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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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 / 김은주

다시 시작 / 김은주 목화가 툭 하고 고개를 꺾었다. 경주어 얻어 온 씨앗이 되 피우고 다시 살아나 여러 해 나의 뜰에서 산다. 솜이 칭칭 감긴 씨앗 몇 알을 누구에게 받아 왔는지 통 기억에 없다. 백련이 지고만 어느 논둑에서 받은 기억은 아련한데 누구였는지 무슨 일로 연 밭에서 목화씨를 건넸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마른 기억은 바람에 사라졌지만 해마다 야무진 검은 씨앗을 쓰다만 종이에 싸 확독에 보관해 둔다. 옹기에서 겨울을 난 씨앗은 봄이 되면 다른 일년초와 함꼐 뜰 여기저기 뿌려지는데 그 위치는 꽃 피는 여름이나 되어야 정확히 알게 된다. 마당 귀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꽃 피우고 지다가 초록이 쓰러지는 이맘때쯤 흰 솜꽃을 피워 존재를 드러낸다. 집 비운 사이 된서리가 다녀간 모양이다. 온통 ..

좋은 수필 2024.04.28

글밥/김은주

글 밥                                                     김은주 젓가락을 밥 속에 찔러 넣는다. 옆으로 젖히니 덩어리에서 덜어져 나온 밥 한 덩이가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밥을 입속으로 데리고 온 젓가락을 빼내며 오래 밥을 씹는다. 밥을 씹으며 내다 본 창밖에는 오월의 장미가 붉다. 참으로 게으른 식사다. 어른들이 봤으면 복 달아난다며 등을 쳤을 일이다. 매번 처음인 듯 밥을 씹는다. 처음에는 혀 위에서 구르던 밥 덩어리가 씹을수록 알갱이로 변하며 양옆 턱 선으로 가 고인다. 고인 밥 알갱이가 다시 어금니 위로 올라와 부서지고 다시 턱 아래로 가 씹힌다. 한참을 이러다 보면 혀 아래 침샘에서 달달한 침이 입 안 가득 고여 온다. 밥 알갱이가 녹아들며 느껴지는 이..

좋은 수필 2024.04.28

사막 건너기/김은주

사막 건너기 / 김은주   첫닭이 울기도 전 더듬더듬 어둠을 가르고 골목길에 나선다. 골목길은 이미 낯선 이국의 언어와 분주한 지프의 시동 소리가 함께 실타래처럼 엉켰다. 세상의 모든 말은 귀가 열리면 언어이고 귓등을 되돌아 나가면 소음이다. 왕왕거리는 소음도 며칠 듣다가 보니 말속에 가락도 있고 정情도 느껴진다. 여남은 대의 지프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불빛을 쏜다. 길쭉한 빛 사이로 건조한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출발을 재촉하는 시동 소리가 사뭇 우렁차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옷을 입은 남자가 고개와 손을 동시에 차 쪽으로 흔들며 차에 오르라는 신호를 보낸다. 긴말은 필요 없고 서로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 차에 오른다. 찬 새벽공기에 코트 깃을 세우고 손가방도 가슴을 가로질러 단단히 맸다. 지금 우리는 깜..

좋은 수필 2024.04.28

달개비/김은주

달개비                                                                                                                 김은주  국 안에 무가 제법 투명하다. 함께 넣은 파와 마늘이 어우러져 끓고 있는 국물도 곡진해졌다. 반찬 몇 가지를 조물조물하고 뒤이어 식혜 한 통을 다 삭혀 두는 사이에도 그녀는 여태다. 빠진 목으로 짐작건대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건만 감감무소식이다. 기다리는 자가 느끼는 시간은 오마는 사람의 두 배로 길다. 같은 시간이지만 오는 이에게는 서둘러야 하니 짧게 느껴질 테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리무중이니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걸레질하다가 무단히 멀쩡하게 놓인..

