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81

묵인(黙認) / 정재순

묵인(黙認) / 정재순 자정이 넘었다.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으나 역시 묵묵부답이라 재차 발신버튼을 눌렀다. 전화기 너머 저쪽은 적막강산처럼 고요했다. 곧 도착한다며 서둘러 끊으려는 찰라,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새벽 한 시쯤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술을 마셨다고 하기엔 그다지 취한 기색이 없었다. 평소와 다른 느낌이 확 밀려왔다. 스무 일곱 해를 동거하면서 이런 묘한 기분은 처음이다. 색안경을 끼고 봐서일까,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했다. 술에 취해 들어올 때면 남자의 버릇은 아이들 방부터 찾았다. 곤히 잠든 애들을 껴안고 소란을 피우는 통에 골목이 들썩거렸다. 뿐이 아니다.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잠이 들곤 했다. 그런데 달랐다. 집에 오..

좋은 수필 2021.05.05

무릎에 대하여/이재무

무릎에 대하여 이재무 계단 오르내릴 때마다 투덜거리는 무릎 관절 이 이상 신호는 탄력 잃은 기관들의 이음새가 느슨해지고 녹 슬어간다는 징후이리라 누구는 칼슘 결핍에 운동부족이라 탓하고 혹자는 식습관을 고쳐라 처방하지만 나는 안다 이것의 참다운 기원은 설운 생활에의 마음의 굴절에 있다는 것을 썩지 않는 기억은 유구하다 세상은 내게 없는 살림에 뻣뻣한 무릎이 문제였다고 말한다 내키지 않은 일에 무릎 끓을 때마다 여린 자존의 살갗 뚫고 나오는 굴욕의 탁한 피 하지만 범사가 그러하듯이 처음이 어렵고 힘들 뿐 거듭되는 행위가 이력과 습관을 만들고 수모도 겪다 보면 수치가 아닌 날이 오게 된다 굴욕은 변명을 낳고 변명이 합리를 낳고 마침내는 합리로 분식한 타성의 진리를 일상의 옷으로 껴입고 사는 날이 도래하는 것이..

좋은 시 2021.05.05

곡비(哭婢) / 문정희

곡비(哭婢) / 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는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먹고 살았다. 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먹으며 까무러칠 듯 울어대는 곡(哭) 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좋은 시 2021.05.05

단단한 고요/김선우

단단한 고요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면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곤대며 어루만져 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 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 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마른 잎사귀에 숨어 있던 도토리로 시작해서 단단한 도토리묵이 되기까지..

좋은 시 2021.05.05

새우젓/이방주

새우젓 이방주 금년에는 강경이나 광천에서 성황을 이룬다는 새우젓 축제에 꼭 한 번 가보려고 했다. 그러나 또 가지 못했다. 내가 게으르기도 하지만 다른 해에 비해 꼭 가야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축제구경을 하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새우젓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당분간을 가지 못할 것 같다. 아직도 몇 년을 먹을 만치 새우젓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 식구들은 새우젓을 좋아한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새우젓 없이 진지를 드시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도, 공연히 젓가락을 들고 방향을 잡지 못하실 때가 많다. 노인들은 짜고 매운맛이 있어야 입안에 침이 고이고, 침이 생겨야 목이 부드러워지시는 모양이다. 새우젓은 알이 굵은 것보다는 알이 잔듯하면서도 오동통하고, 배때기가 아주 희고 깨끗..

좋은 수필 2021.05.04

새우눈/한경선

새우눈/한경선 바다는 손을 헹구지 못한 채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면서 손님을 맞았다. 무쇠 솥에 불을 때다가 부지깽이 던져두고 뛰어나와 손을 부여잡고 눈물부터 보이던 언니를 닮았다. 갯벌 가까이 있는 바다는 그랬다. 흙과 바람 속에서 뚜벅뚜벅 걷는 사람처럼 꾸밈이 없고 투박했다. 비릿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밴 물이랑을 일궜다. 바다는 온갖 목숨들을 거두느라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것들을 부추기고 쓰다듬고 다독이느라 분주하다. 인적 드문 산골에 터를 잡고 하루하루를 엮어내는 언니는 때 묻은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그저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다. 누구를 그립다고 한 적도 없고 삶이 외롭다고 툭 내뱉은 적도 없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품고 눈 끔벅거리는 일 소 한 마리 먹이는 것이 사는 일의 전부인 줄 아는 듯..

