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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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고/윤기정

클라고/윤기정 ‘클라고’는 ‘크려고’의 외할머니 식 발음이다. ‘클라고 그런다’는 말은 아플 때나 어머니에게 꾸중 들을 때면 어김없이 듣던 말이다. 나나 동생들이 아플 때면 이마를 짚고 하던 말씀인데 이상하게 힘이 되었다. ‘큰다’는 말이 까닭 없이 좋았다. 잘게 찢은 장조림 고기를 쌀죽에 얹어주는 호강을 누릴 때면 자꾸 크고 싶었다. ‘클라고’는 꾸중을 들을 때면 어김없이 등장했다. “어머니는 가만 좀 계셔요. 애들 버릇 나빠져요.” 할 때쯤이면 무릎을 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한번은 동생 하나가 까치발로 베개를 딛고 서서 아버지 양복 웃옷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다 들켰다. 어머니에게 혼나고 있을 때 할머니의 ’클라고‘가 들렸다. 잠시 후 어머니의 웃음보가 터졌다. 나도 키득거..

좋은 수필 2024.03.31

바람의 말씀/윤경화

바람의 말씀 윤경화 ​ ​ 곡풍이 장딴지에 힘을 주며 박차고 올라올 때면 나는 긴장한다. 산기슭에 있는 제비집 같은 내 거처가 난장판이 되기 때문이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계절을 가리지 않고 물물이 한 번씩 지나가는 바람 중에 유독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녀석의 횡포가 심하다. 어쩌다 잊어버리고 장독 위에 돌을 얹지 않은 날이면 뚜껑은 비행접시가 되어 날고 만다. 거기에다 미처 구름이 재를 넘지 못할 때는 비까지 쏟아진다. 초가을에 마른 바람이 간간이 불고 볕이 좋은 때 장독 속을 말리려다 기습을 당하면 장을 마저 먹을 때까지 마음이 불편하다. 산기슭에 있는 내 거처에는 바람이란 바람은 죄다 지나간다. 산꼭대기에서 바람이 내리칠 때는 채전이나 뜰은 가랑잎의 정거장이 된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낙엽들은 ..

좋은 수필 2024.03.31

그리움의 총량/허향숙

명랑 ​ 그녀는 산간 마을에 부는 바람 같다 ​ 그녀 목소리에 손을 대면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 그녀 목소리의 여울에 모여드는 명랑이라는 치어들 ​ ​ ​ ​ ​ 외출 ​ 먼지처럼 쌓이는 말들을 털어 내고 싶었다 ​ 시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시루 속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말들을 거미줄 치듯 집 안 곳곳에 걸어 두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이빨과 이빨 사이 틈을 야물게 단도리하곤 하였다 ​ 이말산 산자락 근방 카페 창가에 앉아 나만을 위하여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다 ​ 해종일 하늘을 보다가 빽빽이 들어찬 허공의 고요를 보다가 인체 혈관 3D 사진 같은 한 그루 나무를 보다가 우듬지로 올라간 빈 둥지를 보다가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을 들여다보다가 ​ 카페에 여자를 벗어놓고 집..

좋은 시 2024.03.31

국물/신달자

국물/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 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 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

좋은 수필 2024.03.31

아버지의 연못/이현숙

아버지의 연못/이현숙 색연필로 그린 아버지의 연못에는 아버지가 없다. 검은 머리며 팔뚝의 파란 힘줄이며 젊은 아버지는 보이면서, 보이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그림 속의 나는 작은 연못에서 놀고 있다. 꺽지 피라미 메기 쏘가리는 친구들이다. 아버지는 강물 속에서 어항을 살피시는 중이다. 연못 놀이는 밤잠도 설치게 했다. 물에 무엇을 새길 수 있을까? 흐르는 강물을 보면 새겨진 것들이 떠 오른다. “쓱쓱 싹싹” 숫돌에 낫 가는 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설렜다. 새끼줄로 챙챙 감긴 낫과 야전삽은 필수품이었다. 몇 번이고 자다 깨던 새벽, 부엌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언니와 나는 새끼줄로 묶은 두 개의 유리 어항을 깨뜨릴세라 맞잡았다. 강변 아까시나무는 새하얀 꽃을 족두리 구슬같이 수렁수렁 늘어뜨린 채 향기를..

