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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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탄화 속으로 / 이상수

목탄화 속으로 / 이상수 가로등이 하나둘 목련처럼 피어난다. 어스름이 발묵하는 시간, 먼 산이 먹빛에 잠기고 들녘은 천천히 지워진다. 사각의 창문마다 둥근 불빛이 내걸리면 저녁의 품속으로 사람들이 귀가한다. 해가 넘어가는 이맘때쯤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독이 밀려온다.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계피처럼 아릿하여 멀미하듯 거리를 표류한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과 낯익은 상점이며 형형색색의 간판들. 타인 틈에 섞이면 마술처럼 슬몃 내가 사라짐을 느낀다. 그 가만한 스러짐이 좋아 어둠의 발치에 혼자 서 있을 때가 많다. 프랑스에서는 해질녘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한다. 사물의 윤곽이 희미해져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이란 뜻이다. 이쪽도 아니고 저..

좋은 수필 2024.06.30

시금치 한 소쿠리/공순해

시금치 한 소쿠리/공순해 아는 분이 한 소쿠리 되는 시금치를 나눠줬다. 시장 물건이 아닌 야생 시금치라고 보물 건네듯 은밀히. 2월도 안 된 날씨에 스캐짓 밸리 그 추운 벌판에 가서 캐 온 것이라니 하긴 보통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들여다보니 시금치 꼴이 꾀죄죄하다. 채도 짧고 캐 온 시간이 지났는지 빛깔도 새들거려 볼품이 없다.  게다 난 부엌일을 하지 않는다. 부엌이 없기 때문이다. 하긴 부엌일 하지 않는 사람이 나뿐이랴. 미국 주부 중엔 부엌을 두고도 집에서 요리 안 하는 여자들이 꽤 된다고 한다. 그들은 직장에서 일이 끝나면 어느 곳에 가서 저녁을 해결할까, 인터넷을 뒤진단다. 나야 그들과는 경우가 다르다, 며느리에게 부엌을 내준 탓이다. 일단 물려준 공간은 그 애 소관이다. 한 공간에 주인이 둘..

좋은 수필 2024.06.30

서까래 / 김광영

서까래 / 김광영  가끔 나의 존재를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관공서에서 나랏일한 공적도 없고 기업체를 이루어 사원을 먹여 살린 공덕도 없고, 더구나 후배 양성할 자격도 갖추지 못했기에 내세울 게 없다. 단지 자영업으로 내 가족 건사한 것뿐인데 그마저도 접고 있으니 삶의 의미가 사라진 듯하다. 애완견과 화초를 키우며 자연에 묻혀 지내다 문득 선방 요사채를 불사할 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사찰의 원주보살 소임을 맡고 있었다. 대선사께서 수행하시던 선원에 불사가 시작되자 신도들의 열성은 불같이 일어났다. 대들보는 오백만 원, 기둥은 삼백만 원, 문짝과 상방, 중방, 하방, 값은 일백만 원, 도리 값은 오십만 원이었다. 그에 비해 천정을 바치고 있는 서까래 값은 십만 원으로 매겨졌다. 차전놀이에서 장수를..

좋은 수필 2024.06.30

목변석(木變石) / 정여송

목변석(木變石) / 정여송      몇 천만 년이 아롱져 있다. 침묵이 두껍게 흐를 뿐 어느 한 곳에서도 느슨함이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장구한 세월이 농축된 만큼 단단함의 서슬이 빛을 낸다. 멀리서 볼 땐 영락없는 나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돌덩이다. 손으로 만져본다. 차다. 생각에 잠겨 응시하면 어떤 덩어리의 형체가 다가오고 또 생각을 내려놓고 바라보면 텅 빈 공간으로 펼쳐진다. 경북 영덕을 지나 강구라는 곳. 경치 좋은 해변 도로의 휴게소 같은,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그것들이 모여 있었다. 규화목이다. 광물화된 나무의 유체(遺體). 미라. 제2전시실에는 그것들의 속내를 발가벗기기라도 할 듯이 단면을 매끄럽게 가공하여 전시해 놓았다. 표면에는 쌓인 시간이 눌려져 있고 발자취가 그려져 있으며 기..

