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분류 전체보기 1881

미역돌 / 박은주

미역돌 / 박은주 동풍에 훈기가 실려오면 어머니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겨우내 바닷물을 먹고 자란 돌미역을 거두어들일 때가 된 것이다. 일기예보를 챙겨보고도 미덥지가 않아 마당에 나가 하늘을 보며 바람을 살핀다. 미역을 따는 날은 물론이고 바싹 마를 때까지 며칠간 햇살과 바람이 뽀송뽀송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녘에 전화를 주신 것으로 보아 이번에도 날을 잡은 모양이었다. 언니와 나는 차를 타고 친정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먼저 온 오빠와 올케는 벌써 부지런히 손을 보태고 있었다. 방금 따온 미역을 말리고 있는 어머니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 할 일을 일러주었다. 미역을 뒤적일 때마다 미끌미끌한 바다 냄새가 포말처럼 코끝에서 부서졌다. 어머니에게 미역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었다. 목숨과도 같은 재산이었다. ..

좋은 수필 2024.04.05

횃대보/정재순

횃대보 정재순 장롱 깊숙이 화선지에 싸여 있는 천은 횃대보가 분명했다. 열아홉 새색시의 혼수품이었던 한 폭 크기의 횃대보에는 부귀와 장수를 기원한다는 꽃과 나비가 수 놓여 있다. 양 끝자락의 ‘복(福)’ 字 는 글자이기 보다는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며 집안에 복이 들어오는 길을 트고 싶었던 엄마의 기도였을 것이다. 당신의 유난했던 손길이 그대로 묻어있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창문 가리개로 쓰면 제법 근사할 성 싶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벽에 못을 박아 긴 막대를 걸쳐서 옷을 걸었다. 횃대보는 벽에 걸어둔 옷에 먼지가 앉는 것을 막아 주는 커다란 천으로, 걸어둔 옷이 보이지 않게 미관상 가리개 역할도 했던 보자기 농이었다. 안방 벽장엔 언제나 부모님의 옷이 걸려 있었고, 그 옆 한쪽 면에 길게 놓인 횃대..

좋은 수필 2024.04.05

탁설, 공空을 깨우다 / 윤미영

탁설, 공空을 깨우다 / 윤미영 바람을 기다린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발밑을 살핀다. 제자리에서 돌아서지도 벗어나지도 않는다. 하안거 동안거가 끝나고 수행 스님이 돌아와도 하늘 언저리에 고요히 빗금만 긋는다. 바람이 오면 바람이 치는 대로 소릿결을 만든다. 능선을 넘어온 산바람은 길을 내지 않는다. 모양도 빛깔도 없다. 사물에 부딪혔을 때 길을 보여주고 소리를 듣게 한다.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을 맞이하여 응답한다. 산빛을 담아 청아한 음색을 울린다 하여 풍령風鈴, 풍탁風鐸이라 불리는 풍경이, 서기瑞氣 감도는 하늘에 얹혀 묵언 수행 중인 사찰을 깨운다. 풍경 안에는 물고기 모양의 단단한 금속이 달려 있다. '탁설鐸舌'이다. '목탁의 혀'라는 두 글자가 '탁'치는 듯, 얇은 혀가 경종을 울리는..

좋은 수필 2024.04.05

그믐 등/백정혜

그믐 등 백정혜 길가 허물어진 기와집에 안노인 둘이서만 살고 있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는 자그마한 몸매와 꼬장꼬장한 자태에 못지않게 칼칼한 성품이시다. 평생 남의 손을 빌려 단장해 본 적이 없다는 머리는 언제나 참빗으로 빗은 듯 쪽을 찌고 있다. 삼단 같았다던 머리숱도 이제는 머리 밑이 훤히 드러나고 밤알만한 머리말이의 비녀가 무거워 보인다. 깨끗한 살결과 단아한 이목구비로 미루어 젊었을 때는 엔간한 미색을 지녔을 것 같았다. 거기에 비하면 열 살이나 밑인 다른 노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비교가 된다. 펑퍼짐한 체구에 걸맞게 성질 또한 느리고 눅다. 깨끔하고 강단 있어 보이는 할머니와는 달리 만사가 태평이다. 처음에 그들을 보았을 때 어떤 관계로 인연을 맺고 사는지 짐작이 쉽지 않았다. 둘은 어느 때 어디서..

