 움직일 때 마다 뼈 마다마디와 근육이 아프다. 손가락 접기와 펴기 운동을 하다가 안 다친 오른 쪽 손으로 주먹을 쥐어 봤다. 날렵하고 가뿐히 손바닥에 손가락 끝이 파묻히도록 쥐어 진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뭘 했을까를 생각하니 기억나는 것이 가위바위보 놀이 밖에 없다. 더구나 왼 손으로 한 일은 하..

좋은 수필 2021.05.08

통곡(慟哭)의 방 / 김선화

통곡(慟哭)의 방 / 김선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울어보신 적 있나요? 저는 울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나약한 제 모습 보는 게 두려워 참았습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양동이의 눈물을 흘려야 했으니까요. 참고 참아도 눈물이 핑그르르 돌면 속 입술을 잘근 깨물며 견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본능적 속심이 이성적인 현실을 이길 경우, 꼼짝 없이 봇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누가 볼까 민망하여, 아니 누구에게 못난 모습 들키기 싫어 빈 방에 들어가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방문 여는 소리가 나면, 한쪽 구석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꺽꺽 목을 놓았습니다. 제3자가 말릴 엄두를 못 내게끔 이불자락으로 온몸을 돌돌 싸서 틀어쥐고 앙금이 죄다 토해지도록 용을 썼습니다. 울 장소..

좋은 수필 2021.05.08

매실의 초례청 / 류창희

매실의 초례청 / 류창희 춘설 분분한 가운데 연분홍빛 소녀의 얼굴로 은은한 향을 풍기던 매화. 어느덧 매실이 되어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매실을 준비하는데, 오래 전 초례청에 들어서던 동갑내기 우리 부부를 보는 듯 마음이 설렌다. 배가 볼록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고, 마지막 절차는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 혹, 불길한 기운이라도 스밀세라, 한지로 항아리 아가리를 딱 붙였다. 신방인 셈이다. 목화솜처럼 뽀얀 새 이부자리 위에 축사로 매화송이를 그릴까 하다가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적었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창에 기..

좋은 수필 2021.05.08

콩 팔러 간다/ 이고운

콩 팔러 간다/ 이고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평범한 작물, 콩은 참으로 절실한 곡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위대한 생각으로 보면 궁전이지만 별것 아닌 삶으로 보면 하나의 꼬투리, 콩깍지 같은 데서 태어나 콩콩 뛰놀다가, 비바람에 콩 이파리로 퍼렇게 뒤집어지며 쓰러지고 마는 것 아닌가. 몸이 작아서 콩각시 같았다는 할머니가 콩 팔러 가시는 바람에, 열두 살 비릿하게 자라던 아버지는 콩꽃이 이우는 밭두렁을 안고 앵댕그라지며 울었다고 한다. 주야장천 콩밭 매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며 아버지도 별 수 없이 콩 농사를 지었다. 콕, 콕, 콕, 이랑을 점찍어 콩씨를 넣고 김을 매고, 잎에 노랑단풍이 들고 꼬투리가 벌어져 튀기 시작하면 거두어 도리깨로 타작을 했다. 그것으로 해마다 메주 쑤고 간장을 담궈 ..

좋은 수필 2021.05.08

멸치, 명태에 대한 시

멸치똥 / 복효근 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보며 똥 빠지게 피해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틸 적에 똥마저 버텼을 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딱히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어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뜯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좋은 시 2021.05.08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 최광임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 최광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밥 때를 비켜 혼자 아무렇게나 끼니를 때우는 일이다 식은 밥에 고추장 얹고 통깨 몇 알 뿌려 비빌 때의 느낌과 타월로 제 몸의 때를 밀 때의 퍽퍽함이나 같은 일이다 싱크대 위, 흐린 햇살을 쳐놓고 선 채로 쓸쓸함을 뜬다 식도를 타고 오르는 간밤의 취기 나 말고 또 누구를 만났었던가 붉은 밥 수저 안에서 역류성 식도염이 따끔 거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겹겹의 웃음이 번지고 있지만, 장기 공연하는 배우들 같았다 말이 건배를 하고 술잔이 건배할 때도 형광등보다 도수 높은 쓸쓸한 눈빛들, 외투 속 어깨를 심하게 들먹이며 골목 어디로 흩어지던 사람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보다 사랑 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은 더 쓸쓸한 일이다 ..

좋은 시 2021.05.08

단추를 달며 / 정해경

단추를 달며 / 정해경 벌써 며칠 째, 옷걸이에 걸린 와이셔츠가 문틀에 매달려 드나들 때마다 춤추듯 흔들거린다. 진즉에 말랐으니 다림질 후 장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단추 하나가 떨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원상복구만을 기다리고 있다. 단추를 단 다음 다시 빨아야 될 것 같다. 괜한 내 눈총에 더러움이 더 묻어난 것 같아서다. 갈아입는 셔츠 대열에서 이탈한 채 방치되고 있는 옷이 딱해 옷걸이를 빼내고 반짇고리를 가져왔다. 별것 아닌 일에 마음이 상해 남편과 관련된 건 가급적 눈길을 피했다. 그 와중에 와이셔츠의 단추가 실이 풀려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 셔츠는 영문도 모른 채 한참동안 문틀에 걸려 벌을 섰다. 그러고 보니 까닭 없이 수모를 당하고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솔기가 벌어진 것을 보고도 그냥..

