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2/02 3

군불을 지피며/정원정

군불을 지피며 정 원 정 나뭇광으로 쓰이는 지하실에는 아궁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입구(口)자 모양의 쇠틀을 벽에 붙인 함실아궁이다. 마치 거대한 아귀 한 마리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형국이다. 내 키와 엇비슷한 높이에 있는 그 아궁이는 네모난 쇠판때기로 막지 않는 한, 일 년 열두 달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큰 물고기가 아가리를 마음껏 벌리고 먹을 것을 기다리는 모양 같았다. 생뚱맞긴 하지만, 방고래 속을 엄청 큰 물고기의 뱃속으로 상상을 하면 재밌다. 물고기의 먹을거리로 아궁이에 땔감을 지피는 나의 임무는 날마다 지속되었다. 쇠판때기 문을 열고 긴 굴속 같은 어웅한 아궁 안을 들여다보면 바닥에는 어제 먹다 남은 나뭇재만 소도록이 쌓여 있다. 부지깽이로 재를 뒤적거려 보면 꼬마별 같은 불씨들이 요리..

좋은 수필 2024.02.02

갈목비 / 전영임

갈목비 / 전영임 어두운 터널의 수렁과도 같았던 시간들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셨다. 여우비가 내리던 날 금빛 모래 쓸리어 내리는 강을 건너, 진달래가 흐드러진 산길을 지나, 너울너울 꽃상여를 타고 먼 길을 떠나셨다. 살아온 인생길 가장 화려하고 호강스런 순간이었다. 동구길에서 아버지를 보내고 일곱 계단을 올라 두 평 남짓 당신의 체취가 배인 사랑방을 찾았다. 문을 열자 움츠려있던 방의 기운이 보무라지처럼 풀썩 일어나 소스락거렸다. 당신의 향기였다. 아버지는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가녀린 몸으로 농사일을 하셨다. 너울가지가 없어 아무 말 없이 혼자 사는 할머니들의 밭갈이며 힘든 일을 도와주시던 듬쑥한 분이었다. 풀에 할퀴고 밭일에 무디어진 손으로 농사일이 끝나면 쉬지 않고 갈목비를 엮으셨다..

좋은 수필 2024.02.02

경계 / 전미경

경계 / 전미경 봉분에 달라붙은 잔디가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 매서운 한파 속에 잔디를 입힌 탓에 둥지를 틀지 못할까 봐 가슴 졸였는데, 온전히 뿌리내려 자리 잡은 걸 보니 내심 마음이 놓인다. 군데군데 잡풀이 눈에 띈다.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뽑히는 걸 보니 잡풀은 제집이 아님을 아는 모양이다. 상석에 술과 포를 올리고 절을 한다. 당장이라도 헛헛한 웃음 지으며 걸어 나오실 것 같은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우리 딸 왔나.' 하며 반긴다. 마른 풀이 바람에 들썩인다. 힘겹게 받치고 있던 삶의 무게를 떨어뜨리기 위해 헤아린 흔적을 바람도 아는 눈치다. 자신의 시든 삶을 정리하다 살아온 결대로 남고 싶은 풀의 절규인지도 모른다. 봉분을 사이에 두고 현세와 내세의 길이 너무 멀다. 몇 걸음도 되지 않는 거..

좋은 수필 2024.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