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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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을 위한 묵상/서영희

쓸쓸함을 위한 묵상                                                                                                    서영희  6월은 봄도 아니요. 여름도 아닌 계절이다. 푸르게 물들어 가는 세상이 싱그럽긴 하지만, '잔인한 4월'이니, '계절의 여왕'이니 하는 화려하거나 달착지근한 수식어도 없다. 좋게 말하면 무던한 달이고 나쁘게 말하면 나른하고 무미건조한 달이다. 그저 여둣빛 여린 잎들이 말없이 초록으로 짙어갈 뿐이다. 그런 6월의 오후 4시는 더더욱 어중간한 시간이다.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고, 마무리를 하기엔 너무 이르다. 이떄쯤이면 직장에 적을 둔 사람이나 집에서 살림을 하는 사람이나 약간은 심심하고 지루..

좋은 수필 2024.08.28

벽지를 바르며 /김해남

벽지를 바르며 /김해남 벽지를 바르기로 했다. 네 귀 반듯한 양옥도 아니고, 지은 지 삼십 년도 더 된 낡은 한옥 사방 아홉 자 네 칸 방에 벽지를 바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낡은 벽지 위에 살짝 눈속임하듯 덧바른 게 싫어서 오늘은 큰 맘 먹고 묵은 벽지를 뜯어내기로 했다. 켜켜이 숨겨둔 비밀을 들쳐내듯 벽지를 뜯어낸다. 한 겹 한 겹 방바닥에 나동그라지는 벽지 조각들. 십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한 방 거처를 해 온 살가운 정 때문일까, 미세한 한 점의 먼지도 내 몸에서 떨어져나간 부스러기처럼 느껴져 왠지 애틋하다. 낡은 조각들은 치워 버리면 그뿐이지만 갈팡질팡 했던 시간들은 고스란히 남아 나를 짓누른다. 내 삶 곳곳에 남은 권태, 또는 이기심도 쌓아 두면 이렇듯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

좋은 수필 2024.08.28

달궁에 빠지다/박일천

어스름 구름 사이로 달이 얼굴을 내미는가 싶더니 서산마루에 걸렸다. 새벽공기를 가르고 계곡 물에 세수하였다. 청아한 기운이 가슴까지 흘러내린다. 밤안개에 묻어온 운해는 산봉우리를 가리며 하늘과 경계를 지운다. 검푸른 능선 자락이 점점 뚜렷이 다가온다. 태양이 대지를 정복하기 전에 계곡 탐사 길에 나섰다.어제 지리산에 텐트를 펼쳐 집 한 칸 뚝딱 지었다. 해거름에 근처 골짜기로 내려가 여울물에 발을 담그니 한낮의 더위가 단숨에 녹아내렸다. 넓적 돌에 앉아 윤슬로 일렁이는 물을 고즈넉이 바라보았다. 산굽이를 따라 이어진 계곡 물의 끄트머리는 어디쯤일까. 시선이 미치는 골짜기 언저리는 산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텐트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눈을 떴다. 지난밤 산책하러 숲길을 나섰으나 어둠에 묻혀 제대로 보지..

좋은 수필 2024.08.23

물체주머니의 밤/김지녀

물체주머니의 밤보이는 것을 집어삼키기 위해내 몸의 절반은 위가 되었다 가끔헛배를 앓거나묽어진 울음을 토해냈지만송곳도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내벽의 주름들은쉴 새 없이 움직이며굶주린 항아리처럼 언제까지나 입을 벌리고 있다 안쪽으로 쑥, 손을 넣어 악수하고손끝에 닿는 것들을 위무하고 싶은, 밤나는 만질 때에만 잎이 돋는 나무 조각이거나따뜻해지는 금속에 가깝다내 안에 꽉 들어찬 것은 희박하고 건조한 공기기침을 할 때 튀어나오는 금속성 소리날카롭게 찢어진 곳에서, 푸드득 날아간 새는 기침의 영혼인가한 문장을 다 완성하기도 전에소멸하는 빛과 밤, 사이에서나는 되새김질을 반복했다, 반복해도소화되지 않는 나의 두 입술사물들의 턱뼈가 더욱 강해진다밧줄처럼 허공에 매달린 나는 공복이다김지녀· 2007년 「세계의 문학」 데..