좋은 수필 2024.03.31

3월의 눈/김아인

3월의 눈 김아인(채영)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고 했던가. 언젠가부터 내가 사는 이 동네에도 3월 눈이 어색하지 않다. 철없는 계절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우수·경칩이 지났는데 함박눈이 내린다. 한겨울에도 좀체 구경하기 힘든 폭설이다. 겨우내 밀린 눈을 소급 정산하려는지 푸지게 퍼붓는다. 비를 머금은 눈이라고, 농가는 시설물 관리에 특별히 주의하라고, 매스컴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오던 봄이 살짝 뒷걸음친들 어떠랴. 잠재된 소녀감성이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킨다. 설거지할 일도 없는데 텔레비전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무릇 태초의 세상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위남공원은 설국이 되었다. 소담스런 눈에 눈이 시리다. 눈이 길을 지웠다. 할머니랑 나온 꼬마가 숫눈 위에다 아장아장 새 길을 만들어간다. 너무..

좋은 수필 2024.03.31

손·수·다/이현숙

손·수·다/이현숙 “뭘 꿰매줄까?” 매끈하며 날래기 그지없고 정교한 그 물건은 귀를 쫑긋거리며 내 앞에서 반짝인다. 눈도 코도 없이 오로지 귀 하나 열어놓고, 어딘지 모를 세상을 이어 줄 가느다랗고 기다란 실을 풀어놓은 채. 산책길, 어린이 놀이터 앞의 한 가게는 지나칠 때마다 문이 닫혀 있었다. 문 앞의 키 큰 배롱나무꽃에 정신이 팔려, 가게를 눈여겨보지도 않았었다. 붉은 꽃이 지는 어느 날 문득,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손수다’라고? 유리문에 코를 부딪치며 들여다보았다. 가방 테이블보 앞치마 쿠션 인형…. 사람의 손맛이 만들어낸 동화 속 풍경이 올망졸망 꿈꾸듯 했다. 가운데 긴 나무 탁자 위에는 리본이 달린 가위와 줄자가 보였다. 옆에는 갖가지 색실이나, 무엇인가 담겼을 반짇고리가 놓여 있어, 빙 ..

좋은 수필 2024.03.31

차심/이상수

차심 이상수 저걸 차茶의 마음이라 할까. 찻잔 안쪽에 무수한 금들이 그어져 있다. 촘촘하게 새겨진 무늬들이 물고기 비늘 같다. 찻물을 따르자 실핏줄처럼 가느다란 선들이 잔잔하게 일렁인다. 차심이란 미세하게 금이 간 찻잔에 찻물이 스며든 것을 말한다. 마름모꼴이거나 오각형 모양의 무늬들은 찻물에 담겨 있을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통상 가마에서 갓 나온 도자기의 유약이 상온과 만날 때 생긴 빙렬氷裂에서 비롯되는데 얼음이 갈라지는 모양과 흡사하다. 차심은 빙렬을 타고 차가 오랫동안 스며들어 생긴 시간의 흔적들이다. 오랜만에 들른 친정집은 한해 농사를 마감하고 고즈넉해져 있었다. 늦은 점심을 물리고 부녀가 마주 앉았다. 준비해 간 차를 마시며 저물어가는 들녘을 바라본다. 아버지의 얼굴은 몇 달 전보다 조금 ..

좋은 수필 2024.03.31

재봉골목/최연수

재봉골목 ​ 최연수 ​ ​시접 좁은 집들이 답답한 그림자를 벗어놓은 골목 봄볕이 은밀한 속살까지 훔쳐보자 눈치 빠른 꽃다지가 보도블록 틈으로 한 뼘 여유분을 풀어놓는다 ​ 걸음들이 서둘러 시침과 박음질을 오가고 안경 쓴 민들레가 골목입구부터 노란 단추를 채운다 ​ 꼬박 달려온 노루발이 숨을 고르는 지퍼 풀린 시간 바짝 죄던 마감이 커피를 뽑아 내리면 잠시 농담 속을 서성이는 슬리퍼들이 붉은 입술을 찍는다 ​ 고단한 품이 넘쳐 돌려막기에 바쁜 카드들 골목이 느릿느릿 바람 쐬러 나가면 쪽창을 열어젖힌 채 갖가지 공정에 바쁜 꽃밭, 마감에 채 눈꼽을 떼지 못한 꽃도 있다 ​ 뒤집은 오후에 납기일을 접어 넣고 체불을 오버로크해도 자꾸만 뜯어지는 생의 밑단들 한 톨 한 톨 땀방울을 꿰면 낡은 목장갑처럼 올 풀린 ..

