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1/14 4

배짱 없는 베짱이 / 문경희

배짱 없는 베짱이 / 문경희 우화, '개미와 베짱이'의 결미는 나라마다 다르게 각색된단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개미가 과로사를 면치 못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시스템에 익숙한 쿠바의 경우, 베짱이는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개미들이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은 아름다운 노래로 귀를 즐겁게 해 주었노라고, 그러자 개미는 일밖에 몰랐던 스스로를 뒤돌아보며 '이제부터는 함께 춤추며 살자'는 호의로 쾌히 식량을 나누었다나. 미국편은 좀 더 다이내믹하다. 자신의 밥은 자신이 버는 법이라며, 개미는 베짱이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 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낙심한 베짱이가 노래로 자신의 처지를 달래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음반기획자가 이를 듣게 된다. 뛰어난 노래 실력을 인정받은 베짱이..

좋은 수필 2024.01.14

두루미 /안병태

두루미 /안병태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좋아한다. 묵직하고 도톰하여 돈다운 맛도 맛이려니와, 그보다는 동전의 뒷면에 나를 닮은 두루미 한 마리가 창공을 날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 숲 노송 위에 한 다리를 접고 서서 사색에 잠긴 두루미,그 고고한 자태에다 나를 비교한다는 것이 가당찮은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그의 가냘픈 육신을 보고 있노라면 적어도 외모만큼은 내가 그를 닮았거나 그가 나를 닮았거나 둘 중 하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 가끔 저울에 올라가 본다. 바늘이 반 바퀴를 겨우 돌아가 멈춘다. 구십 근인가? 옷, 구두까지 몽땅 합쳐도 백 근이 못되는 체중이다. 사반세기 전 인사기록카드에 기록했던 몸무게가 지금껏 변함이 없다. 허리띠를 새로 사면 삼분의 일쯤 잘라낸다. 그냥 두르면 두 바퀴나 돌아가..

좋은 수필 2024.01.14

소풍, 두 알의 감자가 있는 / 곽재구

소풍, 두 알의 감자가 있는 / 곽재구 높은 산길에 올랐습니다. 857번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길이었지요. 안녕! 나는 길의 초입에 잠시 멈춰 서서 초면례를 합니다. 길은 금세 내 인사에 대꾸를 해옵니다. 토끼풀꽃들이지천으로 피어 있고 산괴불주머니와 씀바귀 꽃, 현호색들이 어지럽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싸리나무 꽃들이 옅은 보라색의 구름들을 산기슭에 드리우고 있군요. 꽃향기들이 고즈넉한 시간들 사이로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았습니다. 오래전부터 나는 길 위에 핀 꽃들을 길의 신이 내게 건네주는 꽃다발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꽃다발을 넙죽 받아든 나는 한없이 행복해져서 죽은 다음 세상에는 길귀신이나 되어 쓸쓸한 날 길의 신의 말동무나 되리라 생각했지요. 길의 신이라 해서 왜..

좋은 수필 2024.01.14

묵언의 바다/곽재구

묵언의 바다/곽재구 저문 시간이면 순천만에 나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개펄이 좋고 개펄 냄새를 이리저리 실고 다니는 바람의 흔적이 좋다. 키 넘게 훌쩍 자란 갈대숲. 갈대들의 목은 꺽여 져 있다. 모두 같은 방향이다. 바람은 가끔씩 갈대숲 사이로 들어온다. 그럴 때 갈대들은 자신의 내면 안에 숨긴 낡고 오래 된 악기의 소리를 낸다. 어디로 갈까... 고개를 숙이고 끝없이 걸어가는 갈대들의 행렬은 순례자의 그것을 닮아 있다. 바람은 순례자의 옷깃을 흔들고 , 일찍 도착한 철새 몇 마리가 순례자의 이마를 선회한다. 시베리아로부터의 비행을 거친 그들의 날갯 짓은 은빛으로 빛난다. 조류학자들이 먹이를 위해 혹은 번식을 위해 새들은 먼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때, 나는 고개를 젓는다. 어쩌면 더 형이상학..

좋은 수필 2024.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