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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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 정서윤

젖 / 정서윤  저만치 걸어가던 어미가 다시 돌아온다. 낳아서 3주 동안 품고 있던 애를 내 품에 내어주고 직장으로 돌아가던 며느리였다. 와서는 누가 제 새끼를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서러운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대더니 잠들어 있는 아기의 얼굴에다 종내는 눈물을 뿌리고 만다. 그런 어미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자 녀석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며느리의 안타까움을 지켜보기가 마음 아팠다. 보다 못한 내가 윽박지르듯 밀어냈다. "내가 잘 키울 테니 걱정 말고 얼른 가거라." 나도 새끼를 낳아 기른 어미인데 그 마음을 어찌 모르랴. 이제 겨우 돌아 나오는 젖을 가라앉히고 생이별하는 어미 심정이 오죽하랴 싶어 가슴이 메어져 온다. 내가 아무리 애지중지한다 한들 제 어미만 하겠으며 영양을 ..

좋은 수필 2024.07.22

외닫이 격자문/전옥선

외닫이 격자문/전옥선아래채가 사람이 살지 않아서 인지 많이 허물어졌다. 할 수 없이 중장비를 불러서 처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집을 허물기전에 외닫이 격자문을 뗐다. 이 문은 할머니의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유품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혼자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만사 음과 양이 있듯이 평생을 해로하기 위해서 짝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문은 짝도 없는 작은 외닫이 격자문으로 태어났을까. 할머니는 그래도 이 문을 무척 아꼈다.   햇빛이 비치는 봄이 되면 할머니는 항상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창호지를 바르셨다. 마루가 있는 쪽의 때가 별로 타지 않은 양문여닫이는 안 하더라도, 축담에서 바로 방으로 들어가는 외닫이 문은 소창같이 깨끗하고 하얀 창호지를 바른다. 그 일은 보기보다 쉽지가 않았다. 먼..

좋은 수필 2024.07.22

은비녀/임 경 희

은비녀/임 경 희     산화된 세월을 건드리면 기억이 환원된다. 습기제거제를 넣으려고 옷장을 뒤적거렸다. 차곡차곡 놓인 옷들의 맨 아래 종이뭉치 하나가 보인다. 제법 도톰하고 길쭉하다. 겉포장을 벗겨 펼치니 수년이 지난 신문의 날짜가 눈에 들어온다. 내용물의 지난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뽀얀 한지로 된 속포장지를 보고서야 외할머니의 유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는 할머니의 은비녀다. 오랜 세월에 은비녀의 색은 변했지만 할머니의 기억은 오히려 또렷하게 다가온다.푸르스름한 여명의 시각, 할머니는 방바닥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긴 머리를 풀어 동백기름을 발랐다. 가르마를 반듯하게 타서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참빗으로 싹싹 빗어 내리고, 쫑쫑 땋아서 말아 올린 후 쪽을 쪘다..

좋은 수필 2024.07.22

가얏고/박시윤

가얏고박 시 윤   바람의 파장에 오동나무 너른 잎이 흔들린다. 빛은 잎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늘로 남겨진 지 오래다. 그늘에 가려진 민초들은 계절마다 고개 숙여 말없이 피고 졌다. 고을마다 바람을 동그랗게 말아 쥔 연보랏빛 오동의 꽃은 올 해도 가뭇없이 피어, 꽃등燈처럼 환하게 켜져 있다. 제 명을 다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아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도 꽃들은 멸망한 나라, 잊혀진 이야기들을 전하려 안간힘을 썼다.홀로 가야천 변을 걷는다. 나는 꽃들이 전해준 전설을 따라 며칠째 끼니도 거르고 가야로 흘러들었다. 꽃들이 최후를 맞으면서까지도 신음하며 읊조렸던 이야기를 찾고 싶었다. 오동나무가 품고 있다는, 멀고도 먼 옛날의 이야기에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천년의 소리는 무엇일까. 세월이 발효된 공명이, 깊은 뜻..

좋은 수필 2024.07.22

참빗 ㅣ신성애

참빗 ㅣ신성애 참빗처럼 촘촘한 햇볕이 내리쬐는 한가로운 오일장이다. 시장을 설렁설렁 한 바퀴 돌아보는 데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길모퉁이를 돌자 유행 지난 중절모자에 헐렁한 윗도리를 걸친 노인이 망연히 앉아 졸고 있다.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깨어난 노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좌판의 먼지를 털어 낸다. 아직도 생의 가운데 자리한 오밀조밀한 잡화들이 가지런히 놓여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검붉은 낙죽(烙竹)이 선명한 빗 하나가 내게 가만히 말을 걸어온다.동네에서 산전댁이라고 불리던 할머니는 곱게 빗은 쪽머리의 정갈한 모습이었다. 물오른 당산나무가 연두 바람에 흔들리던 날, 산골 처녀는 헌헌장부(軒軒丈夫)에게 꽃이 되어 오셨다. 꽃향기에 취한 듯 그믐달은 아스라이 구름 가지에 걸리고 무논의 개구리는 밤새 ..

