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 김경미 통화 / 김경미 통화 / 김경미 "아침에 일어나면 늘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좀 덜 슬플 수 있을까 생각해요......" 오래 전 은동전 같던 어느 가을날의 전화. 너무 좋아서 전화기 째 아삭아삭 가을 사과처럼 베어먹고 싶던. 그 설운 한마디. 어깨 위로 황금빛 은행잎들 돋아오르고. 그 저무는 잎들에 어깨 집혀 생이라는 밀교. 밤의 어디든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던. 돌아와 찬 이슬 털며 가을밤. 나도 자주 잠이 오지 않았었다. 좋은 시 2024.01.28
의자왕 / 신미균 의자왕 / 신미균 (1996년 현대시 등단작) 금요일 오후 파고다 공원 십층 석탑 밑 정년퇴직한 의자왕이 돌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파고드는 바람을 날짜 지난 신문으로 가리며 연신 굽신거리는 비둘기들의 호위를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탑의 꼭대기가 서서히 왕의 어깨를 누르려고 한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눈도 꿈쩍 안 하던 왕이 어깨를 움직여 햇빛 쪽으로 돌아앉는다 감기에 걸린 경순왕은 몇 번 뒤채더니 조용해졌고 소주에 찌들은 이성계는 벌써 길게 누워 버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는 알고 있다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서로 통성명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저 적당히 떨어져 앉아 무심한 척 하.. 좋은 시 2024.01.28
不惑의 구두 / 하재청 不惑의 구두 / 하재청 예고도 없이 불어닥친 바람 이미 거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낙엽은 더 이상 밟히는 존재가 아니다 동강동강 인화된 가을이 구두코에 부딪치며 몰려오던 날 그다지 바쁠 것 없는 귀가는 신발장에 버려진 낡은 구두처럼 고요하다 발뒤꿈치를 타고 가슴에 차 올라오는 먼 귀가길 모퉁이에 매달린 소용돌이 때론 먼지처럼 뚝뚝 피어나던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현관문을 열다 뒤돌아보곤 한다 내가 걸어온 이정표가 골목골목 훤하게 적시는 순간 예정된 귀가는 늘 서툴고 불편하다 신발장 구석 낡은 구두가 허리 아픈 아내보다 먼저 인사를 한다 구두 속 갇혔던 하루가 불쑥 튀어나와 나를 맞는다 그렇구나, 나를 맞는 하루의 시작이 지금부터구나 不惑을 넘긴 사람은 안다 저물녘이 고요에 젖어 흔들린다는 것을, 한 쪽으로 삐.. 좋은 시 2024.01.28
가족사진 -고경숙 가족사진 -고경숙 기와집 마당에 일가가 서 있다 집 안에 유일하게 있는 입식의자 두 개도 나왔다 자리 잡고 앉은 일대 조부 무릎에 기대고 뻗정다리로 서 있는 삼대 손자들 몸을 뒤틀고 있다 싫다는 객식구 김 씨와 박 씨까지 불려 나와 어색하게 뒷줄에 자리 잡았다 서 있는 이대 가장에게 초점을 맞추다 멈칫, 양복 윗도리 옆에 부엌에서 일하다 뛰어나온 앞치마 혼자 대열 밖으로 도드라져 사진사는 무안하지 않게 다들 옷매무새 한번씩들 정리해달라고, 모인 사람들 옷마다 단추란 단추는 다 채워지고 포마드로 쓸어올린 머리칼 한 올 허투루 날리지 않는다 앞치마 여자는 젖은 손으로 머리칼만 귀 뒤로 넘긴다 이제 모두 정면을 응시한다 오래된 기와지붕도 그 너머 대밭도 그 위를 지나던 구름도 구석에 받쳐놓은 낡은 자전거도 햇.. 좋은 시 2024.01.28
등의 방정식 / 현경미 등의 방정식 / 현경미 꿈결인가. 등이 따뜻하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자 내 등에 맞닿은 그의 등이 느껴진다. 침대 위아래에서 잠이 들었건만 등과 등 사이 바람 한 톨 비집고 들 틈 없을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인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도, 등을 돌리고도 편안하게 각자의 잠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등을 돌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러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치 우리만의 세상이 끝장나기라도 하는 듯 애틋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 듯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던 신혼의 단꿈을 꾸던 때였다. 서로의 앞만 바라보느라 등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등이 있어도 등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조금씩 거리가 느껴졌다고 할까. 등과 등 사이 거리가 마치 그와 나.. 좋은 수필 2024.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