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1/06 3

어린 날의 초상/문혜영

어린 날의 초상 문혜영 우리 가족은 이북에서 살다가 1·4후퇴 때 월남하였습니다. 피난 오면서 아버지를 잃고 또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 남은 사람은 어머니와 올망졸망한 우리 네 자매뿐이었습니다. 사선을 넘으면서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어려웠던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 주먹으로 어느 도시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곳의 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방 한 칸 마련할 수조차 없었던 우리의 처지를 생각했음인지 학교에서는 관사에서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말이 관사지 방이 둘, 부엌이 둘 있는 작은 일본식 집이었습니다. 그나마 방 하나는 숙직실로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방 하나만을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집이 눈에 선합니다. 방과 후면 ..

좋은 수필 2024.01.06

지난 11월에는... / 김훈

지난 11월에는... / 김훈 나는 자연사한 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숲 속의 그 많은 새들이 어디로 가서 죽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내 창 앞 모과나무 가지에서 우는 새도 내가 모르는 어디론지 가서 죽을 것이다. 겨울 철새들은 11월에 날아온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오는 겨울 철새들이 시베리아로 돌아가서 죽는지, 을숙도에서 죽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을숙도 갈대 숲에 새들의 시체는 없다. 그러므로 시베리아의 전나무 숲속에도 새들의 시체는 없을 것이다. 새들은 올 길 갈 길에 하늘에서 죽어서 바다로 떨어져 내리는 것인가. 새들은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면서 날아오고 또 날아오지만, 새들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자연사한 벌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여름 풀밭의 그 많던 벌레들은 다들 어디로 가서..

좋은 수필 2024.01.06

으짜꺼시냐 / 정지민

으짜꺼시냐 / 정지민 격월로 초등학교 동창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그날은 일부러 치과원장인 정훈이의 옆자리에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정훈아, 어제 친구들이랑 채석강에 놀러갔다가 말이지... . 엿장수가 엇따, 엿 먹어라! 하면서 길을 막고 공짜 엿을 내미는 거야. 덜컥 받아먹다가 어금니 쪽 땜질한 금니빨이 그만 쓸려나왔어.” 나는 손가락으로 입속을 가리키며 정황을 얘기한 후 내일 그의 치과병원에 들르겠노라 했다. 어릴 때부터 코부랭이에 욕쟁이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는 마시던 술잔이 든 손을 훼훼 저으며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야! 무슨 소리? 너희 동네엔 치과 없어?” 아는 사람 오면 귀찮기도 하거니와 오늘밤 술을 실컷 마실 것인즉 손 떨려 치료 못한다는 것이다. 토악질이 유독 심해 치료 받을 때 의..

좋은 수필 2024.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