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5/26 3

문명 / 박일만

문명 / 박일만  아파트 창문 너머 하늘이 사라졌다공간을 채우며 빌딩이 점령했다콘크리트로 덮이고 구름은 더 높은 곳을 찾아 떠났다언뜻 보이던 햇빛도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저 높은 건물 속에서사람들은 공중 부양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틈새에 끼인 키 낮은 초등학교가 숨을 헐떡인다아이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콩나물처럼 자라 이 나라의 일꾼으로 나아갈 것이므로 어른들은 서슴없이 광장을 메꿨다메꿔진 하늘새 한 마리 날지 못하고 매미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마천루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지은 날개를 차려 입고가끔은 새처럼, 가끔은 매미처럼엘리베이터에 붙어 소리 지를 것이다인간의 세상은 사라지고 콘크리트 몸집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나타난 일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치부되었을 뿐오고갈 길이 막힌 바람이벽에 부딪치며 세찬 소리로 ..

좋은 시 2024.05.26

바겐세일 / 박일만

바겐세일 / 박일만  서둘러 챙겨 입고 첫차에 오른다모닥불이 혓바닥을 날름대는 곳추레한 행색으로 빙 둘러 도열한다그 거리의 모퉁이드럼통을 달군 불이 얼굴을 익힌다큰 과일, 작은 과일, 건장한 과일풋과일, 익은 과일, 삭아가는 과일저마다 모양새를 조건삼아 진열된다최선을 다해 단내를 풍겨야 선택되는 생들봉고차가 다가와 손가락 호명하는 잠깐 사이동으로, 서으로, 남으로, 북으로일당 몇 만원! 중식제공! 줄 맞춰 저렴하게 몸 팔러 간다그들이 사라진 후 덩그러니 남은 잔챙이들서리 맞은 낙과처럼 추락을 맛본다그마저도 허기가 진다북새통이 지나가고 바람만 휘도는 거리 모퉁이선택받지 못한 생들은 또다시 쪽방으로 처박힐 것이다뒤늦게 도착한 생들 저희끼리 모여온기 사그라드는 드럼통을 껴안고두 손을 함께 구워 먹는다

좋은 시 2024.05.26

고자바리 / 최원현

고자바리 / 최원현   할머니는 늘 왼손을 허리 뒤춤에 댄 체 오른손만 저으며 걷곤 하셨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앉았다 일어나려면 ‘아고고고’ 하시며 허리가 아픈 증상을 아주 많이 호소하셨고 길을 가다가도 한참씩 걸음을 멈추곤 허리를 펴며 받치고 있던 왼손으로 허리를 툭툭 치다가 다시 가곤 하셨다. 그런 할머니의 허리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더 구부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걸 바라보는 어린 내 마음은 더욱 편치 않았다.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으로 늙음이 나타났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허리가 굽어지는 걸로 나타났다. 기역자처럼 거의 직각으로 굽어진 허리를 똑바로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서글퍼지고 안타깝고 민망했다.오랜만에 뒷산엘 올랐다. 그새 나무계단이 하나 더 생겼고 오르는..

좋은 수필 2024.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