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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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사는지 모른다/황인숙

골목이 사라지자 구멍가게가 없어졌다.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편의점이 생겼다. ‘시다’가 하던 일을 ‘알바’가, 덤 대신에 ‘1+1’이, 외상은 신용카드가 몰아냈다.그 많던 단골집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당·빵집·과일가게·정육점·전파사·양장점·문방구…. 간판이 떠오르지 않는가. 락희슈퍼·서울사진관 같은 가게 이름도 불러보자.주인장 얼굴과 가게 안팎이 눈에 선할 것이다. 모든 단골집에는 적어도 두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오래된 주인과 오래된 자리(장소)다. 그래야 단골이 생긴다.황인숙의 시에서 단골은 단골이 아니다. 알바는 점주(店主)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에서 단골은 소비자다. 오직 구매력으로만 인정되는 소비자. 우리는 언제나 소비자이고 가끔 생산자다.알바는 또 누구인가. 간혹 명찰을 달고 있지만 그..

좋은 시 2024.09.27

별표 전파사 / 박진형 作

유홍준의 시와 함께] 별표 전파사 / 박진형 作  그의 전파사에는 수선되지 않는 시간이 흐른다세 개의 별과 금빛 별이 반짝이던 시절부터별을 수리하던 그는 오늘도 별의 안부를 묻는다  떨어진 별들이 다시 운행하기를 기다릴 때이들은 한 음계씩 타고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사내의 회로계를 거치면 비밀은 드러나  전파사는 별들의 무덤에서 별들의 자궁으로 변했다그의 드라이버만 있으면 별들은우주 어디든 다시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그의 은하수를 건너 새로운 별로 이주할 꿈을 꾸었다별똥별이나 혜성은 그의 전파사를 기웃거렸다마모된 공구함과 칸칸이 채워진 낡은 부속품들은 오랜 친구하늘에서 노래하는 별들 속에 그의 체온이 남아 있다점점 사라지는 별들과 새롭게 태어나는 별들 사이에서그의 전파사는 종종 기우뚱거린다어떤 별도 들르지..

소소한 이야기 2024.09.27

몸살/김선우

몸살             - 김선우  나는 너의 그늘을 베고 잠들었던 모양이다.깨보니 너는 저만큼 가고.나는 지는 햇살 속에 벌거숭이로 눈을 뜬다.몸에게 죽음을 연습시키는 이런 시간이 좋아.아름다운 짐승들은 떠날 때 스스로 곡기를 끊지.너의 그림자를 베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지구의 시간.해 지자 비가 내린다바라는 것이 없어 더없이 가벼운 비.잠시 겹쳐진 우리는잠시의 기억만으로 퍽 괜찮다.별의 운명은 흐르는 것인데흐르던 것 중에 별 아닌 것들이 더러 별이 되기도 하는이런 시간이 좋아.운명을 사랑하여 여기까지 온 별들과별 아닌 것들이 함께 젖는다.있잖니, 몸이 사라지려 하니내가 너를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는 걸알게 된 날이야.알게 될 날이야.축복해.  시집 『녹턴』(문학과지성사, 2016) * 김선우(..

좋은 시 2024.09.25

풍경소리 / 김 학 명

풍경소리 / 김 학 명  땡∼땡 땡그랑. 땡∼땡 땡그랑.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산허리를 돌아 산사로 내려 앉으면 풍경이 흔들리며 맑고 경쾌한 소리를 굴려 놓는다.산내음이 그윽한 마알간 공기를 살며시 가르는 그 소리는 들을 때마다마음을 밝게하고 편안하게 한다. 햇빛을 받은 이슬방울이 영롱해진 모습으로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라고 할까 고요하고 신비롭다.맑은 마음,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속의 눈에서 벗어나 참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가진 풍경은 언제나 마음속의 깨우침을 두드린다. 산사는 늘 그렇게 마음을 끌어 안는다.   산사에서 소리를 내는 사물(종, 북, 운판, 목어)은 인위적으로 힘을 가해야 하지만 풍경은 그런 울림을 원하지 않는다. 종처럼 장엄하거나 북처럼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좋은 수필 2024.09.25

징 / 김규인

징 / 김규인  장인의 눈이 가마 안을 응시한다. 가마 안에 넣은 쇳물이 끓으면 색깔로 온도를 가늠한다. 저울에서 주석과 구리의 무게를 달아 가마에 넣는다. 떠오르는 이물질을 바가지로 걷어내고 쇳물 한 바가지를 떠서 틀에 붓는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듯 구리에 주석을 더하면 새로운 금속이 잉태한다. 놋쇠 덩어리인 바대기를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한다. 뜨거운 불을 가하여 놋쇠를 길들일 수 있다. 바대기가 벌겋게 달면 가마에서 꺼내 모루 위에 올린다. 바대기를 돌려가며 두드리는데, 원하는 모양이 될 때까지 가마에 넣었다가 꺼내어 메질한다. 메질하다가 다시 열을 먹이면 바대기는 고분고분 해진다. 장인이 어떻게 두드리는가에 따라 바대기는 작은 꽹과리가 되고 큰 징이 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열기로 뜨겁다. ..

