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2/09 5

김행숙의「서랍의 형식」감상 / 김기택

김행숙의「서랍의 형식」감상 / 김기택 서랍의 형식 김행숙(1970~ )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까지 열었다 서랍 속의 서랍 속의 서랍 속까지 닫았다 똑같지 않았다 다시 차례차례 열었다 다시 차례차례 닫았다 세계의 구석구석을 끌어모은 검은 아침이 서서히 밝아왔다 누군가, 누군가 또 사라지는 속도로 ......................................................................................................................................................................................... 잘 사용하지 않는 서랍이 있다. 그 안의 물건들은 언제 무엇을 넣었는지 ..

좋은 시 2024.02.09

구두의 내부 - 동행 / 박성민

구두의 내부 - 동행 / 박성민 ​ ​ 절름발이 여자가 벙어리 사내에게 눈빛으로 손가락으로 말들을 꿰매고 있다 아파트 모서리에 놓인 초원 구두 수선집 ​ 사내는 구두를 받자 닳은 뒷굽을 떼어낸다 초원 끝에서 들려오는 말갈족의 말굽소리 사내는 구름 속에 들어가 지평선을 깁고 있다 ​ 벙어리의 저린 가슴을 헤집고 나온 말의 뿌리 한 번도 사랑한단 말, 못 해주고 살아온 사내의 착한 눈망울은 디딜 곳 없는 허공이다 ​ 못처럼 박혀드는 널 남겨두곤 죽을 수 없다 마른 입술 축이는 사내의 눈이 들어가는 구두의 닳아진 내부는 저녁처럼 어두워진다 ​ 한 평 반의 수선점은 낡고도 비좁은데 어둠이 막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하늘에 사내는 성긴 별들을 총총히 박아 놓는다 ​ ​ ​ ​ ​ ​ 시집 『쌍봉낙타의 꿈』(고요아침,..

좋은 시 2024.02.09

빗방울은 구두를 신었을까 - 송진권

빗방울은 구두를 신었을까 - 송진권 ​ ​ 아직 발굽도 여물지 않은 어린것들이 소란스레 함석지붕에서 놀다가 마당까지 내려와 잘박잘박 논다 징도 박을 수 없는 무른 발들이 물거품을 만들었다가 톡톡 터트리다 히히히힝 웃다가 아주까리 이파리에 매달려 또록또록 눈알을 굴리며 논다 마당 그득 동그라미 그리며 논다 놀다가 빼꼼히 지붕을 타고 내려가 방바닥에 받쳐둔 양동이 속으로도 들어가 논다 비스듬히 기운 집 안 신발도 신지 않은 무른 발들이 찰방찰방 뛰며 논다 기우뚱 집 한채 파문에 일렁일렁 논다 ​ ​ ​ *힐데가르트 볼게무트(Hildegard Wohlgemuth)의 동화 제목

좋은 시 2024.02.09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 ​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벼야 하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밖이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여진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늘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의 얼음 위에..

좋은 시 2024.02.09

맨발/문태준

맨발- 문태준 ​ ​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

좋은 시 2024.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