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1/05 4

잉아/이상수

잉아/이상수 날실을 걸자 베틀 위로 흰 강물이 흐른다. 수백 겹 가닥이 물결이 되어 잔잔한 파문을 만든다. 잉앗대가 위로 들려지고 그 사이로 씨실을 넣고 바디를 조여 베를 짜기 시작한다. 덜그럭 탁, 덜그럭 탁, 어머니는 한 척의 돛단배처럼 밤늦도록 강물 위를 덜컹거리며 떠다닌다. 잉아는 베틀의 부품이다. 날실을 한 칸씩 걸러서 끌어올리도록 고정해 놓은 굵은 줄을 말한다. 실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날실을 촘촘하게 매어놓은 모양이 마치 국숫발을 장대에 널어놓은 것 같다. 스물하나에 어머니는 동갑내기 남편을 만났다.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학생이던 시동생 둘을 맡기고 입대해버렸다. 오롯이 가장이 된 당신은 병환으로 앓아누워 있던 시모를 비롯한 세 식구를 혼자서 감당하게 되었다. 남..

좋은 수필 2024.01.05

몽당연필 / 최선자

몽당연필 / 최선자 모시 적삼을 생각나게 했던 날씨가 지쳤는지 수그러들었다. 가는 곳마다 솔 향 가득한 강릉, 혼자서 떠나온 이 박 삼 일간의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숙소를 나오자 해변에서 들었던 파도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침 산책길에 만났던 청설모도 눈에 아른거렸다. 문학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좋았지만 자연에 흠뻑 취할 수 있어 더 좋았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행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김시습 기념관을 가기 위해 들렀던 버스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월의 발자국 가득한 얼굴, 닳고 닳아버린 손톱에 눈길이 멈췄다. 순간, 낯선 할머니 손을 덥석 잡고 만지자 마음이 손등을 타고 마음으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그윽한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아! ..

좋은 수필 2024.01.05

이유 / 송혜영

이유 / 송혜영 어찌 저리도 크고 원만하게, 온화한 빛으로 잘 늙었을까. 황혼의 호박을 그윽이 바라보노라니 호박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진다. 살구꽃이 질 때쯤이면 종묘상 앞이나 장터 난전에 모종이 나타난다. 땅이 일 년 농사를 허한다는 신호다. 어서 밭에 가자고 성화를 하는 모종 중에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건 호박이다. 일단 울 밑에 심을 호박부터 챙겨놓고 고추며 가지, 토마토 등속을 보태는 건 호박이 밭작물 중에서 으뜸이어서이다. 호박 모종은 잎이 세 장 정도 나와 있다. 사람으로 치면 갓 젖 떨어진 정도의 어린잎이지만 스스로 생존하기에 모자람이 없이 오롯하다. 용수철 같은 넝쿨은 당장 내 손끝이라도 잡고 올라올 기세다. 어린 저것이 뿌리를 내리고, 땅심을 받아 잎이 무성해지고,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호..

좋은 수필 2024.01.05

누빈다는 것​/조미정

누빈다는 것​/조미정 ​ ​ ​ 한지함 속에서 누비 한복 한 벌을 꺼낸다. 쪽빛 삼회장저고리와 감색 두 폭 치마가 펄럭거리며 강물처럼 펼쳐진다. 시집간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염원과 기도가 박여서일까. 비단 천을 만지작거리자 안팎으로 가지런하게 누벼진 바늘땀이 가슴으로 굽이친다. 누비는 두 겹의 옷감 사이에 솜을 두고 한 땀 한 땀 홈질하여 짓는다. 눈 뜨자마자 시작해서 해거름까지 붙잡고 있어도 한 평 남짓 누빌까. 조급증이 일렁이지만 급한 성질머리를 꾹꾹 눌러 담는다.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뻐근하다. 그래도 누비는 낱장인 천들을 한 장으로 만드는 화합의 침선이다. 누비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몸의 치수대로 마름질한 후 품이 조금 더 넉넉하게 재단한다. 촘촘히 박은 땀이 주변의 천을 물고 들어..

좋은 수필 202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