좋은 수필 2024.04.05

어물전에서/손광성

어물전에서 손광성 일요일 같은 날은 고궁을 산책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 정장을 하고 연주회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젊고 멋진 여자랑 함께라면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젊었을 때 우리는 폭풍우 속을 우산도 없이 걸었다. 이유 없는 반항과 까닭 없는 울분과 그리고 폭음과 폭언과… 젊은 혈기마저 식어 버린 지금, 필요한 것은 따뜻한 온기와 약간의 생동감이라고나 할까. 나는 외롭고 쓸쓸할 때면 아내를 따라 장보러 가기를 좋아한다. 시장의 물건들은 임자가 따로 없다. 먼저 선택한 사람이 임자요, 사가는 사람이 임자. 게다가 모든 것이 생동감으로 넘친다. 장사꾼들이 외쳐대는 떠들썩하는 소음과 북적거리는 인파의 혼란 속에서 나는 가벼운 흥분마저 느낀다. 그런 감정은 어물전 앞에서 절정에 이른다. 생선은 도마..

좋은 수필 2024.04.05

둥지/김만년

둥지 김만년 까치가 떠났다. 빈 둥지만 덩그러니 놓아두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둥지는 까치 부부가 합심해서 지은 저희들만의 성소였다. 해토 무렵부터 나뭇가지를 총총 뛰어다니며 분분한 수다로 집 지을 궁리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우듬지 부근에 견고한 공중 건축물을 축조한 것이다. 까치 부부에게는 오랜 공력을 들여 마련한 신접살림 집인 셈이다. 모진 비바람을 다독이며 털북숭이 새끼들을 키워 온 둥지다. 사람의 심사로 보면 애착이 갈 법도 하건만 까치 부부는 오늘 아침 미련 없이 새끼들을 앞세우고 이소離巢를 감행한 것이다. 한철을 머리맡에서 지저귀던 까치들이 떠나자 문득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밀려왔다. ​ 이사할 목록들을 정리하며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본다. 몇 올의 햇살들만 들락거릴 뿐 사방이 적막하..

좋은 수필 2024.04.05

닻/박말애

닻 박말애 바닷가를 거닐었다. 발걸음이 멈추는 어느 지점에서 우람한 물체가 시선을 압도했다. 전체적인 몸체는 두껍고 무겁게 느껴졌다. 둥글게 자리잡은 밑부분에서 감싸듯 솟아오른 두 개의 갈퀴가 강한 힘만이 이 물체의 전유물인 듯 팔척의 장수처럼 근력이 불끈 솟는다. 돌출된 이미지를 발산하는 이 남성미의 조형물은 닻이다. 크고 육중한 자태는 오랜 시간동안 해풍을 맞으며 자리를 지켜온 듯 세월의 겉옷은 녹이 슬고 거칠어 풍상의 세파를 견뎌온 흔적이 곳곳에 배여 있었다. 우악스럽게 펼쳐진 양쪽의 갈퀴는 금방이라도 하늘을 움켜잡을 듯이 왕고집적인 자태에서 은연 중 야릇한 남성미가 풍기기도 했다. 세상사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의 고리는 비단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미생물이지만 사람과 필연의 관계로 ..

좋은 수필 2024.04.05

분꽃/이혜연

분꽃 이혜연 가슴에 묻어둔 그리움들이 있다. 질화로 속에 담긴 불씨처럼 그렇게 가슴 깊숙한 곳에 들어 앉아 자칫 냉랭해지려는 내 삶에 훈훈한 온기를 불어 넣어주곤 하는, 내 인생의 동반자이다. 때론 선명한 윤곽을 지닌 실체로, 때로는 안개처럼 모호한 모습으로 불현듯 그리움은 다가온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그리움의 대상들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새로 밝는 날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져 가기 때문일까.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귀소본능처럼 자꾸만 까마득히 세월을 거슬러 오르려고만 한다. 화사한 봄보다는 까칠해진 가을에, 빛을 여는 아침보다 빛을 거두어들이는 어스름 저녁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다. 그 어스름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와도 같은 그리움을 주는 꽃이 있다. 목을 뽑아 올린 긴 기다림 ..

좋은 수필 2024.04.05

똥바가지 쌀바가지 / 강천

똥바가지 쌀바가지 / 강천 "흥보가 지붕으로 올라가서 박을 톡톡 튕겨 본 즉, 팔구월 찬 이슬에 박이 꽉꽉 여물었구나. 박을 따다 놓고 흥보 내외 자식들 데리고 톱을 걸고 박을 타는듸. 시르렁 실근, 톱질이로구나, 에이 여루 당그어 주소. 이 박을 타거들랑 아무것도 나오지를 말고 밥 한 통만 나오너라. 평생을 밥이 포한이로구나." 흥부가 중에서 박 타는 대목이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초가집의 지붕에는 해마다 박 덩굴이 무성했다. 어둠이 찾아오고 고요한 달빛이 내리는 날, 희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박꽃은 내 어린 눈에도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찬바람에 이파리가 시름시름 기운을 잃어갈 때쯤이면 똬리를 베개 삼아 편안하게 배를 내민 박 덩이가 탐스럽게 영글어 간다. 썩은 이엉이 주저 않을까 무서운 초가지..