좋은 수필 2024.09.25

받침, 그 위 / 최명임

받침, 그 위 / 최명임    어느 씨족의 씨방에서 빠져나와 저의 왕국을 세웠을까. 바람도 지치는 변방에 홀로 피었더라면 멍이 들었을 꽃이다. 무리를 이끌고 봄의 뜨락에 흐벅지게 피었다. 꽃은 제 모습에 반해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나는 꽃들의 하느작거림에 벌겋게 취기가 오른다. ​ 개양귀비가 붉은 깃발을 높이 올렸다. 아래로 필까, 위로 필까 고개를 내리 꺾고 몇 날을 생각에 잠겼더니. 꽃잎들이 하늘가에서 팔랑거린다. 향기에 취한 바람이 어쩌자고 꽃 속을 누비고 다닌다. 햇살 정원에서 벌이는 꽃들의 왈츠 바야흐로 그들의 우주가 펼쳐진다.​ 그들의 우주는 한 점으로부터 발아하였다. 바람과 비와 산소와 대지의 뭇 요소와 알 수 없는 무수한 입자들과 융합하여 존재의 출현을 예고하였다. 한 점은 현상의 근원이 되..

좋은 수필 2024.09.25

차가는 달이 보름달이 될 때/윤국희

차가는 달이 보름달이 될 때                                                                 윤국희아파트 현관문 앞에만 서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잠시 머뭇거리다가 큰 숨 한번 뱉어내고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아이들이 먼저 알고 뛰어나온다. 막내 얼굴에 그리움이 묻어있었고, 아이들의 눈을 보니 마음이 시렸다. 막내가 안기면서 “엄마, 방금 언니가 나 놀렸어.”, “아이고, 그랬어, 왜 너는 동생을 놀려?” 하면서 일상의 대화를 안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베란다에 가득 쌓여있는 배추들. 앗, 김장이다. 순간 몸이 얼어버려 막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큰딸은 순식간에 차가워진 엄마의 ..

좋은 수필 2024.09.23

도법(刀法)/ 김은주

도법(刀法)/ 김은주  칼끝이 닳았다. 자루를 보니 한창 시절에는 몸피가 제법이었을 칼날이 턱없이 야위었다. 뽀족한 칼끝이 퍼덕이는 전어의 아가미를 내려찍는다. 바다로 돌아갈 듯 퍼덕이던 전어는 일순 잠잠해진다. 할머니 잽싼 손놀림에 물속에 있던 전어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물 빠진 소쿠리로 이동한다. 할머니는 반쯤 내려온 머릿수건을 걷어 올릴 시간도 없이 절명한 전어의 옷을 벗긴다. 은빛 비늘이 할머니 손등에 눈가루처럼 쏟아진다. 전어의 등줄기를 긁어내리는 할머니 손길이 리드미컬하다. 어깨와 굵은 팔뚝을 적당히 흔들 때마다 칼질은 신명이 오른다. 물오른 칼날에 알몸이 된 전어는 다시 소쿠리에서 물이 든 바가지로 옮겨져 배를 연다. 그리고 자신의 속을 토해 낸다. 이때도 여윈 칼끝은 전어 배 가르기에 안성..

좋은 수필 2024.09.22

명왕성 유일 전파사/김향숙 시 모음

명왕성 유일 전파사  흑백 텔레비전에는 명왕성(冥王星)이 들어 있다어쩌면 모든 가전(家電)에도 있는지 모른다 목숨 다하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몫을 못 하는 것이 명을 다한 거라고, 별명이 백과사전인 그 사내 모르는 게 없다 빛나는 지구도 저 없으면 돌지 않는다고 사십 년 기름때 묻은 공구함을 가리킨다 바닥에 엎드려 기술을 익히던 무릎, 생의 페이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달달 외우던 공구들의 이름마다 알파벳이 벗겨져 반들반들하지만 마치 자기 뼈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닷새마다 망가진 것들이 몰려드는 난전(亂廛), 지문이 닳도록 눌러 헐거워진 버튼, 눌러도 빠져나오지 않는 중고 카세트테이프를 어깨너머의 기술로 척척 고쳐낸다 스프링을 갈아 끼우자 사라진 가수를 불러내는 카세트 녹음기, 구성진 노래가 전..