좋은 수필 2024.04.28

토굴 /김은주

토굴 /김은주  글을 재우려고 방문을 닫는다. 자꾸만 들떠 달아나는 글을 잡고 뉘여 토닥토닥 등을 두드린다. 이불도 끌어당겨 덮어 보고 흥얼거리며 자장가도 불러 본다. 겨드랑이 아래 끼고 누워 충분히 숨길도 열어주고 그래도 뒤척이면 머리까지 쓰다듬어 준다. 스르르 눈 감을 때까지, 달디 단 잠 속에 들 때까지 오래 글을 어르고 달랜다. 처음부터 재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행간을 넘나들며 혼자 잘 놀 때는 그러려니 하고 두고 보지만 걸려 넘어지고 징징거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푹 재우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문턱에 걸리고 툴툴거리는 글을 어찌 그냥 두고 보겠는가? 쓰는 자는 툴툴거림의 이유라도 알지만 읽는 자에게 그것은 독서의 물길을 막는 일이니 말이다. 접시꽃 흐드러진 칠월의 뙤약볕이 방까지 도달하기에는 ..

좋은 수필 2024.04.28

자객 / 김은주

자객 / 김은주  자객이 떴다. 푸른 안개도 바람을 가르는 그림자도 없다. 끊어 놓을 듯한 호흡도 꿈틀거리는 맥박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달빛 한줌 등에 업지 않고 월담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은 듯하다. 자객은 그 흔한 검 한 자루 손에 쥐지 않고 무더운 염천을 건너 우리에게로 왔다. 심복 하나쯤 둘 법도 한데 오직 혼자다. 이울어진 빛의 배후에 도사리고 앉았다가 싸늘한 쇠붙이 올가미 하나 달랑 들고 긴 유리병의 목을 따러 하강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숨 줄을 끊어 놓을 듯한 자객의 기세에도 마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병은 긴 목을 빼고 앉아 언제나 목숨을 내놓기 위한 것이라는 듯 일말의 저항도 없어 뵌다. 병은 자객을 만나기 전 냉골의 방에 앉아 긴 참선에 들었을 것이다. 화두타파를 위해 목구멍까지 ..

좋은 수필 2024.04.28

빈방/김은주

빈방                                                                                            김은주  홍매화가 붉게 핀 길 건너 할머니집이 전에 없이 부산하다. 마당 가득 사람이 북적대고 환하게 불도 밝혀져 있다. 집 앞 텃밭에 흙이 녹아 씨를 넣어야 할 때가 다 되었는 데도 할머니는 기척이 없었다. 추운 겨울을 건너기 위해 아들네 집에라도 가셨나 싶었는데 오늘 밤 할머니는 조등(弔燈)으로 내걸려 있다. 일 년 내도록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더니 오늘 보니 식구들도 참 많다. 보이지 않는 식구들이 저리 많은데 할머니는 겨우내 빈방에 사람을 들이고 싶어 그리 안달이셨을까. 나는 베란다 창틀에 기대 할머니 집 마당을 유리병 속처럼 내려..

좋은 수필 2024.04.28

비와 당신의 이야기 / 김 경

비와 당신의 이야기 / 김 경     비가 내린다. 여름엔 그토록 야박하더니 가을 들어 장맛비처럼 퍼붓는다. 마치 누군가의 미련 같다.때마침 라디오에서는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한때 김태원이 이끄는 록그룹 「부활」에 빠져서 전국 콘서트를 따라다닐 때 엔딩 곡으로 어김없이 등장하던 노래다. 화려한 조명 아래 비의 영상이 펼쳐지고 보컬이 혼신을 다해 무대를 장악하면 마지막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절절한 노랫말이 모두들 까무러치게 했다.김태원이 열일곱 살에 썼다는 이 곡은 비오는 날 들어야 제격이다. 그것도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두컴컴한 날 홀로 음률 속을 헤매노라면,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이된다. 내게도 언젠가 비오는 날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 채 떠나간 사랑이 존재했..