좋은 수필 2021.05.08

손빨래하기 / 정해경 

손빨래하기 / 정해경 빨래거리가 욕실 앞에 쌓여있다. 세탁기에 넣을까 손세탁을 할까.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하다. 세탁기로 빨려면 같은 색깔끼리 분리해야 하고 양이 웬만큼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손으로 빨면 귀찮고 물 낭비가 심할 텐데, 어떻게 할까. 세탁물들은 현장에서 잡힌 죄인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묻혀 들인 더러움이 어찌 눈에 뵈는 것뿐이랴. 죄인을 닦달하여 자백을 직접 받아내는 것도 짜릿하지 않을까. 힘 뒀다 뭐하나. 그래, 손으로 반 번 빨아보자. 피의자들의 행태도 가지가지다.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기도 전에 후줄근해져 기가 꺾이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청바지처럼 뻣뻣하게 오히려 심이 박히는 놈들도 있다. 더러는 아예 풀이 죽어버려 한 손안에 쥘 정도로 존재감이 작아..

좋은 수필 2021.05.08

저수지/권정우

저수지 권정우 자기 안에 발 담그는 것들을 물에 젖게 하는 법이 없다 모난 돌멩이라고 모난 파문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검은 돌멩이라고 검은 파문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산이고 구름이고 물가에 늘어선 나무며 나는 새까지 겹쳐서 들어가도 어느 것 하나 상처입지 않는다 바람은 쉴 새 없이 넘어가는 수면 위의 줄글을 다 읽기는 하는 건지 하늘이 들어와도 넘치지 않는다 바닥이 깊고도 높다 ―권정우(1964∼) 매년 5월이 되면 정신이 확 든다. 벌써 2021년도 이만큼이나 갔구나 싶어서 마음이 급해진다. 인간관계도 돌아보게 된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챙길 일이 많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애틋한 건 어버이날이다. 부모님과 몇 해나 더 함께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5월의 찬란함은 좀 서럽다. 부모님 없이 맞는 어..

좋은 시 2021.05.08

연 필/ 모임득

연 필/ 모임득 반듯하게 깎인 연필이 필통에 가지런히 있으면 뿌듯하던 시절이 있었다. 책보자기 둘러메고 십 리 길 뛰어 학교에 가다 보면 필통 안 연필은 흐트러지고 까만 연필심은 고단함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필통 뚜껑만 열면 늘 잠자던 나무 향이 배시시 깨어나곤 했었다. 그 향은 들뜬 마음을 안정시켜 주곤 했었다. 나무 안에 감춰진 까만 속심, 연필도 요즘은 형형색색이다. 한번 검정 연필이면 평생 검은색으로만 써진다. 사람으로 치면 고지식하지만 올곧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눈뜨면 들로 산으로 다니시며 농사짓는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 같다. 밭 갈고 쟁기질하던 거친 손으로 입학하는 딸을 위해 연필을 깎아주셨던 아버지. 부러진 연필을 깎고 또 깎아서 짧아 진 몽당연필을 볼펜 껍데기에 끼..

좋은 수필 2021.05.07

낙타표 문화연필/정희승

낙타표 문화연필 Ⅰ. 연필이 백지를 앞에 두고 살을 벗는다. 신성한 백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목욕재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죄악과 탐욕으로 물든 몸뚱이 그 자체를 벗어야 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움을 쓰기 위하여 비장한 마음으로 결국 몸을 벗는다. 아, 관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시체처럼 꼼짝없이 누워 지냈던가. 외롭구나. 정말 보고 싶구나. 짓누르는 어둠 밑에서 사향각시처럼 얼마나 자주 무겁게 탄식했던가. 세상으로 나서지 못하고 몸 안에서 맴돌다 결국 살이 되어버린 부질없는 독백과 회한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싱싱한 날것으로 살아나는 생살들, 그래 이제는 가거라. 죽어도 썩지 않는 향기로운 살점들아. 살을 저밀 때마다 신경들이 심하게 경련한다. 비릿한 근육들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린다. 떨..

좋은 수필 2021.05.06

연필을 소재로 한 시

* 몽당연필 -이해인- ​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 욕심 없으면 바보 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 왔구나 ​ 대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 * 몽당연필의 꿈 ​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이 되어도 좋다 침 발라 쓰다가 쓰다가 쓸 수 없을 때 버려도 좋을 한 자루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이 시커먼 흑연빛이 아니라 5월의 푸른 하늘같이만 될 수 있다면 그 푸른 하늘을 날으는 종달새같이만 될 수 있다면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김경..

좋은 시 2021.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