좋은 수필 2024.06.30

빈집/김정민

빈집김정민뒤꼍의 대나무 뿌리 구들장을 장악하고들락날락 바람이 돌쩌귀 빠진 문짝을 열고 닫던 집임종도 없이 죽어버린 괘종시계를 떼 내고포클레인 버킷을 들어 올려장승처럼 지켜선 용마루를 누른다꿈 버무렸던 흙벽도, 서까래도병색 짙은 신음처럼 무너진다게으른 골목 깨우던 워낭소리 쪽마루에 걸쳐두고뻐꾹 소리에 피곤 달래던 아버지의 그림자기와, 연목, 대들보에 매달려 버팅기다 내처진다‘원룸 두 동 지으면 끝내주겠다’평평하게 땅을 고른 포크레인 남자의 말끝에언뜻, 오빠 얼굴에 미소가 번졌던가마당가에 쪼그린 아버지, 엄동설한에 어디로 가시나요이승과 저승을 잇는 속울음뿌연 먼지 속에 구덩이를 파는데♦ ㅡㅡㅡㅡㅡ 어떤 집이든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돌보지 않으면 어느새 폐옥이 되고 만다.아버지가 떠나신 뒤로 비워져 있던 집..

좋은 시 2024.06.29

오십견/정용기

오십견​정용기​  이미 생의 중반을 훌쩍 지나버린 거야.그러니까 수평이 무너진 거야. 엊그제까지는오른쪽에만 주로 무게추를 올려놓았던 거오른쪽만 따뜻한 아랫목에서 거두어왔다는 거너는 알기나 하는 거야?왼쪽을 늘 업신여기고 따돌려서 시르죽어 있었다는 거왼쪽은 그늘받이에서 눈칫밥 먹으며 견뎌왔던 거너는 알아챈 적이라도 있는 거야? 왼손으로는 이제 뒷주머니의 비밀도 꺼낼 수 없어.머리 위로 치켜들어 희망을 부를 수도 없어.차마 중심을 무너뜨릴 수 없어서 견뎌 왔던 결기가,왼쪽 견갑골에 숨어있던 저 질긴 울분이이제 기우뚱 트집을 잡는 거야, 파업에 든 거야. 한쪽을 보태거나 덜어내도 소용없어.오른쪽과 왼쪽은 애초에 연대보증을 섰으니갈아엎기 전에는 중심잡기 힘들어.우리 삶에 세월이 자비를 베풀지는 않는 거야.물그림..

좋은 시 2024.06.28

낭만 유랑단​/이잠

낭만 유랑단 ​ 이잠​​ 우리 몽골 가서 살까요 더 가난한 사람 되어 낮에는 평원끝 눈 시리게 말 달려 야생 순록 새끼를 몰고 돌아오는 저녁은 어떤가요 ​ 들판에 누워 쏟아지는 별빛 맨몸으로 받으며 배부른 달과함께 숭숭한 꿈자리 없이 밀린 고지서 걱정 없이 곯아떨어지는 망망한 밤도 괜찮겠지요 ​ 뿌리 내리지 못한 슬픔 같은 거 아픈 꼬리 같은 거 삭제해버리고 끝 간 데 없이 밀리기만 하는 이 땅을 떠나 한데에서 떠돌이로 살아 보자요 ​ 난 여기서도 제대로 못 사네 술이나 한잔 더 하세

좋은 시 2024.06.28

접사(接寫)/ 이잠

접사(接寫)/ 이잠 옛집이 무너져 내릴 때 안방에 살던 거미는 어찌 되었을까밥을 먹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불쑥 생각난다바다도 먼데 희한하게 게를 닮았던 거미사방 무늬 천장에서 대대로 새끼 치며 살았을 털 난 짐승다시 못 볼 사람처럼 나는 자꾸 그놈만 찍어 댔지다시 못 볼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는데숱한 기억들이 은거하던 마당의 넓적돌 밑 쥐며느리 굴닳고 닳은 마룻장에서 쭈뼛거리던 녹슨 못들벽지 안에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던 한숨들침묵 속에서 깜빡이던 별빛들가장 추운 날 저녁의 경쾌한 숟가락질 소리하늘과 땅과 내가 마주 잡았던 온기끝내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 정면에 담지 못하고천장 귀퉁이에 매달린 거미만 찍었지다시 못 볼 것을 알기에 낱낱이 다 아름다웠지집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거미는 어디로 갔을까 (..

