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2/08 4

수필가 반숙자 초기작품- 수필집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80편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 반숙자 1. 5월이 오면 해마다 봄이 오면 친정 집 뒤뜰에 붓끝 모양의 푸른 잎이 무더기 무더기 돋는다. 아버지는 생전에 이 꽃을 유난히 사랑하고 상사화(想思花)란 세칭을 피하여 당신만은 모사화(母思花)라 이르셨다. 해토(解土)가 되기 무섭게 지표를 뚫고 용감한 기세로 돋아나는 모사화 잎은 오직 잎만 피우기 위한 듯 무성하게 자란다. 그리고 어느 날 무더위가 시작 될 즈음 초록빛 융성한 잎은 모두 죽어 거름이 되고 거기 죽음 같은 꽃 잎을 물고 연보라 빛이 피어난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 또한 잎을 보지 못해 모사화라 이름 지으신 친정 아버지의 속 깊은 불망(不望)의 회한을 이제사 짐작하는 내게 역시 꽃은 아픔으로 피어나고 있다. 어쩌면 꽃잎은 못다한 불효의 한을 저렇듯 슬..

좋은 수필 2024.02.08

아버지의 집, 송석헌(松石軒) / 조현미

아버지의 집, 송석헌(松石軒) / 조현미 집을 떠나는 것이 세계의 운명이 되어 가고 있다 - 하이데거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기왓장엔 버짐이 피었고 기왓골에선 와송이 자라고 있었다. 보(樑)와 기둥, 서까래와 난간에 세월이 먹물처럼 스며있었다. 대문은 버름했고 마루는 앙상했다. 수척한 지팡이와 고무신 한 켤레가 ‘아직 사람이 기거 중’이라는 듯 늙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미명에 젖은 집의 표정은 무거웠고 주련(柱聯)속 글귀는 낯설었다. 마치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쯤 한 노인이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갓과 잿빛 두루마기, 흰 고무신이 먼 옛날로부터 걸어 나온 차림새였다. 주름 깊은 표정이 그 집을 꼭 닮아있었다. 이윽고 지팡이를 쥔 노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긴한 용무가 있..

좋은 수필 2024.02.08

입원단상(결벽증) / 안병태

입원단상(결벽증) / 안병태 별로 자랑할 만한 감투는 아니지만 이 병실에 오래 머물다보니 환자들이 나를 ‘실장님’이라고 부른다. 오늘 우리 병실에 새 환자가 들어왔다. 그동안 환자가 수없이 갈마들었지만 저런 별종은 처음이다. 입실하자마자 간호사를 호출해 소독솜을 청구하더니 자신의 병상을 닦기 시작한다. 별의별 환자가 다 거쳐 갔을 터이니 별의별 병균이 다 묻어있을 거란다. 나 역시 병실의 청결상태에 막연한 불안감을 갖지 않은 건 아니나 저렇게 구체적으로 의심해보진 않았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내 병상에서도 각종 병균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지네처럼 옷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아 몸이 근질거린다. 병상을 구석구석 닦은 신참이 TV 리모컨, 출입문 손잡이, 링거 거치대, 화장실 손잡이, 특히 변기의 하수용 ..

좋은 수필 2024.02.08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 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기에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속은 서릿몸 신경 줄까지 드러낸 헝큰 마음 언 땅에 비켜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좋은 시 2024.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