좋은 시 2024.09.22

여백, 삶을 묻다 / 허정진

여백, 삶을 묻다 / 허정진  여백은 간이역이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째깍거리는 시간도 느려질 것 같은 시공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이 잠시 멈추고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는 정적 같은 것, 가마솥의 밥이 끓어 장작을 꺼내고 뜸을 들이는 시간 같은 것, 떠들썩한 목소리들 사이에 누군가의 잔잔한 미소 같은 것. 그래서 여백은 한옥의 툇마루나 음악의 정가(正歌) 같은 여유가 아닐까 한다. 채우기보다 비워서 나는 소리, 단선율의 수평적 음악인 정가를 듣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보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인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여백에는 멈춤과 쉼표가 있다.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이다. 화폭에서 황금분할의 숨겨둔 공간이고, 어깨 힘을 뺀 간이한 행서체 같은 ..

좋은 수필 2024.09.22

권상진 시

접는다는 것 / 권상진 읽던 책을 쉬어 갈 때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홍상수 ..

좋은 시 2024.09.14

거울 속으로 온 손님 / 이대흠(1967~ )

거울 속으로 온 손님 / 이대흠(1967~ )​ 치매에 걸렸던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하셨다 소파 뒤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어서 나를 볼 때마다 아버지를 보았던 소파였다 낡은 초록색 소파는 아버지의 마지막 주소지였다 아버지는 그곳에 자기 생을 다 놓고 앉아서 창밖만 바라보았다​ 어느날이었다​ 끼니때가 되어 아버지를 부르자 아버지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거울 속 한 노인을 발견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서 밥먹읍시다 하지만 거울 속 노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버지가 밥상 쪽으로 올수록 그 노인은 멀어졌다 어허, 자식들이 다 이해하니 같이 가잔 말이오 아버지가 여러번 권했으나, 거울 속 노인은 겸양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손을 내밀면 마주하여 손을 내밀었고, 등 돌려 밥상으로 오면 멀어졌다 그 노인..

좋은 시 2024.09.11

비빔밥 / 이대흠

비빔밥 / 이대흠  비빔밥엔 잡다한 것이 들어가야 한다 싱건지나 묵은 김치도 좋고 숙주노물이나 콩노물도 좋다 나물이나 남새 노무새도 좋고 실가리나 씨래기 시락국 건덕지도 좋다 잘못 끓인 찌개 찌끄래기나 달걀을 넣어도 좋지만 빼먹지 않아야 할 것은 고추장이다 더러 막걸리를 넣거나 된장국을 홍창하게 넣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취향일 뿐 그렇다고 국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엔 여러 가지 반찬과 참기름 고추장이 들어가야 하지만, 정작 비빈 밥이 비빔밥이 되기 위해서는 풋것이 필요하다 손으로 버성버성 자른 배추잎이나 무잎 혹은 상추잎이 들어가야 비빔밥답게 된다 다 된 반찬이 아니라 밥과 어우러지며 익어갈 것들이 있어야 한다 묵은 것 새것 눅은 것 언 것 삭은 것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

좋은 시 2024.09.11

무성서원, 움직이는 서책/허정진

무성서원, 움직이는 서책                                             허석(허정진)    책 읽는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라 했다. 예부터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향기는 천 리, 사람 향기는 만 리를 간다.’라는 말이 있다. 인향(人香)의 싹은 책향(冊香)에서 나온다. 서원은 ‘책의 집’이다. 전통을 계승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배움의 전당이다. 지난 5백 년 조선의 철학과 사상을 관통하던 성리학의 상징적 장소이고, 유가적 이상인 존현양사(尊賢養士)의 실체적 공간이다. 세상에 맛있는 것보다, 눈에 즐거운 것보다 마음에 위안과 평온을 찾고자 할 때가 있다. 나 안의 내가 누구인지, 세상 앞에 흔들리는 마음을 어떻게 다 잡아야 할지 가슴이 답답할 때 선비정신의..

좋은 수필 2024.09.09

꿈틀거리다 - 김승희

꿈틀거리다 - 김승희 어느 아픈 날 밤중에가슴에서 심장이 꿈틀꿈틀할 때도 괜찮아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꿈꾸는 것은 아픈 것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꿈틀꿈틀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김승희 시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꿈을 가진 마음서점의 일상을 요약하자면 ‘고요한 가운데 번잡함’일 것이다.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하루를 보내고 밤이 오면 풀려버린 운동화 끈처럼 맥을 놓아버린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즈음 서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애틋한 동질감을 느낀다. 김종삼의 시 ‘묵화’ 속 할머니와 소처럼 서로의 부은 발잔등을 위로하고 싶어진다.그날 밤 찾아온 학생은 문 닫을 시간을 넘겨서까지 책장 앞을 서성였다. 잠시 후 계산대 앞에 다가선 그는 시집 말고도 작은 ..