좋은 수필 2021.05.04

새우젓/조성희

새우젓 조 성 희 구수한 냄새를 내며 가을이 익어간다. 다소곳한 바람이 어디선가 비릿하고 짭짤한 냄새를 풀어 놓고 휙 지나간다. 할머니 땀 같은 비릿한 냄새가 저 만치서 손을 흔든다. 구수한 밥을 지어 놓고 사립문 밖에서 기다리는 할머니를 볼 때처럼 얼굴에 함박꽃 웃음이 피어난다. 상인들의 외쳐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닌다. 앉을 자리를 찾는 고추잠자리 떼처럼 빨갛다. 북적이는 사람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차다. 참빗으로 머리 빗고 뽀얀 흰 고무신 신고 장에 가는 할머니같이 깨끗이 몸단장을 하고 있다. 가지런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생선들이 정갈하다. 옆집 아주머니와 김장철에 쓸 젓갈을 사러 소래포구에 왔다. 젓갈은 어패류의 육, 내장을 식염으로 절여서 부패를 막고 원료를 적당히 분해시켜 특..

좋은 수필 2021.05.04

반쪽 지구본/안은숙

반쪽 지구본/안은숙 거리를 배회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느리게 아주 천천히 걸었다. 저녁 어스름에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갔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어쩌면 참 다행이라 여겨졌다. ​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누군가 내다버린 반쪽의 지구본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우묵하게 파인 반쪽의 지구본, 마치 분화구 같기도 하다. 그 안엔 반나절 동안 내린 빗물이 얌전하게 고여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지구본 속엔 온갖 난파된 배와 격렬한 해전들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듯 고요했다. ​ 내가 알고 있거나 다녀온 나라들은 없었다. 모국을 찾아보려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나머지 반쪽의 지구본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인 빗물은 쏟아버리고 나는 반쪽의 지구본을 품에 안았다. 집으로 가져왔다. 기울여도 기울여..

좋은 수필 2021.05.04

7일 동안/최지안

사진southeast131(southeast131)님 7일 동안 최지안 월요일. 대롱 하나가 목에 꽂혀 있는 것처럼 뻑뻑했다. 몸은 전보다 다른 느낌을 전해왔다. 따뜻한 물을 마시며 버텼다. 설마 감기는 아니겠지. 몸이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예고였다. 화요일. 기온이 뚝 떨어지던 날이었다. 예고를 무시하고 수영을 했다.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이 얼고 칼로 내리치듯 한기가 등으로 꽂혔다. 예감이 적중했다. 저녁부터 몸 여기저기에 전운이 감지되었다. 불길한 예감은 왜 비껴가지 않는 것인지. 수요일. 면역체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백혈구가 전열을 가다듬는 듯 했다. 액체가 기울어지듯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피도 그쪽으로 몰렸다. 기침이 날 때마다 체액이 쏟아질 듯 했다. 그때까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

좋은 수필 2021.05.04

흉터/양수창

흉터 양수창 함양에 있는 상림공원에서 고목이 된 나무들 가운데 큰 흉터를 간직한 나무를 보았다. 커다란 동굴을 연상케 하는, 그 상처가 얼마나 깊었을까. 아픔은 얼마나 극심했을까. 여러 날, 여러 밤, 역사의 한 복판에서 잠 못 이루고 신열하며 들떠 지냈던 기억이 고스란히 흉터로 남아있다. 아픔을 견디고 상처를 쓸어 덮고, 그렇게 스스로 치유한 흉터. 고목 스스로, 더욱 고풍스럽게, 더욱 우아하고 더욱 품위 있게, 자기 존재 가치를 드러낸, 그 아팠던 흔적. 이름 모를 새들은, 그 아팠던 흉터 속에 들어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고 어떤 생애生涯를 살다 떠나갔을까