좋은 수필 2024.04.27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 14년 넘게 입어온 청바지 무릎이 해졌다날실은 닳아 없어지고 수평의 씨줄만 남아 있다내 청춘의 무릎도 저만큼 환부를 드러냈을 것이다사람들은 내 청춘에서 어떤 수평을 보았을까청춘을 질주해 온 내 걸음 오래오래 바라보니나의 수직을 코바늘처럼 당겨대는 무릎이바로 전 한 걸음을 그림자에 얽어 짠다수직이 무릎을 다시 잡아당기고,내 몸을 닮아가는 그림자만 수평으로 누워 있다내가 몸속에 빛을 켜면 드러나는 저 몇 자의 피륙에서내 청춘은 등잔 기름처럼 닳고 있다이토록 환한 만성통증을 외면해온 나여네게로 가는 문門인 네 환부를 바라보아라, 그러면꼿꼿이 서려고만 했던 나 지워진 어느 날어두워서 뚜렷한 네 그림자를 밟고 있을 것이다그날은 전생으로 떠났던 한 사람 돌아와 무릎 끓고네 그림자를 ..

좋은 시 2024.04.26

붉은 염전 / 김평엽

붉은 염전 / 김평엽   ​​내게도 인생의 도면이 있었다갱지 같은 마누라와 방구석에 누워씨감자 심듯 꿈을 심고 간도 맞추며 살고 싶었다바닥에 엎디어 넙치처럼 뒹굴며아들 딸 낳고 싶었는데돌아다보면 염전 하나 일구었을 뿐성혼선언문 없이 산 게 문제다선녀처럼 그녀를 믿은 게 문제다정화수에 담긴 모든 꿈은 증발하고외상의 눈금만 술잔에 칼집을 내고 있었다알았다, 인생이란 차용증서 한 장이라는 것가슴뼈 한 개 분지르며 마지막 가서야 알았다소금보다 짠 게 계집의 입술임을염전에서 바닥 긁는 사내들이여 아는가슬픔까지 인출해 버린 밑바닥에서누구의 눈물도 담보할 수 없다는 것계집 등짝 같은 해안에 자욱이 되새 떼 내려노랗게 우울증 도지는 현실염전만이 소금을 만드는 게 아니다우리 가슴을 후벼도, 아홉 번 씩 태운소금 서 말 ..

좋은 시 2024.04.26

시 파는 사람 / 이상국

시 파는 사람 / 이상국  젊어서는 몸을 팔았으나나도 쓸데없이 나이를 먹은데다근력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요즘은 시를 내다 판다그런데 내 시라는 게 또 촌스러워서일년에 열 편쯤 팔면 잘 판다그것도 더러는 외상이어서아내는 공공근로나 다니는 게 낫다고 하지만사람이란 저마다 품격이 있는 법이 장사에도 때로는 유행이 있어요즘은 절간 이야기나 물푸레나무 혹은하늘의 별을 섞어내기도 하는데어떤 날은 서울에서 주문이 오기도 한다보통은 시골보다 값을 조금 더 쳐주긴 해도말이 그렇지 떼이기 일쑤다그래도 그것으로 나는 자동차의 기름도 사고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는데가끔 장부를 펴놓고 수지를 따져보는 날이면세상이 허술한 게 고마워서 혼자 웃기도 한다사람들은 내 시의 원가가 만만찮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사실은 우주에서 원료..

좋은 시 2024.04.26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물에 젖기 위해백 년을 걸어가는 나무가 있지요퉁퉁 부르튼 맨발 사이로세상의 저녁은 소리 없이 스며들고다가오는 천년을 가만 응시하느라나는 바싹 가물어 있었지요간절함은 어디에도 기록할 수 없어한 획씩 혈관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산벚의 흰 그늘까지 움찔거렸겠지요한 걸음 걸을 때마다제 근원의 몸부림으로 뜨거웠을 시간들그때의 다급한 호흡은어떤 이의 애달픈 기록이었을까요산벚이 거느린 골짜기들이일제히 먹빛의 힘으로 일어서는 저녁경판에 서려 있는 푸른 맥박 소리온 산 가득 울려 퍼지는데먹물보다 진한 핏빛 눈물 하얗게 쏟아지네요오래전 생의 바깥에 등불을 밝힌 이들은지금도 구국의 화엄을 새기고 있을까요봄이면 경판 속의 활자들 환하게 피고 지고짜디짠 소금기 허옇게 일어서는지골짜기마다 ..

