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1/19 4

장작을 패며/오세영

장작을 패며 오세영 ​ 장작은 나무가 아니다. 잘리고 토막 나서 헛간에 내동댕이친 화목(火木), 영혼이 금간 불목하니. 한 때 굳건히 대지에 뿌리를 박고 가지마다 무성하게 피워 올린 잎새들로 길가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기도 했다만, 탐스런 과육(果肉)으로 지나던 길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도 했다만 잘려 뽀개진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안으로, 안으로 분노를 되새기며 미구에 닥칠 그 인내의 한계점에 서면 내 무엇이 무서우랴. 확 불 지르리라. 존재의 빈터에 버려져 처절히 복수를 노리는 저 차가운 이성, 잘린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금간 것들은 이미 어떤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좋은 시 2024.01.19

신동엽의 「산문시 1」 평설 / 신형철

신동엽의 「산문시 1」 평설 / 신형철 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

평론 2024.01.19

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평설 / 신형철

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평설 / 신형철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중략) 연인들이여, 어울려 만족하는 그대들이여, 너희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너희들은 손을 꼭 잡는다.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 자신의 두 손도 서로를 느끼고, 혹은 그 두 손 안에 지친 얼굴을 묻고 쉬는 일도 있다. 그것이 얼마간은 나 스스로를 감지하게도 한다. 허나 누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연인들이여, 서로가 상대의 환희 속에서 성장하는 너희들. 끝내는 압도되는 상대가 , 하고 애원하는 너희들 ─ 서로의 애무 속에서 풍년 든 포도처럼 풍요하게 영그는 너희들. 다만 상대가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소멸하는 너희들. 너희에게 묻는다,..

평론 2024.01.19

김수영의 「봄밤」 평설 / 신형철

김수영의 「봄밤」 평설 / 신형철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業績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行路와 비슷한 回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人生이여 災殃과 不幸과 격투와 청춘과 千萬人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節制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합동시집 『平和에의 證言』 (1957) ...

평론 2024.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