좋은 시 2024.08.18

시간의 무늬/김훈

시간의 무늬/김훈 시를 쓸 수 없는 나는, 어떤 시인이 그 뻘밭에 새겨진 시간의 무늬를 시로 써 주기를 바란다. 실체가 주는 치매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나는, 실체 앞에서 언어를 그리워하고, 언어 앞에서 실체를 그리워한다. 나는 해독되지 않는 시간의 그림자를 버리고 다시 언어 쪽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 편이 훨씬 더 아늑하고 편안할 것이었다. 그 여름에 나는 최하림의 새 시집 「풍경 뒤의 풍경」을 읽었다. 최하림의 시들은, 내가 그 시들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 시들이 나에게 흘러들어온 것처럼 내 마음에 스몄다. 최하림의 시들은 시간의 본질을 말하지 않는다. 최하림의 시들은 시간의 실체에 닿을 수 없는 격절감을 쓰라리게 토로하지도 않는다. 최하림의 시들은 그 격절감이 주는 거리를 거리로서 긍정하면서, ..

좋은 수필 2024.08.18

열대야의 지구 독법 /허은규

열대야의 지구 독법  /허은규   열대야라는 단어를 들으면 서울이 커다란 세숫대야이고 그 속에 물이 출렁이듯 열기가 고여지는 상상을 한다. 켜져 있는 가로등, 거리 가득한 간판의 불빛들마저 죄다 열기구로 보이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땀을 훔치면서 “한국도 이젠 사계절이 아니라 여름, 겨울의 두 계절이야”라고 푸념을 쏟을 때 어김없이 폭염은 찾아왔다.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청계천과 합류하는 정릉천의 물가엔 메리야스만 입은 채로 장판 위에 앉은 아저씨가 휘적휘적 부채를 부치고 있다. 그 옆에는 몸매가 푸근한 아주머니가 슬리퍼도 벗지 않은 채 누워서 들척이고 있다. 은박지 장판 위에 누운 모습이 꼭 임연수어 굽는 모습 같다.  한낮의 더위는 톰슨가젤처럼 도로 위를 파닥파닥 뛰어다녔고, 저녁에 열기는 습지의 악어..

좋은 수필 2024.08.17

그 남자 이야기 / 김희자

그 남자 이야기 / 김희자    ​  기도 같고 통곡 같고 절규 같은 비가 내린다. 누가 이 구불구불한 생에 주석을 달 수 있단 말인가. 버리고 싶은, 돌아보고 싶지 않은 쓰라린 기억들이 모여 인생이라는 그림을 만든다.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했다고 참된 삶을 그리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통보다, 통증보다 더 잔인한 한 남자의 마지막 생을 보았다. 젖은 도로 위의 차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질주하지만 나는 장례식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섰다. ​  조등이 걸린 저 안에서 그 남자가 영원히 잠들어 있다. 슬픈 날에는 눈을 감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울고 나면 나는 바닥을 본다. 모두 죽었거나 사라진 곳이 바닥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육신이 짜낸 눈물이 바닥에 뒹군다. 상처를 안으로 들이는 것들은 소리가 ..

좋은 수필 2024.08.16

죽 쑤는 여자 / 남태희

죽 쑤는 여자 / 남태희     “이것 좀 먹어봐 동서, 어서” 도리질 치는 내 입에 억지로 숟가락을 넣었다. 며칠째 물만 마시고 있던 내게 형님은 울 듯한 표정으로 다그치고 있었다. 멀리서 녹두죽 한 냄비를 쑤어 달려온 정성과 진정으로 걱정하는 눈빛을 보면서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껄끄러운 입안에 부드러운 죽 알갱이들이 퍼져갔다. 슬픔의 덩어리들을 꾸역꾸역 같이 삼켰다. 어린 것을 잃고 널브러진 스타킹처럼 누워 있던 난 그날 이후 다시 얼어서고 있었다. 죽은 곡물 음식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쌀, 보리, 녹두 등의 곡물에 물을 대여섯 배 부어 무르게 만든 음식이다. 오래 끓여 부드럽고 무르게 된 음식이기에 정상인보다는 기력이 쇠한 환자가 먹기에 좋다. 이렇게 고마운 음식이건만 죽에 관한 속담은 그..