좋은 수필 2024.04.04

내등의 짐/정호승

내등의 짐 정호승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겁니다 내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보니 내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였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등의 짐은 나에게 귀한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였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있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

좋은 시 2024.04.03

어느 물고기의 독백/김영수

어느 물고기의 독백 (김영수) 나는 물고기였다. 어부의 그물에 걸려 횟집으로 팔려와 도마에 눕는 순간 나의 이름은 물고기에서 생선회로 바뀌었다. 머리부터 잘린 후 몸에 칼이 들어오는 게 물고기가 횟감으로 되는 평범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나는 두꺼운 나무 도마에 몸을 눕히자마자 눈동자 한번 돌릴 겨를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 내 몸의 껍질은 이미 벗겨져 있었고, 하얗게 드러난 알몸이 횟감으로 저며지고 있었다. 더는 생명이 없는 하얀 살덩이가 된 내 몸을 바라보았다. 한때 나는 저 살과 뼈로 대양을 가르며 부러움 없이 헤엄쳤지. 때로 수면 위 공중으로 뛰어올라 세상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심연의 바닥에 닿을 만큼 깊이 은신하기도 했다. 터질 듯 부레를 부풀려 보란 듯이 우쭐거린 적도 있..

좋은 수필 2024.04.03

소금/이건청

소금 이건청 폭양 아래서 마르고 말라, 딱딱한 소금이 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쓰고 짠 것이 되어 마대 자루에 담기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한 손 고등어 뱃속에 염장질려 저물녘 노을 비낀 산굽이를 따라가고 싶던 때도 있었다. 형형한 두 개 눈동자로 남아 상한 날들 위에 뿌려지고 싶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딱딱한 결정을 버리고 싶다. 해안가 함초 숲을 지나, 유인도 무인도를 모두 버리고, 수평선이 되어 걸리고 싶다. 이 마대 자루를 버리고,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다. ― 이건청, 「소금」전문

좋은 시 2024.04.03

바다 /손광성

바다 /손광성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바다는 굳지도 않으며 풍화되지도 않는다. 전주를 세우지 않으며 철로가 지나가게 하지 않으며, 나무뿌리를 내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품안에 조개를 품고 식인상어를 키우더라도 채송화 한 송이도 그 위에서는 피어나지 못한다. 칼로 허리를 찔러도 금세 아물고 군함이 지나가도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다는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는 법이 없다. 사람들이 국경선을 긋지만 지도 위에서일 뿐이다. 무적함대를 삼키고도 트림조차 하지 않는다. 어떤 지배도 인정할 수 없는 바다는 무엇에 대한 자신의 군림君臨도 원치 않는다. 그는 항상 낮은 곳에서 머물며 모든 것은 평등의 수평선 위에서 출발하기를 바란다. 바다는 기록을 비웃으며 역사를 삼킨다. 땅은 영웅들의 기념비로 더럽혀졌지만 ..

좋은 수필 2024.04.03

봄꿈/정희승

봄꿈/정희승 가까운 곳에 볼일이 있으면 으레 자전거를 타고 간다. 차로 가면 오히려 번거로운 게 많아서다.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2km쯤 떨어진 수산물 센터에서 도미 두 마리와 회 한 접시를 사왔다. 자전거를 타다보면 이상하게도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열광이 가라앉는다. 자전거는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다. 게다가 조용하고 겸손하다. 그러므로 빨리 가고자 서두르거나 조급하게 굴 필요가 없다. 꾸준함과 성실함만 있으면 된다. 회와 도미를 짐받이에 싣고 오면서, 거리 풍경에 너무 앞서가지 않도록 되도록 천천히 바퀴살을 돌렸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벚꽃이 난분분 휘날렸다. 중앙 대로를 따라 아름드리 벚나무가 줄느런하게 서 있는데, 부녀회에서 주관하는 벚꽃축제가 끝나면 으레 이렇게 대책..

