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1/12 3

윤영 수필 모음

안개에 깃들다 안개 범벅에 사방이 희다. 낙동강이 휘감은 사문의 마을에 닿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십여 분을 걷는다. 이쯤에 돌돔과 광어가 유영하는 수족관이 있는 자리. 저쯤에 치킨 가게와 열쇠가게, 여기 목련과 산수유나무가 있는 자리. 가늠한다는 거. 모름지기 이곳 원주민만의 오랜 관찰과 사유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 어디든 사람 들어 묵고 있을 아파트 불빛들. 먼 바다로 나간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으로 너울거린다. 얼금얼금한 불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한 무더기의 발걸음. 식당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종소리. 사물의 형체는 묻고서 걸음과 종소리가 먼저 도착하는 저녁. 칼날이란 날은 죄다 뭉텅뭉텅 잘라먹고 이도 저도 아닌 흐물거림만 둥둥 떠다니는 섬들 지천이다. 문득 가슴이 ..

좋은 수필 2024.01.12

다듬이 소리/최윤정

다듬이 소리 최윤정 슬하에 육 형제를 둔 시어머님께서는 그 엄청난 빨래감을 혼자서 해내셨다. 내게 힘든 일은 안 시켰지만 푸새질만은 반드시 내가 시어머님 옆에 있어야 했다. 이불 홑니는 흰 옥양목이 으뜸이다. 봄 풀은 누그럼해야 되고, 여름 풀은 세어야 하고, 가을 풀은 개가 핥기만 해도 빳빳해진다고 한다. 푸새질 날은 앞줄 뒷줄 흰 흩니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알맞게 마른 빨래를 넓은 대청으로 걷어 와, 빨래보를 깔고 잔손질을 한다. 솔기를 펴고, 실밥을 뜯어내고, 네귀를 맞춰 둘로 접는다. 그것을 다시 접어 들고 어머니와 나는 줄어든 홑니를 양쪽에서 잡아 당긴다. 살짝 살짝, 뒤로 넘어지듯 잡아야지 내 손에서 빨래를 놓치면 어머니가 뒤로 넘어지시고, 너무 세게 잡아 당기면 앞으로 넘어진다. ..

좋은 수필 2024.01.12

종이의 나라/김영아

종이의 나라 김양아 등 굽은 새벽이 낡은 손수레에 쌓아올린 묵직한 산을 끌고 간다 어느날 악몽을 꾼 나무들이 두꺼운 종이상자로 변신해 차곡차곡 포개진다 소비를 즐기는 도시는 끊임없이 포장을 벗겨낸다 택배는 쌓이고 박스의 접힌 각이 풀리고 모서리가 무너진다 바깥으로 밀려나 독거노인과 한 묶음이 된다 종이의 나라 그들만의 거래처는 치열하게 움켜쥔 밥줄이다 구역은 쉽게 얻을 수도 없고 내주지도 않는다는 게 그들 사이의 불문율, 땀 한 되에 60원을 쳐준다는 종이박스는 앞 다투어 수거된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로 고단한 노구를 밀어내는 도시 시장골목과 상가를 돌아온 새벽이 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저 아찔함, 다급한 클랙슨이 바퀴를 밀어붙인다 발품을 팔아 엮은 오늘의 노동이 기우뚱거린다 질경이의 꿈 임경묵..

좋은 시 2024.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