좋은 시 2021.05.04

바람아래 붉은 강/이영옥

-바람아래 붉은 강/이영옥- 길쯤이 얼어붙은 강위로 아버지의 구식 자전거는 오래된 충복처럼 삐거덕거리며 아버지를 부축해 왔다 오십천 왜가리는 얼음에 발을 심고 한나절을 버텼다 미루나무가 달랑거리는 귀 한 짝을 달고 외롭게 서 있었고 그 모습은 하나같이 바람의 갈기를 붙잡고 떠돌다가 이제 막 황량한 겨울 풍경 앞에 뱉어진 꼴이었다 하교 길에 영덕대교아래에 사는 거지들의 따듯한 저녁을 나는 가끔 훔쳐보았고 청솔가지 태운 연기가 흰 뱀처럼 몸을 비틀며 붉은 강을 건너왔다 한 방향 속에는 얼마나 무수한 방향들이 살고 있었는지 바람이 삶 전체를 뒤로 밀었다가 제자리에 세우면 강바닥에는 어지러운 손금들이 자꾸 태어났다 모두가 하룻밤만 자고나면 떠날 객식구처럼 바람이 뱉어낸 싸락눈처럼 발 없는 귀신처럼 서늘하게 집안..

좋은 시 2021.05.04

밭/황진숙

밭/황진숙 밭에 섰다.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밭들. 다랑이 밭 같다. 산기슭 제법 깊숙이 위치한 밭이지만 어김없이 봄은 여기에도 찾아오고 있다. 굳었던 땅들은 부드러워지면서 숨구멍을 연다. 숨구멍 사이를 스치는 흙 내음이 진하다. 그 내음에 대지의 감각들은 자리를 털며 기지개를 켠다. 밭고랑에서 움튼 풀씨들의 얼굴이 해맑다. 척박했던 땅 속에서 시린 계절을 보내고 수런수런 올라온 그들의 생명력에 감탄한다. 봄바람이 휘감아 전해준 청명함에 묵묵했던 밭도 한결 온화해진다. 밭의 품이 넉넉함으로 푸근하다. 그 모습이 아버지의 품과 같이 따사롭다. 모아 놓은 고춧대 옆으로 희멀건 돌멩이 하나가 보인다. 나직이 소리가 난다. 소리를 따라 밭둑을 걷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저만치 모로 움푹 팬 발자국 하나가 있..

발표작 2021.05.04

마루가 그립다 / 김인선

마루가 그립다 / 김인선 볕 좋은 날 마루를 닦는다. 햇살 한 장이 마당에 선 나무들을 무늬로 그리면, 하릴없이 졸던 강아지가 게으른 눈을 비비는 한낮, 숫제 싱거운 졸음이나 재우려는 듯 처마도 그림자로 내려앉는다. 마루는 완벽하게 그늘 반 햇살 반이다. 느긋한 햇살에 그늘이 포개지니 마루가 꾼 꿈을 나누듯 두서없는 이야기들이 되살아난다. 황토방에 마루를 놓던 몇 해 전부터 눈시울에 매달려 있었을까. 무시로 고즈넉해지면 옛집에 식구들이 옹기종기 둘러앉는 소리부터 들려온다. 우리는 마루에서 밥을 먹고 숙제를 하였으며, 별을 보다 잠이 들었다. 우리들 발품으로 반질반질 윤이 났던 그 마루에서 우리들은 자라났다. 그런 마루가 좋다. 모서리가 날렵한 세련된 마루가 아니라, 세월의 흔적을 뭉툭하게 안은 못생긴 마..