좋은 시 2024.04.25

사랑길 / 박월수

사랑길 / 박월수 소리 내지 않는 마루를 본다. 솟을대문 높다란 송소고택 큰 사랑채에 딸린 툇마루는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쪽문쯤에서 안채 바람벽으로 이어지는 툇마루는 두께가 유난하다. 사랑채에 기거하던 바깥양반이 안채로 밤 나들이 가던 길이란다. 모르긴 해도 가슴이 꽤나 두근거렸을 아름다운 길이다. 아랫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 부러 그리 만들었단다. 이슥한 밤 사랑채의 툇마루 밟는 소리를 체통을 흐려놓는 소리로 여겼던 옛 양반이 측은해진다. 아흔아홉 칸 저택에서 많은 식솔을 호령하던 양반에게도 드러내 놓고 사랑하는 일만은 허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의 눈을 피해 아내마저 은밀하게 만나야 했던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한 집에 살면서도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마음은 애틋하고 절절했을 게다. 하나 ..

좋은 수필 2024.04.23

숫돌 / 박영순

숫돌 / 박영순 칼을 빼 들어 본다. 칼의 무딘 정도를 손끝으로 직감한다. 칼날이 무뎌진 걸 느끼면 칼 가는 줄로 쓱싹 대충 갈아 사용하는 나이다. 그러나 나의 옛집에서는 매 식사 때마다 찬거리를 썰고 다졌던 칼이 도마 위에서 재료들을 미끄러뜨리면 칼을 들고 장독대로 향해 걸어 나가셨던 엄마가 계셨다.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항아리 뚜껑 하나를 열어 거꾸로 덮어놓으시고는 뚜껑 테두리에 칼날을 쓱싹 문질러 갈아 쓰셨다. 칼날이 더 무디어지면 툇마루 아래 놓아둔 우리 집의 숫돌이 등장하였다. 숫돌은 아버지의 전유물처럼 칼이나 낫을 갈 때만 우리들 앞에 놓였다. 아버지의 수고로 칼날은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런 칼날을 받아 보며 긴장하여 떨던 엄마는 자주 칼날에 베이셨다. “조금만 덜 갈아 주면 될 텐데, 소 잡..

좋은 수필 2024.04.23

못을 뽑다/권남희

못을 뽑다/권남희 벽이 갈라진다. 너무 큰 못을 벽에 겨누고 두드려 박은 것이다. 오래된 벽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새해 아침부터 못 박을 곳이 없나 벽을 바라보다 일을 냈다. 집안 곳곳에 못을 박고 뽑아낸 흔적과 새로 박은 못들이 있다. 벽은 이미 간격조정을 할 수 없을 만큼 박힌 못으로 가득 찬 느낌이지만 미처 비명 지를 틈도 주지않고 대못을 들어 박기 시작한다. 못 박히는 소리는 온 집안을 울리고 아래 위층까지 대못 치는 소리가 퍼져나간다. 망치소리는 내 팔을 따라 몸 안으로 돌아다니며 진동 하다가 머리까지 흔들기 시작한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밤 아홉시 이후에는 벽에 못을 박지 말아달라는 문구가 붙여있다. 아침이지만 잠시 숨을 고른다. 새집을 계약하고 이사했을 때 벽..

좋은 수필 2024.04.21

적과/이정경

​ 적과/이정경 사과 꽃봉오리 수줍게 올라오던 봄, 오랜만에 옛 친구들이 모였다. 모처럼 나들이라 꽃단장했지만, 어디 세월의 흔적을 얄팍한 분칠로 가릴 수 있을까. 파운데이션 위로 드러나는 주름살에서 그녀들의 지난 시간이 숨어있다. 백발이 성성하고 느슨해진 말투에서 삶의 연륜을 느낀다. 늘 동생을 업고 다녔던 친구의 등을 슬쩍 만져본다. 아직도 그녀의 빈 등에서 젖내가 묻어있는 듯하다. 세상 언저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친구들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날이 저물도록 끝이 나지 않는다. 적과로 떨어진 과일처럼 숨을 죽이고 산 시간을 쏟아내려면 아마도 이 밤을 하얗게 새워야 할 것 같다. 엄동의 추위를 이겨낸 사과나무는 가지마다 꽃눈을 틔운다. 꽃은 액화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고 정화만 남긴다. 선택된 꽃은..