좋은 시 2024.03.30

죽장도/김희숙

죽장도 김희숙 검劍이 사는 집이다. 금으로 수놓은 별자리에서 푸른빛이 품어나는 사인검과 티끌조차 산산이 자를 것 같은 날렵한 충무도 사이에 긴 대나무 도검 한 자루가 쓸쓸하게 서 있다. 녹물을 덮어 쓴 칼날은 마치 초로의 노인이 벽에 등을 대고 있는 듯 대나무 지팡이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낙죽장도 전시관을 둘러보다가 나는 그 칼 앞에서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한참을 서성이다 죽장도의 지난한 시간을 읽는다. 대지팡이는 순리를 거슬렀다. 흙속으로 뻗치던 뿌리를 머리로 삼았고 위로 솟구치던 마디는 도리어 다리가 되어 바닥을 짚는다. 누르스름한 거죽에 거뭇거뭇한 손때가 버짐처럼 남았으나 마디마디는 살아 있어 여전히 꼿꼿한 자태다. 대나무와 쇠칼이 짝을 이루었다. 연둣빛 새순을 틔웠을 줄기 안쪽에 생명을 ..

좋은 수필 2024.03.28

옥수수를 기다리며 / 황상순​

옥수수를 기다리며 / 황상순 ​ 옥수수를 딸 때면 미안하다 잘 업어 기른 아이 포대기에서 훔쳐 빼내 오듯 조심스레 살며시 당겨도 삐이걱 대문 여는 소리가 난다 ​ 옷을 벗길 때면 죄스럽다 겹겹이 싸맨 저고리 열듯 얼얼 낯이 뜨거워진다 눈을 찌르는 하이얀 젖가슴에 콱, 막혀오는 숨 머릿속이 눈발 어지러운 벌판이 된다 ​ 나이 자신 옥수수 수염을 뜯을 때면 송구스럽다 곱게 기르고 잘 빗질한 수염 이 노옴! 어디다 손을 손길이 멈칫해진다 ​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솥에 든 옥수수를 기다리는 저녁 한참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잠이 쏟아진다 노오랗게 잘 익은 옥수수 꿈 속에서도 배가 따뜻하여, 웃는다 ​

좋은 시 2024.03.26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 / 박제영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 / 박제영​ ​ 카트만두를 여행하는 것과 카트만두를 사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수십 년을 살았지만 밑도 끝도 모를 당신이라는 오지를 살아내면서 당신이라는 미로를 살아내면서 아직도 우리는 서로의 중심에 닿지 못했으니 서로의 극점을 찾지 못했으니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닿지 못할 서로의 오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서로의 미로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영원히 닿지 못해도 좋을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를 함께 살아내는 것 우리가 백 년을 해로하는 방식일 겁니다 ​

좋은 시 2024.03.26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낯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 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 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있는 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 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 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 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 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 넓혀진 길의 폭만큼 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 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 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 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 타워 크레인..

좋은 시 2024.03.26

아버지의 우파니샤드/ 손광성

아버지의 우파니샤드/ 손광성 여남은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어느 날 마루에서 담배를 피우고 계시는 아버지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담장 너머로 내 또래 아이가 토끼 귀를 잡고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토끼가 불쌍했습니다.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토끼는 왜 귀를 잡지요?"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꼼짝 못하니까." 순간 아버지 곁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가 보였습니다. 놈은 어디를 잡아야 꼼짝 못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버지 고양이는 어디를 잡지요?" "목덜미를 잡지." 나는 쓰다듬는 척하다가 목덜미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번쩍 들어올렸습니다. 놈은 발톱을 세워 할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 그리고 한참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집으로 오다가 두엄을 헤집고 있는 닭이 눈에..

좋은 수필 2024.03.25

고리 / 전미경

고리 / 전미경 침묵이 흐르는 반가다. 닫힌 문마다 정교한 이음이 가문의 결로 자리한다. 가옥을 지키고 있는 텅 빈 뜰엔 고요와 쓸쓸함만이 사대부의 흔적을 대신한다. 바람도 잠시 걸음을 멈춘 듯 작은 움직임조차 일지 않는 비움의 터다. 솟을대문을 사이에 두고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격랑의 역사 속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안과 밖을 드나들며 고리를 만졌을 손길이다. 둥근 테가 가문의 윤기만큼 반지르르하다. 고리를 잡으며 밀고 당긴 시간 속, 어르고 달래는 연습은 감정의 빗금을 수없이 긋고 지우면서 마음을 두드렸을 것이다. 마음의 깊이를 저울질하던 그 고리를 잡는다. 손끝에 닿는 촉감이 쇠붙이의 딱딱함보다는 곡선의 부드러움이 먼저 가 닿는다. 전통가옥에서 만나는 근엄함보다 심연의 성찰을 먼저 안았을 고리다. 통하..