좋은 수필 2021.05.04

연필/김정화

연필/김정화 연필이 부러졌다. 가방에서 성한 연필을 꺼내 공란을 매워 나갔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왔다. 2010년 인구주택 총 조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조사원으로 종사하고 있다. 조사표를 받아들고 대상 가구를 찾아갈 때는, 아직도 처음처럼 마음이 설렌다. 그 사람들의 음지와 양지를 빌려 통계에 필요한 데이터를 만드는 일은 늘 조심스럽다. 삶의 겉모습만 베끼지 않고 속마음을 어떻게 얻어내어 적을 것인지, 그 속사정을 헤아려야 한다. 되도록 소소한 정보들까지 다 적어 와서는 필요로 하는 서식에 맞추어 넣고 나머지 자료들은 흔적도 없이 지워야 한다. 통계가 지니는 속성의 한 단면인 현란한 눈속임에서 벗어나야한다는 명제를 굳이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어떻게 적어야 하는가는 늘 고민하게 한다..

좋은 수필 2021.05.03

연필과 나 / 조이섭

연필과 나 / 조이섭 잘 깎은 연필에서는 사과 냄새가 난다. 전투에 나가는 병사가 총기를 손질하듯, 농부가 벼 베기 전에 낫을 벼리듯 나는 글 쓰기 전에 연필을 깎는다. 나무의 속살이 넉넉하게 보이도록 깎은 다음, 까만 심을 날씬하게 다듬는다. 잘 깎은 연필을 가까이 두면 글이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만의 최면이다. 내 책상에는 몽당연필과 장다리를 합쳐 서른 자루 정도가 연필꽂이에 꽂혀 있다. 바깥나들이는 항상 장다리 몫이고 몽당연필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이 모셔둔다. 외려 짧을수록 더 애틋하다. 깎여 없어진 상처는 자신을 희생하여 나의 어쭙잖은 글로 맞바꾼 흔적이기 때문이다. 몽당연필의 공과 결실이 적지 않으니 귀한 대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는 종이, 붓, 먹, 벼루가 문방사우로 선..

좋은 수필 2021.05.03

옆걸음/이정록

옆걸음/이정록 전깃줄에 새 두 마리 한 마리가 다가가면 다른 한 마리 옆걸음으로 물러선다 서로 밀고 당긴다 먼 산 바라보며 깃이나 추스르는 척 땅바닥 굽어보며 부리나 다듬는 척 삐친 게 아니다 사랑을 나누는 거다 작은 눈망울에 앞산 나무 이파리 가득하고 새털구름 한올 한올 하늘 너머 눈 시려도 작은 몸 가득 콩당콩당 제짝 생각뿐이다 사랑은 옆걸음으로 다가서는 것, 측근이라는 말이 집적집적 치근거리는 몸짓이 이리 아름다울 때 있다 아침 물방울도 새의 발목 따라 쪼르르 몰려다닌다 그중 한 마리가 드디어 야윈 죽지를 낮추자 금강초롱꽃 물방울들 땅바닥을 적신다 팽팽한 활시위 하나가 하늘 높이 한 쌍의 탄두를 쏘아올린다 호박범종 물앵두나무 우듬지에 늙은 호박 하나, 폭설 내내 새들이 다녀간다 툇마루에 앉아 겨우내..