좋은 시 2024.09.06

돌멩이들 - 장석남(1965~ )

일러스트=양진경돌멩이들 - 장석남(1965~ )  바닷소리 새까만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책상 위에 풀어놓고읽던 책 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궁금해하노라면,구름 지나는 그림자에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혼자 매인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낮달처럼저나 나나살아간다는 것이,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바닷가에서 주워 온 돌이 몇 개 있다. 까만 돌의 표면에는 물결무늬가 흐르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몽돌이며 모서리가 덜 깎인 돌, 그리고 조각돌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돌로 책장을 눌러놓거나 집 안 살림에 쓰는 물건의 평형을 맞추려고 아래를 받치기도 한다. 그러다 돌이 최초로 놓여 있..

좋은 시 2024.09.06

숲의 정거장 / 곽효환

숲의 정거장 / 곽효환  사람들 드문드문 들고 나는호젓한 시골마을 간이역 철길을 이어백두대간 숲 속 깊은 곳에작은 역 하나 더 지어야겠다간이역과 간이역을 잇는 기차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오고가게 해야겠다 비자나무 가죽나무 굴참나무 측백나무 팔 벌리고작은 짐승들 새들 벌레들 분주함 가득한숲의 정거장엔철커덕 철커덕 쉼 없이 달려왔을 기차도같이 온 바람도 잠시 숨 고르리라플랫폼에 이어진 호젓한 오솔길 따라나란히 흐르는 계곡물에 발 담갔다가단청 고운 절집 탱화아래 앉아잠시 먼 산에 한눈팔아도 좋겠다세상의 시간과 일상이 한동안 멈춰몸 부리고 쉬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작은 역 하나 숲의 양식대로 지어야겠다 빛바랜 회색 기와집 아래 의상실과 세탁소슬레이트 지붕집엔 전파사와 분식집붉은 벽돌집에 포목점과 연쇄점그리고 ..

좋은 시 2024.09.03

시조 모음

가랑잎 자서전​                                                            민진혜​ 등 굽은 지팡이에 몸을 싣는 저물녘나른한 공원 벤치 낮달 함께 앉은 그대숨소리 바스락바스락, 뼈가 닳은 노인이다​ 해를 쫓던 녹음이며 뜨건 비도 쪼개 담아한껏 부푼 정복의 꿈 흙에 도로 뱉어낸다바람이 읽는 판결문 무릎 꿇고 들으며​ 꿈에 기댄 지난날도 돌아보면 아지랑이보풀 같은 겹을 누벼 나이테에 새겨둔 채뒤틀린 뿌리에 안겨 별의 안부 건넨다​                            물풀                                                    백점례  불볕 터진 들녘 너머 풀떨기 못물 아래따라지들 몰려들어 스크럼을 짜고 있다물길이 ..

좋은 시 2024.08.31

출품되는 밤/안정숙

출품되는 밤                                                                                         안정숙  청미래 마을은 100호 규격이다 명도가 지속적으로 밤하늘을 봉인했다왼쪽에서 들여다보면 달이고오른쪽에서 관람하면 창문의 나열이다 망개나무 경사는 거칠다 도시 불빛과 언덕의 어둠이서로 다른 질감이듯처음 본 별이 독특한 빛을 내놓는다 구불구불한 골목들중간 붓처럼 생긴 고랑 본 적 있나요오래된 조도를 소장한 가로등검은 취객의 노래에 흐늑거린다 달빛이 낮은 지붕 사이사이를 칠한다 불 켜진 창문 속두세 걸음 걷던 아기가 주저앉고늦게 귀가한 사내가 젖은 발을 닦고혼자 중얼거리는 노인이 전시되어 있다 너무 낯익어서 모르는 내일 그 밖의 무채색..

좋은 시 2024.08.31

하현달 아래서/김애자

하현달 아래서                                                                                                                                        김애자그이는 하현달 아래서 생의 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희미한 그림자를 앞세우고 천천히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가고 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 직장이란 조직에서 성과 비율에 따른 경쟁과 갈등에서 벗어난 지 25년이다. 그 무방한 세월이 그를 달관시켰다. 어제와 그제, 그리고 오늘과 내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 굴곡 없는 수평적인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는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차이란 결국엔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안다. 부자란 개념도 현재 내가 가진 것보다 더 ..

좋은 수필 202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