좋은 수필 2024.03.25

칼을 갈다 / 김이랑

칼을 갈다 / 김이랑 칼 갑니다. 칼 갑니다. ​ 누군가에겐 눈물 섞인 소리요, 또 누군가는 화들짝 놀랄 소리다. 오뉴월 서리 내리는 소리에 나도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 저만치 낡은 오토바이 한 대가 멀어지고 있다. 마침 속이 출출한 터, 허기를 채우기 위해 포구로 나간다. 횟집 상가에 들어서자 비릿한 냄새가 끼쳐온다. 몸속 유전자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원시의 본능이 발동한다. ​ 꿈틀대는 고기들을 보기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문어, 넙치, 우럭, 해삼, 개불…. 싱싱한 먹잇감을 고르려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다니는데, 바깥쪽에서 강한 마찰음이 들려온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보니 한 노인이 담벼락 음지에서 칼을 갈고 있다. ​ 위잉, 쨔르르르. ​ 칼날을 고속 연마기에 대자 자잘한 불꽃이 흩어..

좋은 수필 2024.03.23

쌈 / 강여울

쌈 / 강여울 부모님은 친정에 있는 동안 잠시라도 좀 쉬라며 나를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는 점심상을 차리셨다. 양념불고기와 푸성귀들이 먹음직스럽다. 친정 부모님은 쌈을 좋아한다. 나도 쌈을 좋아한다. 나를 시집보내고 두 분이 쌈을 드실 때면 어김없이 내 생각에 목이 메었다고 했다. 나의 친정 부모님은 거의 반세기를 함께 살아오면서도 쌈(싸움)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귀찮고 힘든 것을 참았고, 좋은 것은 서로 권하고 양보했다. 어릴 적 나는 다른 모든 부모들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내가 결혼을 하면서 함께 살며 바라본 시부모님은 거의 날마다 쌈을 했다. 우리 부부는 친정 부모님처럼 정답지도 않았지만 보이게 쌈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어머니께서 끝도..

좋은 수필 2024.03.21

해우소(解憂所)에서 /이방주

해우소(解憂所)에서 /이방주 산에 가지 못하는 일요일이다. 이 나이에는 조금이라도 땀을 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까운 우암산에라도 가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시내버스를 타고 상당공원에서 내려 삼일공원에 올라가려니 진땀이 바작바작 났다. 동상은 넘어진 정춘수 목사의 좌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랫배가 쌀쌀 아파졌다. 어제저녁의 탐욕이 말썽을 부리는가 보다. 급히 공원 주차장 옆에 있는 간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인간의 타락의 오지奧地를 잘도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내가 급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놓자니 플라스틱 상판이 '우지직' 죽는 소리를 내었다. 아랫배에서 꿈틀대는 그놈이 그새 몸무게를 늘렸나 보다. 갑자기 아프던 배가 사르르 정상으로 돌아..

좋은 수필 2024.03.21

하얀 민들레/강여울

하얀 민들레 강여울 “옥상에서 지심을 뽑았더니 몸이 고되구나.” 퇴근해서 현관을 들어서자 어머님이 오늘 한 일을 이야기하고는 엉금엉금 방으로 기어가신다. 지심 뽑을 땅이라고 해봐야 예전에 김장 배추를 절이던 커다란 고무통 하나와 화분 몇 개일 뿐이다. 흙 밟을 일이 거의 없는 도시에 살다 보면 늘 흙이 고프다. 그래서 흙을 옥상 화분에 담아놓고 그가 부리는 마술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흙은 얼마전부터 고추 모종 아래 민들레 몇 포기를 살려내 하얀꽃을 피우고는 바라보는 내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있다. 지난해 봄, 먼 산으로 산나물을 뜯으러 갔었는데 도시에서 보기 힘든 하얀민들레 군락이 있어 씨앗 두어 대공을 뜯어 왔었다. 옥상 흙에 묻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흩어놓았는데 기특하게도 몇몇 씨앗을 품고는 싹을 틔우..

좋은 수필 2024.03.21

가재미가 돌아오는 시간/박금아

가재미가 돌아오는 시간/박금아 ​ ​ ​ ​ 바닷속보다 깊이 누웠다. 물살을 가르던 꼬리도 지느러미도 고조곤히 접었다. 도다리쑥국을 끓이려고 도다리를 사러 갔다가 대나무 채반에 담긴 하이얀 가재미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삼십 마리쯤 되려나. 그곳 사람들이‘미주구리’라고 부르는 물가재미였다. 가재미를 손질하던 여인이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새빅에 잡은 기다예. 만 원에 가져가이쏘오.” 뼛속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은 한때 목숨이었던 것 같지 않았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는 내가 비싸다고 생각해서 망설이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구워서 먹으면 고소하다며 대답도 듣기 전에 옆 소쿠리에 담긴 것까지 담아주었다. “알배고 낳니라꼬 예비서 그렇지 꾸 무모 꼬시다예. ” 알을 품고 낳느라 살이 다 빠..

좋은 수필 202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