좋은 수필 2024.07.22

주걱/박은형

주걱 박은형 개망초 흰 머릿수건 사이 여름 오후가 수북한그 집은 가득 비어있다 인기척에 반갑게 흘러내리는 적막의 주름 컴컴한 부엌으로 달려간 빛이삐걱, 지장을 놓으며눈썹처럼 엎드린 먼지를 깨운다 밥상을 마주했던 날들을 배웅한 징표일까남은 것들로는 그림자도 세울 수 없는 회벽그을음으로 본을 뜬 그늘 주걱 하나가 거기,테 없는 액자처럼 걸려 있다 무쇠솥이며 부엌 바닥의 벙어리 주발들눈이 침침한 채 아직 남은 밥 냄새, 만지작거린다누군가와 마주앉아 먹던 모든 첫 밥에는허밍처럼 수줍고 고슬한 기억이 들었을 것이다 선명한 그을음이 빚은 밥 냄새의 화석에서뭉클한 식욕의 손잡이가 돋는다 멀리 수평의 여름 저녁이 이고 오는고봉밥 한 그릇산마루를 지나 평상으로 식구들 불러들인다

좋은 시 2024.07.22

삽/이종섶

삽이종섶    오래 쓰면 쓸수록 뾰족한 그곳이 둥그런 엉덩이처럼 변해가는 삽, 처음부터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삽날은 흙을 갈아엎고 퍼 나르는 동안 닳고 닳아 유순하게 변화되기까지 수없는 세월을 홀로 울며 견뎌야 했다 조금씩 추해지는 표정을 감추려고 찬물로 세수하는 것도 잠시뿐, 쓰레받기로나 쓰이는 늘그막이 되어서야 위협적인 꼭지 부드럽게 깎여 거름더미라도 한 짐 푸짐하게 퍼주고 싶은 착하디착한 곡선으로 변한 것이다 땅을 파면 팔수록 산봉우리 닮아가고 모래를 뜨면 뜰수록 물의 흐름 배워가는 삽 한 자루의 성실한 노동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고 싶은 날, 평생 맞서기만 하던 땅위에 서서 일방적으로 저지른 잘못을 사과라도 하듯 자근자근 눌러보는 삽날의 애교 나의 노년도 저랬으면 좋겠다 싶어 몇 군데 짚이는 곳을..

좋은 시 2024.07.22

문 / 엄정숙

문 / 엄정숙     닫혀 있는 문안에서 나는 고립된 하나의 섬이 된다. 차미 적지에서 살아 나온 패잔병처럼 숨을 죽이며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다. 그런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다람쥐 쳇바퀴 글리듯 매일 하는 일을 해치우고 나면 개운함도 잠시, 별의별 생각으로 탄력 없는 거미줄을 짜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그러다 낮잠이라도 설핏하게 들면 몽골의 기마병처럼 적진을 뚫고 다니는 꿈을 꾸기도 한다. 문밖의 일들이 궁금해지면 창문을 열고 바람과 햇살을 끌어들이는 게 고작이다. 다들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마음 밖으로까지 뛰쳐나가려고 야단인데 나는 고층 아파트의 적막 속에서 물고기처럼 잠수나 하고 있다. 문득 종일토록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는 문을 본다.예전에 문밖에서 기다림을 배운 적이 있다. 할머..

좋은 수필 2024.07.22

아버지의 발/고경숙

아버지의 발/고경숙  가을날 오후, 거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따스하다. 햇살을 등에 지고 낮잠을 주무시는 아버지의 야윈 몸이 그림자처럼 고요하다. 짧은 바지 밑으로 드러난 아버지의 발은 까칠하고 거무죽죽하다. 깎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엄지발가락의 발톱 양끝은 살 속에 깊이 파묻혀있다. 살 속을 파고들어가 상처를 만드는 발톱이 문득 아버지의 피폐한 정신세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딱딱한 발톱이 살 속에 상처를 내는 것에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곤한 잠에 빠져있다.아버지의 정신은 지금 어디쯤에 멈춰있는 것일까. 부처님 귀처럼 생긴 오른쪽 귀가 베개에 눌려있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편안해 보인다. 아버지의 머리를 바로 놓아드리고 나는 아버지의 손등을 훑어본다. 창백해 보이는 손등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져 있다...