좋은 수필 2024.04.03

빈 자리가 가렵다/이재무

빈 자리가 가렵다 이재무 새해 벽두 누군가가 전하는 한 선배 암선고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 챙기다 돌아왔지만 타인의 큰 슬픔이 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고 남아 있는시간 혜량하게 할 것이지만 몸에 밴 버릇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십년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

좋은 시 2024.04.03

바깥양반/김영득

바깥양반 김 영 득 “회사 다녀올게요.” 남편이 마스크를 쓰고 현관에 서서 시어머니께 인사를 했다. 소파에 앉아 계시던 시어머니께서는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네, 잘 다녀오세요.” 라고 공손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셨다. 그 장면이 너무 우스워서 내가 깔깔 웃자 남편도 히죽 웃는다. 시어머니도 큰소리로 따라 웃으셨다. 강아지는 영문도 모르고 신이 나서 남편에게 뛰어 올랐다. 시어머니 때문에 하루가 또 재밌게 시작되었다.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시어머니께서 주간보호센터에 가셔야할 시간이 되었다. “어머님, 학교가실 준비 하세요.” 재촉하고 나서 입고 가실 옷으로 옅은 분홍색 스웨터를 골라드렸다. 어린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느낌이었다. 화장을 하고 방을 나오시는 시어머니께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옷매무새나 화..

좋은 수필 2024.03.31

장독대가 있던 집/권대웅

장독대가 있던 집 권대웅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 시를 지나 저녁 여섯 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지붕은, 굴뚝은, 다락방에 모여 쑥덕거리던 별들과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은 흘러 어느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을까 뒷짐 지고 할머니가 걸어간 달 속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달빛에 그리움들이 발효되어 내려올 때마다 장맛 모두 퍼가고 남은 빈 장독처럼 웅웅 내 ..

좋은 시 2024.03.31

그 여자, 실명 윤예선/이난호

그 여자, 실명 윤예선 이난호 엊그제도 그를 만나고 왔다. ​그 여자 윤예선은 마흔여덟 살 농촌 아낙이다. 그에게는 진종일 치마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치매증인 시어머니와 술이 좀 과한 남편과 입대한 아들과 여고 삼 년생 딸이 있다. 그 외에 거두어야 할 이십 여 마리의 각종 가축과 이천 평 남짓한 전답이 있고, 자그마한 밤 동산도 있다. 그 여자 윤예선은 내 손아래 동서다. ​치매로 빠져든 지 삼 년, 이제 구사할 수 있는 단어라고는 ‘엄마 밥 줘, 엄마 맛있다, 엄마 어디 가지 마’ 등 고작 대여섯 개 안팎인 여든다섯 된 시어머니는 가끔 찾아뵙는 맏아들, 맏며느리를 잊은 지 오래다. 얼마 전 까지는 그래도 우리 내외가 손을 내밀며 “엄니, 저 왔어요” 하면 “우쩐 일여?” 하고 잠깐이나마 양 손을 그러잡..

좋은 수필 2024.03.31

가랑잎처럼/허세욱

가랑잎처럼 허세욱 모처럼 여가가 생겼다. 툇마루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죽물 상자 속에는 내 잡동사니가 수용되어 있다. 그 체적이 해마다 불어나건만 버릴 수도 고를 수도 없어 이날 저 날 미루어 오던 터였다. 그 속에는 해마다 세밑이면 날아오는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 거기다 국내외서 이따금 육필로 찾아오는 편지들이 쌓여 있다. 그것들을 한 장이라도 버릴 수 없어서였다. 임시로 그것들을 꾸리어 묶고 꾸러미마다 연도를 표시하는 쪽지를 달았다. 그 상자를 열고 뭉치들을 풀어 놓았다. 한 해의 분량이 자그마치 한 광주리였다. 나는 그것들을 한 장 한 장 다시 펼쳤다. 까맣게 잊었던 사람이 내 귓전으로 다가와서 멍울진 소릴 한다. 나는 실어증에 걸린 양 멍청했다. 그리고 아물거리는 눈까풀이 축축했다. 묵은 ..

좋은 수필 2024.03.31

이 집을 어찌해야 하나/홍혜랑

이 집을 어찌해야 하나/홍혜랑 결혼식을 마치고 폐백 드리러 시댁을 들어설 때, 새색시의 눈에 들어온 첫 인상印像은 한옥의 전통 기와지붕이었다. 60여 년 전 대관령 기슭 송림 사이로 보이던 전경前景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했다. 노인이 된 새색시의 가슴에 아직도 선연한 그 기와지붕이 요즘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시댁의 택호는 과수원집이었다. 남편이 태어나던 해 시부는 농지를 갈아엎고 과수를 심었다. 쌀농사로는 아들을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 공부시킬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30년 후 외아들은 가정을 이룬 후 다음 해 홀로 유럽으로 떠났고, 며느리는 백일이 채 안 된 갓난쟁이를 품에 안고 시댁으로 향했다. 12시간 걸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 걸리는 기차 여행이었다. 지금은 KTX로 2시간도 안 걸리는..

좋은 수필 2024.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