좋은 수필 2024.04.21

효목동 그 집 / 조경희

효목동 그 집 / 조경희 같은 꿈을 꾼다. 벌써 몇 번째다. 예전 효목동 쪽방에 살던 꿈이다. 단칸방에 부엌이 억지로 난 그 집, 연탄보일러 뚜껑에 온수가 돌아 나와 벽돌색 고무 통에 옮겨져 처음으로 뜨신 물을 흔전만전 쓰던 집이다. 골목어귀로 쪽문이 달렸던 그곳에서 아이 둘이랑 넷이서 누우면 딱 맞던 방 한 칸짜리 전세방이었다. 그 집에 살 때처럼 한 번만 딱 한 번만 다시 돌아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죽은 성우가 살아있었고, 지예가 아장아장 걷던 집, 사백만원짜리 단칸방 그 집이 나는 좋았다. 처음으로 우리가족만 살게도 된다는 신혼의 달콤함을 알게 해준 집이었다. 부업 한다고 밤 껍데기를 하루에 다섯 포씩 까다가 손가락이 마비되기도 했다. 밤 부업은 한철이라 봉투 접는 부업을 시작해서 매월 받던 돈은..

좋은 수필 2024.04.21

잠빚/안희옥

잠빚/안희옥 머릿속이 안개가 낀 듯 흐릿하다. 녹작지근한 의식의 끊김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썰물처럼 밀려든다. 사물의 정확한 거리나 명암도 제대로 가늠되지 않고 온몸이 몽롱해진다. 팔걸이의자 위에 올려 둔 손이 힘없이 툭 떨어진다. 중요한 사안을 의논하는 회의 중이었다. 기면증 환자처럼 나도 모르게 깜박깜박 조는 마이크로 슬립에 빠져버린 것이다. 회의록에 적혀있는 글자들이 이리저리 춤을 춘다. 정신을 차리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소용없다. 앞자리에 앉아 있다간 무슨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빚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을 경우 그 시간만큼 벌충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잠을 참으면 그것이 빚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깨어있는 두 시간당..

좋은 수필 2024.04.21

그늘의 내력 / 서은영

그늘의 내력 / 서은영 그늘에 들어선다. 산책로를 덮고 펼쳐진 산그늘을 걷는다. 별스러울 것도 없지만 산이 생겨난 이래로 만들어진 깊이이니 태곳적 그늘이라 할 만하다. 등 뒤에서 언제나 나를 따르던 평생의 그림자도 어느새 산그늘이 품은 태고의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얼마나 더 걸어 들어가면 나도 저 거대한 원시의 깊이에 가닿을 수 있을까. 내게 흘러들어 나를 이룬 것 가운데 태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산기슭을 따라 둘레길이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그늘을 품고 숲 사이로 길게 이어진다. 지난 계절도 그 이전의 세월도 쌓였는지 숲길이 짙다. 햇볕을 땅속까지 끌고 들어간 나무들이 빛을 삼킨 뒤 그 나머지를 다시 땅 위로 밀어낸 자국, 날마다 달아나는 햇살과 움켜쥐려 안달인 어둠의 중립지대, 하늘을 만..

좋은 수필 2024.04.20

조각보/피귀자

조각보/피귀자 '밀가루'로 만들면 국수이고 '밀가리'로 만들면 국시라고 운을 떼자 모두들 국수 보다는 국시가 훨씬 정겹고 구수하고 어쩐지 진국 같다고 입을 모은다. 분칠한 여인과 민낯의 수더분한 시골아낙의 조합 같다고나 할까. 뜨거운 여름날 얼갈이배추나 애호박을 숭숭 썰어 넣고 삶은 국시 한 그릇은 끝없이 줄줄 흘러내리는 땀과 함께 더위를 날리기에 충분했다. '이열치열' 더디 끓는 뚝배기 같은 그 맛은 어린 나이에는 도저히 가늠할 수도, 이해되지도 않은 맛이었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사대 일 정도릐 비율로 섞어 반죽을 한 동그란 덩어리가 그렇게 요술을 부릴 줄이야. 거칠어진 어머니의 두 손 밑에서 거슬하던 덩어리가 치대고 또 주무르는 경건한 시간의 의식 속에서 윤이 나고 물오른 새색시처럼 새치름해졌다. 홍..

좋은 수필 2024.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