좋은 수필 2024.07.22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김지희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 김지희 한잔 노동이 넘실대는 부엌에는여자의 일생이 부조되어 있다 엄마 허벅지 베개 삼아 달게 잠들었던 소녀시절이캄캄해 보이지 않는 새벽 어스름잠든 아이의 꿈자리를 지나슬그머니 부엌에 나가 불을 켠다문득 완전한 어둠 속에 던져졌던 세상 한 곳이 환하다옹이 박힌 가슴으로 숭숭 새는 물소리를 잠근다부엌 속에 갇혀 맵고 짜고 달고가끔 바삭바삭 타는 소리 너머나는 세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나온존재하지 않은 가을이었다부엌에 앉아 작은 상을 성좌처럼 펴고나의 언어를, 별을 찾다가 웅크린 어깨선이어느 파도에 부딪혀 무너지는지 속이 거북하다살다 남은 시간을 쪼개고찬 손을 비비고싱크대 속에 갇혀 몇 년째 속앓이 한 냄비를 닦고예리한 어둠에 그을린 낯선 도시를 헹구며깊은 수심(水深) 속에 기..

좋은 시 2024.07.22

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정영선

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   정영선   눈물 빠지게 불린 콩알들 뚫린 시루에 주르르 붓고 검은 보자기 덮는다 콩알 자존심 상한다   자라목처럼 안주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 슬픈 습관을 두드려 부수느라 퍼부어지는 물줄기 돌풍, 돌풍 세상 밖에서는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데 콩알 속 허물어져야 할 일 허물어지는 일만 남는다 저리 깐깐한 침묵을 버틴 콩 껍질을 후딱 날리는 모자처럼 들고 검은 보자기 씌운 막막함을 대못같이 밀어올리고 사랑은 눈부시게 노오란 해를 한 덩이씩 이고 나올 날 그대 속에도 잠재해 있을 저 힘 기다리느라 나는 질겨지고 있다

좋은 시 2024.07.22

덤불설계도 / 정정례

덤불설계도 / 정정례  가을덤불은 어둑한 그늘도 이사 간 빈 집이다찬바람만 들고 나는 곳햇살이 똬리를 틀던 뱀을 따라하고 있다푸른 부피가 다 빠진 덤불을 보면 봄과 여름이 이사 간 빈 집 같다흘리고 간 꽃잎 몇 장.빛바랜 잎사귀 몇 개 매달려있다 뼈대만 앙상한 것 같지만 사실 줏대 없는 것들끼리 지탱할 수 있는 유용한 설계도다.그래서 봄에 꽃 필 때도 네 줄기 내 줄기 찾지 않는다. 굳이 따지고 내려가면 꽃피는 계절이 훌쩍 떠난 뒤에 엉킨 줄기를 헤집고 확인할 필요가 없는 덤불. 잘 못 건드리면 주저앉을 수도 있는 것들. 가만히 두어도 제 자리를 지켜내는 질서가 정연하다 휘어지고 얽힌 집에 남아있는 것은수북이 쌓인 흔적들이름을 찾기에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때가 되면 스스로 호명을 한다.색색이 문패..

좋은 시 2024.07.22

물두멍 / 송옥선

물두멍 / 송옥선     항아리에 귀를 바짝 대 본다. 몸 전체를 열어 색색 고르게 쉬는 숨소리가 들린다. 베란다 한쪽 구석에서 묵묵히 쓰일 때를 기다려 온 배가 둥그렇게 부른 두 개의 항아리. 장독을 제대로 갖추어 놓을 수도 그 항아리를 놓아둘 부뚜막도 딱히 없는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에서 이 두 개의 항아리는 그동안 식구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항아리를 굳이 가보처럼 끌고 다니기를 고집하는 나도 그동안 쓸모로만 따지자면 우리 집에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우기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사를 할 때면 귀중품이나 되는 것처럼 특별 대우를 하며 옮긴 까닭은 그 항아리에 의존해 살던 내 유년이 의식의 안쪽에 선명히 박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항아리를 떠올리며 ..

좋은 수필 2024.07.22

곁/김혜주

곁/김혜주  되돌릴 수도, 늦출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시간은 항상 나를 애태우게 한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도 가뭇없이 휘발되는 그것은 나의 얕은 기억 속에만 쌓인다. 스치듯 빠져나가 버리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쓸 때마다 나는 ‘곁’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불안이 조금 누그러지고 왠지 겨드랑 안쪽으로 끼어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802호 할머니가 실버타운으로 입주한다고 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나누던 이웃이었다.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작별 인사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반갑게 할머니를 껴안았다. 등이 굽은 할머니는 두 팔을 나의 겨드랑이 사이로 휘감은 채 등을 다독여 주었다. 수줍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동안 한 꺼풀의 ..

