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2/11 8

포옹/손 훈 영

포옹/손 훈 영 텅 빈 벽면에 흑백 사진 한 점이 걸려있다. 네 개의 팔로 세상의 위협과 폭력을 차단시키겠다는 듯 굳세게 끌어안고 있는 사진 속 두 남녀를 본다. 맞닿은 심장에서 솟구치는 힘찬 박동소리가 들린다. 그 박동소리에 몸을 실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는 듯 여자의 입가엔 희마한 미소가 서려있다. 이 방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서재라고 그냥 밋밋하게 부르기에는 방의 느낌이 너무 특별하다. 다갈색 벽지가 차분한 벽면을 따라 연한 검정 색깔의 나지막한 책장 두개가 이어져 있다. 그 앞으로 놓여 진 폭이 좁은 긴 책상이 책장과 맞춤인 듯 어우러진다. 책꽂이의 책들은 필를 나눈 혈육들처럼 다정히 포개어져 있다. 스틸 프레임이 심플한 데스크 탑과 하얀 색 복합기. 그것들이 이 방의 전부다. 세평도 채 되지..

좋은 수필 2024.02.11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

좋은 시 2024.02.11

멸치 - 김태정

멸치 - 김태정 ​ ​ 네 뼈로 내 뼈를 세우리 네 살로 내 살을 보태리 네 몸을 이루는 바다로 삶의 부력을 완성하리 은빛 비늘의 눈부심으로 무디어진 내 눈물을 벼리리 어느날 문득 육지를 보아버린 네 그리움으로 메마른 서정을 적시리 ​ 그리하여 어느 궁핍한 저녁 한소끔 들끓어오르는 국냄비 생의 한때 격정이 지나 꽃잎처럼 여려지는 그 살과 뼈는 고즈넉한 비린내로 한 세상 가득하여, ​ 두 손 모아 네 몸엣것 받으리 뼈라고 할 것도 없는 그 뼈와 살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 살과 차마 내지르지 못하여 삼켜버린 비명까지 ​ ​ ​ ​ ​ ​ 올해 여름에도 삼계탕을 먹었다. 이 집 삼계탕은 참 부드럽고 쫄깃하다고, 땀 흘리며 뼈를 발라내며 말했다. 그 닭한테 뭐라고 해야 하나. 한평생 사는 동안 내 이빨이 씹은 ..

좋은 시 2024.02.11

식당 의자 - 문인수

식당 의자 - 문인수 ​ ​ 장맛비 속에, 수성 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 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

좋은 시 2024.02.11

어깨너머라는 말은 - 박지웅

어깨너머라는 말은 - 박지웅 ​ ​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아무 힘 들이지 않고 문질러보는 어깨너머라는 말 누구도 쫓아내지 않고 쫓겨나지 않는 아주 넓은 말 매달리지도 붙들지도 않고 그저 끔벅끔벅 앉아 있다가 훌훌 날아가도 누구 하나 알지 못하는 깃털 같은 말 먼먼 구름의 어깨너머 있는 달마냥 은근한 말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은은한가 봄이 흰 눈썹으로 벚나무 어깨에 앉아 있는 말 유모차를 보드랍게 밀며 한 걸음 한 걸음 저승에 내려놓는 노인 걸음만치 느린 말 앞선 개울물 어깨너머 뒤따라 흐르는 물결의 말 풀들이 바람 따라 서로 어깨너머 춤추듯 편하게 섬기다가 때로 하품처럼 떠나면 그뿐인 말 들이닥칠 일도 매섭게 마주칠 일도 없어 어깨너머라는 말은 그저 다가가 천천히 익히는 말 뒤에서 어슬..

좋은 시 2024.02.11

슬픔이 하는 일 - 이영광

슬픔이 하는 일 - 이영광 ​ ​ 슬픔은 도적처럼 다녀간다 잡을 수가 없다 몸이 끓인 불, 울음이 꽉 눌러 터뜨리려 하면 어디론가 빠져 달아나버린다 뒤늦은 몸이 한참을 젖다 시든다 슬픔은 눈에 비친 것보다는 늘 더 가까이 있지만, 깨질 듯 오래 웃고 난 다음이나 까맣게 저를 잊은 어느 황혼, 방심한 고요의 끝물에도 눈가에 슬쩍 눈물을 묻혀두고는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다 슬픔이 와서 하는 일이란 겨우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 ​ ​ ​ ​ 울음은 몸이 끓인 불이에요. 울음이 내는 소리를 울음이 담긴 몸이 들어요. 몸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몸이 끓인 불을 식히느라 울음은 또 계속 나오지요. ​ 슬픔은 무엇인가요? 안쪽으로부터의 통증. 먼 곳에서부터 스며든 습기. 젖고 난 뒤 시들 때까지 습기를 놓치지..

좋은 시 2024.02.11

오십세 - 전건호

오십세 - 전건호 ​ ​ 금방 들은 것도 오십초면 증발된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왼손이 오른 손을 믿지 못한다 전화를 걸어놓고 상대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일 년 전 감추어둔 쌈짓돈을 아직도 찾지 못하는 비상한 은닉술에 동네참새들은 닭대가리라는 둥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는 둥 쪼아댄다 닭이든 까마귀든 허공을 나는 새 아닌가 나를 둘러싼 시공이 가벼워진다 내게 착지했던 생각들 깃털이 돋아났는지 고개 돌리는 순간 날아가 버린다 잘 잃어버린다는 것은 무겁게 짓누르던 잡념이 휘발되는 것 텅 빈 풍선이 되어 미풍에도 풀풀 눈짓만 줘도 포르르 바람만 불어도 기우뚱 한다 기억의 한계가 0을 향해 달릴수록 무념의 경지에 달하는 듯싶다 붙잡으려 했던 것들은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간다 0을 향해 초읽기 진행되는 동안 금방 뱉..

좋은 시 2024.02.11

​꽃게 먹는 저녁 - 김화순

​ ​ 꽃게 먹는 저녁 - 김화순 ​ ​ 펄떡이는 꽃게 몇 마리 산다 꽃게는 톱밥을 밀어내며 안간힘으로 버틴다 사방으로 날리는 절체절명 유보된 죽음이 시간을 조금씩 자르고 있다 집게발이 허공을 잘라내고 시선을 잘라내고 저녁 6시를 잘라내자 시침과 분침이 기우뚱, 중심을 잃는다 서쪽 하늘이 서서히 피를 흘린다 집게발이 햇살의 마지막 온기를 싹둑, 자른다 잘린 하루치의 바다가 한사코 냄비 속으로 풀어진다 부글부글 비어져 나오는 게거품 집게발의 사투가 차려낸 저녁 식탁은 달그락 달그락 꽃내음 비릿하다 삶은 누군가의 죽음이 가져다준 에너지라며 나는 게눈 감춘 듯 먹어치운 죽음으로 하루를 연장한다 죽음이 나를 새롭게 편집한다 ​ ​ ​ ​ ​ 시인은 “꽃게 몇 마리”를 사다가 그것이 죽어 냄비 속에 들어가 음식이..

좋은 시 2024.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