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1/09 5

평범한 날의 평범한 이야기/허창옥

평범한 날의 평범한 이야기 허창옥 친구는 지금 한 시간째 이야기를 하는데 끊어지는가 하면 이어진다. 나란히 앉아 있으므로 나의 시선은 그의 옆얼굴에 머물러 있다. 그의 얼굴은 단아하지만 좀 지쳐 보인다. 그는 갈색 주름스커트에 아이보리색 반소매 니트를 입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다. 검소하나 세련되어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척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범어로터리의 횡단보도는 길다. 따라서 신호등이 바뀌는 시간도 길다. 인도의 횡단보도 사이에는 그래서인지 조그만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백 년 수령, 수피는 거의 다 벗겨졌고 세월만큼 옹이도 깊게 패였다. 하지만 잎사귀들은 싱싱한 초록이다. 돌에 새겨진 나무의..

좋은 수필 2024.01.09

마늘 까던 남자/민혜

마늘 까던 남자 민 혜 언젠가부터 마늘을 까는 일은 그 남자의 몫이 되었다. 퇴직하고 하릴없이 늙어가는 터수에 아내를 도와 마늘 좀 깠기로서니 유난 떨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 이변이요 사건이었다. 왕년의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 밥 한 끼 챙겨먹지 못했으며 자기 마누라가 허리 다쳐 누워 있을 때도 설거지 한 번 도와주지 못했던 남자였으니 말이다. 퇴직하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집 밥 먹는 남자를 '삼식이'라 한다는데 그는 정말 집 밖을 모르는 원조 삼식이었다. 착실한 삼식이 생활로 접어든지 어언 6년, 까칠해진 마누라의 눈치를 의식한 거였을까. 어느 날 그는 아내인 내가 바가지에 수북 담아 놓은 마늘을 보더니 까주겠노라고 자청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몇 해 전만 해도 김장철에 마..

좋은 수필 2024.01.09

유화 한 점/김윤재

유화 한 점/김윤재 꼭 그 모습이다. 사십 년 전 그때처럼 집안으로 선듯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이신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어린 시절 당신이 뛰놀던 앞마당이 나오고 오른편엔 외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배어 있는 사랑채가 있는데, 대문 앞에서 지루하게 서성거릴 뿐이다. 나는 차 안에서 마른 침을 삼켰다. "어서 들어가요 엄마. 괜찮아요. 어서." 그러나 어머니는 꼭 그때처럼 끝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느티나무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셨다. 작고 마른 그림자가 주인을 따라 나섰다. 동네 어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무심하고도 나른한 노인의 모습이다. 느티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땅 위로 드러난 뿌리는 각질이 벗겨졌고 몸통엔 군데군데 옹이가 박혔다. 한쪽으로 기운 가지엔 벌레 먹은 나..

좋은 수필 2024.01.09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 피귀자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 피귀자 나는 지금 눈물 없이 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겨드랑이가 가려워 몸이 뒤틀린다. 몸속을 달리는 혈관들의 반란도 잠재우기 힘들다. 주인은 나의 존재를 잊은 건지 밀폐된 박스에 나를 쳐 박은 채 몇 달째 방치하고 있다. 이슬에 젖은 풋풋한 흙과 풀냄새를 맡고 싶다. 아니, 자갈밭에라도 맨발을 묻고 싶은 심정이다. 파란 하늘이 보고 싶고, 바람의 향기를 맡으며 흔들리고 싶다. 어느 집 창고인지 부엌인지 알 수 없는 이곳이 너무나 답답하다. 어서 빨리 이 고통을 이기고 땅 속으로 파고들고 싶다. 사람들은 터져 나오는 내 신체의 일부를 '감자 싹'이라고 부른다. 작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리는 것이 사람인가. 여름의 초입부터 삶아먹고 지져먹고 볶아서 입맛..

좋은 수필 2024.01.09

비밀 있어요/김산옥

비밀 있어요/김산옥 나는 누군가의 왼쪽이 그리운 여자에요. 해서 그대가 언제나 내 오른쪽에 있어주길 바란답니다. 식사를 할 때, 함께 걸을 때,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탈 때도 언제나 그대가 내 오른쪽에 있어주기를 바라지요. 어쩌다 기회를 놓쳐서 그대 오른쪽에 있는 날에는 너무 슬프답니다. 네, 이런 날은 얼굴을 붉히며 그대 입만 쳐다봐요. 수줍어서 말도 못하죠. 대부분 내가 알아서 그대 왼쪽으로 가지만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거든요. 그런 날은 그대에게 오해로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더욱 마음이 쓰인답니다. 언제가 문인협회십포지엄에 다녀오던 날이었어요. 버스 안에서 어느 멋진 시인과 함께 앉게 되었죠. 난 그의 왼쪽이 그리운데 오른쪽에 앉는 불운을 맞았지 뭡니까. 버스 안이라 너무 시끄러..

카테고리 없음 2024.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