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2/12 2

질그릇 - 윤석산

​ 질그릇 - 윤석산 ​ 경주박물관 한 귀퉁이, 조명마저 다소 비켜간 자리 못생긴 질그릇 하나 놓여 있다. 본래부터 그 자리가 제 자리인 양 자리를 잡고 앉은 질그릇. 아무것도 보일 것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그저 그렇게 놓여져 있다. ​ 있는 속,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사는 요즘. 아무리 속 다 드러내놔도 들여다보는 이 하나도 없는, 지지리 못난 질그릇 하나 세상 한 귀퉁이,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 尹錫山 시집『나는 지금 운전 중』 ​ 있는 속,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살아야 그나마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속이 깊어 그 속을 다 들여다볼 수 없거나 속이 얕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그 속을 간파당하거나 간에, 어쩔 수 없이 속을 드러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쓰..

좋은 시 2024.02.12

그 골목의 필경사들/안희옥

그 골목의 필경사들 안 희 옥 이 골목엔 오래된 필경사들이 산다. 날마다 골목을 베끼는 것들, 호프집은 호프집을 베끼고, 북경반점은 북경반점을 베끼고, 세탁소는 세탁소를 베낀다. 낡아가면서 따뜻해지는 것들 중에 골목만한 것이 또 있을까. 날마다 반복되는 문장사이를 걸어 오늘도 집으로 돌아온다. 흑백사진 같은 풍경의 양쪽으로 회색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골목입구에는 하루를 마감하려는 듯 포장마차가 불을 밝히고, 찐빵가게와 세탁소, 아동복가게, 미장원 등이 어깨를 맞대며 늙어간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대문 앞에는 우편물이 나뒹굴고 담벼락 아래엔 누군가 버리고 간 슬리퍼 한 짝도 놓여 있다. 월세와 전세 쪽지가 너풀대는 전봇대 뒤로 길고양이가 재빨리 모습을 감춘다. 골목 끝 언덕을 오르면 ..

좋은 수필 2024.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