좋은 시 2024.06.28

늦게 오는 사람/이잠

늦게 오는 사람 ​​ 이잠​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좋은 시 2024.06.26

풍경에 속다/김정수

풍경에 속다김정수오죽 못났으면허공벼랑에 매달린 배후일까범종도 편종도 아닌 종지만 한 속에서소리파문 파먹고 사는주춧돌 위 듬직한 기둥이나 들보 서까래도 아닌추녀마루 기와등 타고 노는어처구니 잡상만도 못한항상 바람과 놀고 있는 풍경은 무상이려니눈곱때기 창이나 벼락치기 문이려니오죽 힘들었으면죽음 끝에 매달려 살려 달라살려 달라 스스로 목을 맸을까10년 행불 소리 소문 없이 보내고 보니어딘가 끝에라도 매달려 손등 문지르고 싶은숨과 숨 사이진짜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바람에 풍경 들여 불이였음을같은 것 하나 없는빠끔, 원통인 것을

좋은 시 2024.06.26

사소한 혁명/이언주

사소한 혁명이언주 ​​​  콩에서 나물까지 거리를  혁명이라 한다면 혁명의 끝은  보자기만한 하늘을 밀어올리기 위해  남발된 언어를 찾아 헤매는 것  바가지로 퍼붓는 비를 맞는다  시루 안에서 허리 세워야하는 직립이란  빽빽한 절망을 꿈꾸는 일  내가 꿈꾸는 詩  빛이 왜 독이 되는지  내막도 모르는 채  빛을 찾아 고개 쳐드는 족속이었음을    당신에게 고백하여야 하나?  별 없는 검은 하늘이 들썩인다  태를 끊으려는 욕망  부리 속 푸른 혓바닥을 숨기고  벽을 두드린다  지독하게 환해지는 어둠  신열 앓는 발이 가렵다   멋대로 일어서는 미친 발가락들

좋은 시 2024.06.26

남편 /김비주

남편 /김비주    다친 다리로 몸을 욕조에 걸치고 머리를 감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곧은 슬픔 하나가 지나간다 한평생 같이 살면서 그의 슬픔이 무언지 짐작만 하였지 묻지 못한다 꿈 속에서만 키워오던 나의 희망이 너무나 간절하여 그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의 틈새에 이는 바람에 잠시 너스레를 실어본다   괜찮아, 아프지?   종골 두개가 나가도록 그를 짓눌렀던 삶의 무게가 무언지 시간을 넘어선 후에 기민해진다. 모두 각기 슬픔에 갇혀있는지라 슬픔의 뿌리 앞에 송두리째 내주는 날을 만난다 엉성하게 내리는 초겨울의 남도 비 사이로 덜 끓은 육자배기가 지나간다 늘 함께이지만 언제나 혼자인 사람들 속에   새빨간 동백이 자지러진다

좋은 시 2024.06.26

고물사 / 이봉주

고물사  /  이봉주  ​부처가 고물상 마당에 앉아 있다  금으로 된 형상을 버리고 스티로폼 몸이 된 부처왕궁을 버리고 길가에 앉은 싯다르타의 맨발이다  바라춤을 추듯 불어온 바람의 날갯짓에 고물상 간판 이응받침이 툭 떨어진다  반야의 길은 낮은 곳으로 가는 길일까속세에서 가장 낮은 도량, 古物寺  주름진깡통다리부러진의자코째진고무신기억잃은컴퓨터몸무게잃은저울목에구멍난스피커전생과 현생의 고뇌가 온몸에 기록된 낡은 경전 같은 몸들이 후생의 탑을 쌓는다  금이 간 거울을 움켜쥐고 있던 구름이 후두둑 비를 뿌린다뼈마디들의 공음空音, 목어 우는 소리가 빈 병 속으로 낮게 흐른다  오직 버려진 몸들만 모이는 古物寺  스티로폼 부처는 이빨 빠진 다기茶器 하나 무릎 아래 내려놓고 열반에 든다  먼 산사에서 날아온 산새 ..