좋은 시 2021.05.03

구두에 대한 예의/이선정

구두에 대한 예의/이선정 삶의 무게를 벗어던진 그들이 오소소 잠든 현관 -꽃길만 걷자 해놓고 흙길만 걷게 해 미안하다 내 낡은 구두 앞에서 묵도하다가 멀리서 힘없이 잠든 말라빠진 구두 한 켤레에 울컥 목이 멘다 -어머니 , 당신은 더 힘드셨군요 삐딱하게 목이 늘어진 구두 한 켤레 깨지 않도록 가지런히 잠자리를 보아 드린다 치킨의 마지막 설법 닭같이 홰를 치고 싶은 날 화가 치밀어 된바람만 풀풀 일으키는 날 열난 가슴 달래려 치킨을 시킨다 내 속의 중심이 반쯤 기울어 무단시 * 어깨가 쳐질 때 닭 뼈다귀라도 채워 자신감 곧추세울까 물렁뼈까지 오독오독 남김없이 씹어 삼킨다 속으로 꾹꾹 눌러 가슴팍에 날아다니던 서슬 퍼런 언어들 양쪽에 날개 달고 기름진 모가지로 꼬끼오 꼬끼오 홰를 치는 밤 빌린 몸으로 도를 ..

좋은 시 2021.05.03

등/황진숙

등/황진숙 소리 한 톨 심을 수 없다. 손짓 발짓 한 번 내두를 수 없는 불모지다. 발화하지 못하는 언어가 쌓이고 살아온 동선이 퇴적된 음지다. 등줄기의 음영이 드리워진 적막한 그곳. 궁굴리지 못한 이력이 박히지만 핏줄과 힘줄처럼 도드라지지 않는다. 휘젓고 내저을 수 있는 손과 발의 자유에 비해 등은 직립의 운명에 포박되어 있다. 기둥 노릇을 하는 척추가 있어 일생을 곧추세운다. 휘어지고 틀어져서라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바로 선다. 떠밀리고 나동그라져도 충격을 흡수하며 소명을 다한다. 떠받들어야 하는 천형으로 몸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목이 지탱하지 못해 넘어오는 머리의 무게는 온전히 등의 몫이다. 기우는 어깨를 지지하는 것도 등이다. 들거나 안을 수 없는 짐은 등이 짊어지고 걸머진다. 해가 이울 때까지..

발표작 2021.05.03

모루/정문숙

모루/정문숙 어머니를 휠체어에 앉히고 초록 양철 문을 연다. 오랫동안 주인을 기다렸던 녹슨 아우성이 일제히 터져 나온다. 아버지 대신 뽀얀 먼지를 둘러쓴 거미줄이 먼저 달려와 어머니의 가슴에 안긴다. 거미줄을 떼어 내려 손을 뻗자 어머니는 그것마저 그리웠던 듯 그만 두라며 내 손을 잡는다. 휠체어를 밀고 안으로 들어선다. 주인은 떠나고 기계마저 들어내 말문이 막혀 버린 정미소는 텅 빈 가슴을 열어젖히고 한바탕 넋두리라도 풀어놓을 기세로 한때 주인이었던 손님을 맞이한다. 정미소의 수문장으로서 기세등등하던 양철 문은 아버지의 헛기침처럼 두어 번 쇳소리를 내다 스스로 닫히고 만다. 찢기고 허물어진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별빛 같은 햇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어머니와 나는 무대 위의 주연배우처럼 서 있다. ..

좋은 수필 2021.05.03

글내와 사람내/박양근

글내와 사람내/박양근 모든 사물은 고유의 냄새를 지니고 있다. 동식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에서도 냄새가 난다. 무엇인가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리면 냄새를 먼저 맡는다. 모두가 체취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므로 인간의 오감 중에서 후각이 가장 예민하다. 냄새 중에는 좋은 것이 있고 나뿐 것이 있다. 흔히 좋은 냄새를 향기라 부른다. 차향, 꽃향이 있고 한지에 쓴 글씨에는 묵향이 배어있으며 천년 땅속에서 제 몸을 삭힌 참나무에서는 침향이 스며난다. 향기야말로 모든 사물이 지니고 싶은 이상적인 기운일 것이다. 옛 선비들도 자신의 글에서 지필묵 향기가 묻어나기를 소망하였다. 그런데 글과 글씨에서는 문향과 묵향이 풍겨난다고 하지만 정작 글을 쓰는 사람에게서는 먹물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옷에 먹물을 잔뜩 묻힌다고 먹물..

좋은 수필 2021.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