좋은 수필 2024.08.16

베개 / 엄옥례

베개 / 엄옥례   무언가가 나를 부른다. 남편 쪽으로 손을 뻗으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음만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깨어난다. 길게 한숨을 쉬고 가슴을 쓸어내려도 놀란 심장은 가라앉지 않는다. 옆을 바라보니 휑한 기운만 감돌고 베개만 덩그러니, 내 곁에 남편이 없음을 알린다. 남편과 부부의 연을 맺을 때,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조건이나 배경은 그다지 따지지 않았다. 그저 베개 하나에 머리를 맞대고 같은 꿈을 꾸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외모는 달라도 남편과 나는 지향점이 비슷했다. 그래선지 이불 한 겹에 베개 하나일지라도 원앙금침이 부럽지 않았다. 꽃잠은 봄날처럼 달콤했다. 시간이 흘러, 사랑이라는 마취가 약효를 다하자 하나의 베개에 두 사람의 머리를 얹는 게 점점 불편해지기..

좋은 수필 2024.08.16

잠은 힘이 세다 / 권현옥

잠은 힘이 세다 / 권현옥아직 안 자도 되는 시간이구나. 저렇게 불빛이 찬란하잖아.거실로 나가 보았다. 앞 동의 불빛이 띄엄띄엄 살아 있다. 불이 꺼진 창은 벽이 되었지만 편해 보였고 부러웠다. 창이 살아 있는 집을 보면 반가우면서 위안이 되었다. 하루의 끝을 잠에 밀어 넣고 어제와 오늘의 선을 긋고 싶은데 배턴 터치가 순조롭지 않다. 손을 뻗어도 잠이 받아주질 않는다. 괜스레 불안한 호흡, 터덜터덜, 급기야 의욕도 없이, 그러다 앞 동의 불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아직 안 자도 돼.잠이 쏜살같이 달려와 낭패를 봤던 시절은 젊었을 때다. 형편없는 체력은 잠에게 참패를 당했고 ‘코끼리나 말처럼 두세 시간만 자도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라며 욕심을 채우지 못한 일상을 잠 때문이라며 아쉬워했다. 잠을 ..

좋은 수필 2024.08.15

치목 / 최명임

치목 / 최명임   이날을 위하여 몇 생이나 거쳐 왔을까. 오동의 현신을 눈으로 어루만진다. 열두 현을 퉁기니 하르르 피어나는 만상의 소리, 강물처럼 흘러간다. 뉘 가슴 어드메를 건드려 파문을 일으키려고….  경북 고령에 있는 우륵박물관을 찾았다. 소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 먹먹한 가슴으로 역사의 장을 돌아보았다. 해설사가 뒤꼍에도 꼭 들러보고 가란다. 우륵박물관 뒤꼍에 염천 불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곳에 오동목이 개개의 판목으로 나뉘어 나른하게 늘어서 있다. 서른 즈음에 불려 왔다는 오동목이 하오의 땡볕 아래서 진을 빼고 있다. 일 년 차는 빳빳하게 서서 눈으로만 투덜투덜, 애송이 곁에 삼 년 차가 가탈 부린다. 오 년 차는 그들을 바라보며 싱긋이 웃는다.  오동나무는 본디 목질이 가..

좋은 수필 2024.08.15

노을종이 울릴 때 / 김희숙

노을종이 울릴 때 / 김희숙 그리움으로 노을을 만난다. 도심 한복판 빼곡한 고층 사이로 붉은 조각이 설핏설핏 보이다가 언덕을 벗어나면 그렁그렁 추억이 고인 핏빛 하늘이 안겨온다. 그런 날에는 어디선가 하교를 알리던 종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댕~댕~댕. 소리를 좇아 눈길이 먼저 서쪽으로 달려간다.  도시의 삶에 두 발이 지친 날, 마음을 앞장세워 노을을 찾아간다. 태양과 나란히 달리면 해당화 꽃잎을 간질거리는 갯바람과 자갈 굴리는 파도가 거북바위에 부서지는 서쪽 끝에 가 닿는다. 사람들은 그곳을 영광 백수해안도로 노을길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어디 가나 지는 해는 볼 수 있으련만 해안선 따라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노을 지는 광경을 한시도 놓치지 않는 길이라 얻은 이름일 것이다.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느껴지..

