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1/15 3

정끝별 시

..한 걸음 더.. ​ 낙타를 무릎 끓게 하는 마지막 한 짐 거목을 쓰러뜨리는 마지막 한 도끼 ​ 사람을 식게 하는 마지막 한 눈빛 허구한 목숨을 거둬가는 마지막 한 숨 ​ 끝내 안 보일 때까지 본 일 또 보고 끝을 볼 때까지 한 일 또 하고 ​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몰리니까 한 걸음 더 ​ 댐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한 줄의 금 장군!을 부르는 마지막 한 수 ​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 이야기를 끝내는 마지막 한 문장 ​ 알았다면 다시 할 수 없는 일 알았다 해도 다시 할 수 밖에 없는 일 ​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모르니까 한 걸음 더 ​ ​ ​ ..세상의 등뼈.. ​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께를 대주고 ​ 대준다는 것..

좋은 시 2024.01.15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보증 서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순간..

좋은 시 2024.01.15

무한계단육면체 / 박수현

무한계단육면체 / 박수현 계단들이 여기저기 장마 끝 푸성귀처럼 웃자라고 있다 무릎에 철심을 박고 나사를 조인 뒤부터 계단을 밟는 게 허공을 밟는 듯 오금이 저린다 돌아보면 세상은 계단의 참혹한 식민지다 동네병원부터 지하철 마트며 뒷산 산책로까지 나는 밀실에 숨은 채 등사기를 돌려 전단지를 찍는 비장한 레지스탕스는커녕 식민지의 적자(赤子)가 되어 무참하게 굴복한다 난간에 기댄 채 심장이 간이 마구 오그라드는 듯하다 그러니까 정작 복합골절을 당한 쪽은 무릎이 아니라 내 애먼 심장이나 간 어디쯤일 성싶다 층층 계단 어차피 계단 삐꺽 계단 다짜고짜 계단 나는 계단을 오르는지도 내리는지도 모르고 계단참에 껌딱지처럼 물끄러미 달라붙은 채로 서 있다 나는 무작정 펼쳐진 악보의 참 서러운 도돌이표가 된 게 틀림없다 여..

좋은 시 2024.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