좋은 수필 2024.07.19

그릇을 읽다 / 강표성

그릇을 읽다 / 강표성   시간의 지문들이 쌓였다. 침묵과 고요가 오랫동안 스며든 흔적이다. 때깔 좋던 비취색이 누르스름한 옷으로 갈아입어도 처음 품었던 복(福)자는 오롯하다. 홀로 어둠을 견딘 막사발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고인 시간이 주르르 쏟아진다. 한때, 골동품에 마음이 기운 적 있다. 눈요기라도 할 겸 옛 물건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건 고향 집의 그림들을 털린 후에 생긴 버릇이다. 우리가 도시로 이사한 후 누군가 사랑채의 그림들을 귀신같이 도려내 가버렸다. 이에 눈 밝은 큰집 오빠가 쓸 만한 물건들은 서울로 옮겼다는 소식이 뒤따랐고, 한참 뒤에야 시골집에 내려간 나는 살강 한쪽에 엎어진 그릇 하나를 품고 왔을 뿐이다.무시로 쓰던 막사발 그대로다. 이름 있는 도자기도 아니요, 대를 뛰어넘을 만큼 햇수..

좋은 수필 2024.07.18

항아리 우물 /이삼현

항아리 우물 /이삼현 고향집 곳간에는 커다란 쌀독 하나가 있었지요바가지를 든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퍼 올리던 우물이었지만 늘 말라 있었습니다 어둠을 뚫고 피어나는 연꽃 송이처럼 발그레 동창이 물들 즈음 바닥 긁는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빠지면 풍덩 잠길 우물 앞에서 까치발을 들고 공손히 허리 숙여 깊어진 어머니한 톨이라도 더 식구들을 먹일까고대하는 목마름으로 바닥을 훑곤 했습니다한껏 퍼 담고 싶은 바가지와 맨 바닥이 만나 지르는 비명몇 톨 남은 알곡들이 참새 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짹짹거렸습니다 언제 적 끊긴 물길더는 샘솟는 우물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아홉 식구의 공복이 피가 나도록 긁고 또 긁었습니다  가을 한철, 겨우 차고 넘쳤을 항아리 우물아무리 퍼 담아도 한 바가지 어둠한 바가지 소..

좋은 시 2024.07.18

시간과 강물/김훈

시간과 강물/김훈       나는 194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6‧25 전쟁이 나서 엄마 등에 업혀 부산으로 피난 갔고, 부산에서 자라서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은 잿더미가 되었다. 학교에는 건물이 없어서 미군이 지어준 천막 교실에서 수업했다. 해마다 보릿고개에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고 관공서 건물에는 ‘기아 퇴치’, ‘절량농가 근절’, ‘식량 증산’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여름에 큰비가 와서 한강 물이 불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마포구 망원동 쪽 한강으로 물 구경을 나갔다. 한강은 물이 가득 차서 출렁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강은 힘차고 거침없었다. 아버지는 상류 쪽을 바라보았고, 멀어서 흐려지는 하류 쪽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

좋은 수필 2024.07.17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김훈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김훈        나는 인쇄된 나의 글을 읽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한 생애가 강물 같이 흐름을 이루지 못하고, 파편으로 부스러져 있다. 삶을 구겨 버리는 그 무질서가 아무리 진지하고 순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려는 과장된 어조와 단정적 서술을, 이제 견디기 어렵다. 책값을 내고 이걸 사서 읽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이 자학적 수치심은 오래된 고질병인데, 증세는 악화 중이다. 사유의 바탕이 성립되지 않거나 골조가 허술하거나 전개가 무리하거나 애초부터 쓸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매문賣文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형용사나 부사 같은 허접한 것들이 문장 속에 끼어들어서 걸리적거리는 꼴들이 역겹고, 그런 허깨비에 의지해서 몽롱한 것들을 표현하려 했던 나 자신이 남사스럽..

좋은 수필 2024.07.17

보통의 언어들/김이나

관계의 언어​연인 사이에 사랑의 속성 중 하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건 빈 곳이 느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이곳이 당신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은 소유할 수 없다지만, 어쩔 수 없이 소유하고 싶어지는 얄궂은 마음이 사랑이다.​'좋아한다'는 감정은 반대로 조건이 없다. 혼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마음 한편이 시큰해지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게 없다. 해가 좋은 날 널려진 빨래가 된 것처럼 뽀송뽀송 유쾌한 기분만 줄 수 있는 건 '좋아하는 사람'이다.​내가 '좋다'라는 마음을 귀하게 보는 데는 이 감정이 가진 실시간성과 일상적임에 있다. 우리는 '좋다'는 말을 언제 하는지 떠올려보면 실시간성이라는 말이 무언지 이해가 갈 것이다. 친구랑 공원에 앉아 기분 좋은 바람을 맞을 ..

좋은 수필 2024.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