좋은 수필 2024.08.09

복어 / 권수진

복어 / 권수진 ​​거친 난바다에서 살아남으려면과장된 허세가 필요했다덩치를 최대한 크게 부풀려서얕잡아보는 상대의 기를 눌러야만함부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집을 살 때는 대출한도를 늘려서가능한 평수를 최대한 넓히고최소 중형차 이상은 몰고 다녀야만파도치는 풍랑에 맞서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헤엄칠 수 있었다옷을 입거나 밥을 먹을 때에도명품으로 치장하는 기술이 필요했다소문난 맛집에서 인증샷을 누르고유명 로고가 박힌 옷을 걸치고명품 가방 정도는 들고 다녀야만무리에서 도태되지 않았다이래도 저래도 안된다면독기라도 품고 살아야 했다험한 세상에 맞서 죽기 살기로 부딪치며잔뜩 오른 독을 내뿜다 보면혼자라도 건들만한 놈이 없었다시류에 휩쓸려 무리를 이루며 살든, 나 홀로 떠돌며 살든,맨정신으로 사는 세상은 아니었다 ​황태마을 ..

좋은 시 2024.08.04

골목길을 걷다 / 허정진

골목길을 걷다 / 허정진​​​ 골목길은 삶의 자궁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는 골목들. 세상으로 향하는 길은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만들었을까? 햇볕 따사로운 곳에 외딴 집, 먹을거리를 찾거나 말동무를 만나러 걷다 보면 바위를 피하고 냇물을 건너뛰며 작은 길이 만들어졌으리라.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 길 주위로 이웃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져 마을이 되고 세상을 만들어내었다.​골목길은 만남이고 소통이다. 인연을 만들고 관계를 형성한다. 가고 오는 숨 탄 것들의 통로이고 울고 웃는 인생극장의 여백이다. 길목을 지나는 바람의 층계마다 사람 살아가던 흔적과 풍경들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그들만의 이야기와 숨결. 몸짓과 냄새들이다. 과거와 현재도, 미래와 영혼..

좋은 수필 2024.08.04

시간을 읽다 / 박종희

시간을 읽다 / 박종희  시간은 기억의 방이다. 아주 내밀하게 드나들 수 있는 나만의 통로다. 문을 열면 아스라이 멀어져 간 추억이 머물고, 손을 뻗으면 놓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 닿을 듯한 그리움의 곳간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애써 떠올렸던 흔적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오히려 통증만 남겨두는 시간의 속을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지나간 시간을 열면 그리움과 아픔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하루가 다르게 조바심 내던 시간이 마침내 어머니의 손을 놓았다.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지 8개월 만이었다. 단, 1분 만에 생과 사를 정확하게 갈라놓은 시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초침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승에서 어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사흘뿐이다.  한정된 시간은 야속하게도 융통성이 없다...

좋은 수필 2024.07.30

돌꽃/김은주

돌꽃                                                                                                                                                                           김은주 저녁 찬거리를 구하러 길을 나선다. 길을 가다 보면 늘 집 앞 횡단보도 앞에서 내 발길이 묶인다. 붉은 신호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호를 기다리는 내내 내 발치에 와 끄떡이는 그림자 때문이다. 그림자는 움직일 때마다 길어졌다 또 짧아지곤 한다. 지는 해에 그림자는 더 길어지고 내 발등을 덮었다가는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파란 불이 켜졌다. 흑백 건반 같은 횡단보도를 탕탕 튕기며 생기발랄한 미니..

