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2/10 8

몰이꾼과 저격수 - 문혜진

​ 몰이꾼과 저격수 - 문혜진 ​ ​ 돌능금나무 둥치 세 들어 살고 싶다던 남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 고여 있어, 그 목소리는 바다에 내리는 눈, 얼음집 내벽 녹았다 다시 얼어붙은 물방울, 너는 잠시 빛나고, 나는 적막을 품고, 허기의 기록들이 마침내 느슨하게 흐르고, 달빛의 윤곽 너머 안개 낀 밤의 아늑한 사라짐들, 반역들, 불분명한 용서들 ​ 우리는 서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겨냥하는 자와 숨는 자, 서로의 지형도를 숨긴 채, 표적을 향해 달려들지만 대열은 흩어지고, 표적은 간 곳 없고, 게릴라성 호우와 수치심에 대해, 먼 훗날 빙하에 갇힌 채 얼어버린 심장을 뚫고, 내 사랑의 저격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 ​ ​ ​ ​ - 문혜진 시집 《혜성의 냄새》, 2017 ​ ​ ​ ​ ​ 〈몰이꾼과 ..

좋은 시 2024.02.10

가을 말미에서 보내온 편지/이정희

가을 말미에서 보내온 편지/이정희 어름사니는 끝내 이승을 하직했다. 시월도 마지막 날, 바싹 마른 채 죽어 있는 어름사니를 보았다. 머리카락이 빠진 것처럼 엉성한 집에서, 주인도 없는 사체가 간단없이 떨린다. 높새가 거미줄 치는 초겨울, 복색도 현란한 무당거미의 죽음이 아찔하다. 제집에서 죽었는데도 첫서리에 시드는 나뭇잎처럼 꺾였다. 어찌된 사연일까. 눈 질끈 감은 뒤에도 허공에 결박된 채 외줄을 타곤 하더니, 썰렁한 죽음 뒤로 어름사니의 하루가 엇갈린다. 그는 광대다. 특별히 줄을 타는 어름사니다. 혼자서는 움직이질 못하니 바람이 그네를 태운다. 퀭하니 들어간 눈은 허공만 응시하고 철거된 집 하나가 바람을 끌어안는다. 한 줌도 못 되는 주검의, 위험한 노래 한 소절 누가 엮었나? 인생도 어릿광대처럼 한..

좋은 수필 2024.02.10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 신현림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 신현림 ​ ​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어 사랑의 역사를 담고 싶어 해 세상에 사랑 주며 떠난 사람들의 역사를 ​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느는 시대에 우리가 물고기인지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시간에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으려고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시간에 ​ 죽은 지 33년이 지나도 그 아들과 사는 어머니 헤어진 지 3년이 지나도 그 애인과 사는 사내 죽은 남편 따라 무덤의 제비꽃으로 핀 아내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에 다 담지 못해 죽어서도 그의 은어 떼를 품고 싶어 해 ​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고 싶어 정든 추억을 품고 싶어 흔들리고 싶어 천천히 모빌처럼 ​ ​ ​ ​ ​ 『문학사상』2013년 11월호 ​ ​ ​ ​ ​ 기억..

좋은 시 2024.02.10

​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 최서림

​ 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 최서림 ​ ​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무덤에서 불려나와 대신 싸운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의 말을 찾아내어 싸운다 삶은 죽어 썩어져도 말은 죽지도 썩지도 못한다 죽은 자의 말이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 ​ 왕권이냐 민본이냐 이방원과 정도전이 아직도 TV에서 싸우고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냐, 제3의 길이냐 이승만과 조봉암이 지금까지 역사책 속에서 싸우고 있다 개발독재냐, 민주주의냐 박정희와 장준하가 프레스센터에서 살기 등등 핏대를 올리고 있다 ​ 세상은 말들의 싸움터 이긴 말이 패배한 말의 배를 밟고서 히히덕거린다 ​ 까맣게들 잊고 있다가 선거철만 되면, 좌우 할 것 없이 죄다 상주라도 되는 양 검은 옷들을 걸쳐 입고서 효창동 외진 김구 묘소를 찾는다 어치도 동박새도 민망한지 쓸..

좋은 시 2024.02.10

토막말 - 정양

토막말 - 정양 ​ ​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 정순아보고자퍼죽껏다씨펄. ​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 ​ ​ 시집『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창작과 비평사,1997) ​ ​ ​ ​ 시를 참하게 보일 요량으로 부러 시어를 치장할 필요는 없다. 고운 말로 써야..

좋은 시 2024.02.10

독수리 시간 - 김이듬

독수리 시간 - 김이듬 ​ ​ 독수리는 일평생의 중반쯤 도달하면 최고의 맹수가 된다 눈 감고도 쏜살같이 먹이를 낚아챈다 그런 때가 오면 독수리는 반평생 종횡무진 누비던 하늘에서 스스로 떨어져 외진 벼랑이나 깊은 동굴로 사라진다 거기서 제 부리로 자신을 쪼아댄다 무시무시하게 자라버린 암갈색 날개 깃털을 뽑고 뭉툭하게 두꺼워진 발톱을 하나씩하나씩 모조리 뽑아낸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며칠 동안 피를 흘린다 숙달된 비행을 포기한 채 피투성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 이제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아니 캐스팅도 안 되고 오디션 보기도 어중간한 중년여자 연극배우가 술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얘기다 너무 취해서 헛소리를 했거나 내가 잘못 옮겼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냥 믿고 싶어서 경사가 ..

좋은 시 2024.02.10

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 임동윤

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 임동윤 ​ ​ 감자꽃이 시들면서 정수리마다 자글자글 땡볕이 쏟아졌다 장독대가 봉숭아꽃으로 알록달록 손톱물이 들고 마른 꼬투리가 제 몸을 열어 탁 타닥 뒷마당을 흔들 때, 옥수수는 길게 늘어뜨린 턱수염을 하얗게 말리면서 잠자리들은 여름의 끝에서 목말을 탔다 싸리나무 울타리가 조금씩 여위면서 해바라기들이 서쪽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철 이른 고구마가 그늘 쪽으로 키를 늘이면서 작고 여린 몸도 하루가 다르게 튼실해졌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옥수수 줄기처럼 빠르게 말라가던 어머니는 밤마다 옥수수 키만큼의 높이에 가장 외로운 별들을 하나씩 매달기 시작했다 그런 날 나는 하모니카가 불고 싶어졌다 문득, 아버지가 켜든 불빛이 그리워졌다 그 여름이 저물도록 어머니는 가마솥 가득 모락..

좋은 시 2024.02.10

껌 - 김기택

껌 - 김기택 ​ ​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것 뭉개..

좋은 시 2024.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