좋은 수필 2024.07.29

‘도’와 ‘또’ 사이/박영란

‘도’와 ‘또’ 사이/박영란    “요즘도 글 쓰세요.”  “아직도 글 써?”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오던 시절이 있었다. 글 쓰는 일은 나에게 맞지 않는 곧 그만둘 일처럼 보였을까. 그냥 가볍게 물어오는 그 인사말 속에 들어있던 ‘도’의 어감은 늘 강조사처럼 들렸다. 마치 ‘아직도 그 남자를 만나니?’ 하는 확인처럼. 만나지 말아야 할 남자를 아직도 만나고 있는 듯한, 현재진행형인 나의 글쓰기에 대해 다분히 회의적인 시선이 담겨있었는지 모른다. 두 권의 책을 내었을 쯤에야 근황에서 ‘도’ 는 사라졌다.   요즘은 도의 환생처럼 ‘ㄷ’하나가 더 붙어 ‘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거듭되는 행위를 나타내는 이 부사가, 로또에 당첨되고 또 당첨된 그런 기염처럼 들렸다면 좋았을 텐데. 네 번째가 되는 책 「책..

좋은 수필 2024.07.29

열무가 있는 여름 / 배혜숙

열무가 있는 여름 / 배혜숙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날씨는 싱싱하다 못해 퍼덕퍼덕 살아있다. 그래서 여름은 밝다. 오만한 하늘이 세상을 굽어보는 날, 열무김치를 담는다. 냉장고 속, 여러 개의 김치통에서 제각기 다른 맛의 열무김치가 익어가고 있는데 시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무청이 생생한 열무를 산다. 씹으면 아삭아삭 상큼한 맛을 낼 것 같은 연한 줄기와 그 줄기에 매달린 파릇한 초록의 잎사귀가 생명의 소리로 나를 부른다. 가지런히 묶여서 좌판 위에 놓여 있는 열무를 보면 생각 없이 두 단을 사고 만다. 열무를 풀어헤치자 식구들이 한심한 듯 쳐다본다. 여름내 밥상 위에 올린 반찬은 거의 열무김치였다. 끼니때마다 열무 비빔밥이나 열무 국수, 심지어는 샌드위치에도 열무김치를 듬뿍 넣어주었다...

좋은 수필 2024.07.28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 국명자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 국명자  봄은 산골짜기에서 맞닥뜨려야 한다. 잠시 들르거나 멈추어 선 길손이어도 안 된다.새벽 미명부터 땅거미 내려앉아 어두움이 짙게 깔릴 때까지, 마루와 마당으로 시시각각 다른 모양 되어 들르는 봄의 미세한 모습들을 눈치챌 수 있는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면 딱 좋겠다. 고샅으로 내달린다 해도 논두렁 밭두렁이 종착지가 되고, 이마에 손 얹어 먼 눈 뜬다 해도 앞산 뒷산 자락에서 멈추는 그런 산골 삶이라면 더욱 좋겠다.자그마한 남향 집, 낮은 울타리 두른 작은 마당에 서 있으면 가만가만 몸 뒤척이기 시작하는 봄의 첫 기척을 듣는다. 나무들을 깨우는 거센 바람은 당당하게 입성하는 봄의 첫 발자욱 소리다. 간단없이 불어대는 그 바람은 냉기와 침묵만으로 일관하던 골짜기가 드디어 기적..

좋은 수필 2024.07.28

곰배 / 정서윤

곰배 / 정서윤    아무리 예쁘게 보려고 해도 볼품이 없다. 뭉텅한 나무토막에 긴 자루 하나를 쿡 박아 놓은 저 물건! 슬쩍 봐도 못생겼고 자세히 보면 더욱 못난이다. 사람이든 연장이든 인물 보고 평가할 것은 아니지만, 못난 건 못난 것이다.나의 어릴 적 별명은 곰배였다. 별명이 곰배인데 사람들은 이름인 양 곰배라 불렀다. 내가 엄마 뱃속에서 이 풍진 세상으로 나올 때 도대체 어떻게 생겼었기에 곰배라는 별명을 얻었을까? 내 기억에 없는 증조할머니께서 저 물건의 이름을 내게 별명으로 붙어주고 세상을 뜨셨으니, 어디 물어볼 곳도 없어 답답할 노릇이다.초등학교에 가서도 이름은 출석부에만 올려놓고 곰배를 명찰처럼 달고 다녀야 했다. 그건 순전히 윗마을에 살던 반장 글마 때문이었다. 글마는 서윤이라는 고운 내 ..

좋은 수필 2024.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