좋은 시 2024.06.26

아버지의 고무신/염혜순

아버지의 고무신 염혜순  아버지의 고무신은 하얀 배였다. 아버지는 하얀 배를 타고 저녁마다 댓돌위로 올라서시며 큰기침을 하셨다. 그 기침 소리는 온 식구들을 긴장시키는 점호 나팔이었다. 어질러져있던 물건들을 한 순간에 치웠다. 아버지가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이고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 모두는 차렷 자세로 도열하였고 거의 동시에 인사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녀오셨어요!” 아버지는 동그란 안경너머로 집안과 우리를 한꺼번에 훑어보시고는 곧바로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셨다. 아홉이나 되는 아이들 중 누가 빠졌는지 신기할 만큼 빨리도 알아채시곤 모두의 안전을 확인한 후에야 안방을 나가셨다. 아버지가 마루를 지나 건넌방으로 들어가시면 도열했던 우리들 사이에선 안도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길어다 쓰는 물을 ..

카테고리 없음 2024.06.21

애도의 밤 / 최 태 준

애도의 밤 / 최 태 준  형수가 세상을 떠나던 날 밤, 나는 영안실에서 혹시 늦게라도 찾아올 문상객이 있을까 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 형수는 스무 해 남짓 혼자 살아왔었다. 조카들은 영정실을 지키며 눈물을 삼켰고, 나는 접객실에서 차츰 자라나는 슬픔을 매만졌다. 문상객이 뜸해질 무렵, 낯익은 중년부부가 영안실의 마루에 올라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반가움과 함께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영정 앞에 예를 차린 후 내가 있는 방으로 건너왔다. 나는 두 사람을 맞아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오래 뵙지 못한 이모의 돌연한 별세소식을 듣고 달려왔다는 여인은 바로 내 추억 속의 인물이었다. 그녀를 마주 대하자 나는 그녀가 소녀로부터 긴 세월을 달려와 내 앞에 멈춰 섰다는 생각에..

좋은 수필 2024.06.20

안녕, 춘자 고모/이상은

안녕, 춘자 고모/이상은      대구로 가는 완행버스가 돌무리(고향 동네 옛 지명) 앞에 도착하자 보따리를 든 동네 아낙네들이 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고마 다음 차 타소 아지매들. 이러다 터져 죽겠소. 고추 팔아봐야 얼마 된다고.”열 대 여섯 살이나 되었을가 싶은 안내양이 차창 밖으로 목을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그럼 밭에 썩도록 두냐. 이년아.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년이 차장이 벼슬이다. 벼슬. 목구멍에 밥이 어째 들어가는지 모르고. 어서 문이나 열어.”절름발이 율리댁이 안내양의 말을 되받아쳤다.“아지매. 너무 그러지 마소. 나도 고향 가면 아지매 같은 엄마 있소.”버스 문이 열렸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탈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율리댁이 앞장을 섰다. 아낙네들이 힘..

좋은 수필 2024.06.20

늦어도 11월 하순에는 / 김광일

늦어도 11월 하순에는 / 김광일그 날 눈이 왔던가 기억엔 없다. 그보다 난 기억을 믿지 않는다. 기억도 날 믿지 않을 것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서로 배반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기억이 날 배반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지난 사십 몇 년 간의 세월을 지내온 것으로 믿어지는 기억의 총합이겠지만 그 기억은 언제든 나를 배반할 준비가 돼 있었다. 한때 사랑했던 기억도, 절망했던 기억도 청회색 살의殺意의 기억도 매우 불분명한 형태로 나를 따라오고 있다.다시 말하자면 그 날 눈이 왔던가 기억에 없다. 다만 파편화되고 변색된 기억 조각들의 축조물 위에 배반을 게임처럼 설정하고 사귄 관계는 결코 배반의 쓰라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만 남아 있다. 얼핏 말장난 같지만 우리 선대..

좋은 수필 2024.06.20

호롱불 / 황소지

호롱불 / 황소지   이웃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갔다가 응접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옛날 놋쇠 화로와 흰 사기 호롱을 보았다. 단조로운 아파트 생활에서 옛 정취를 느껴보려는 집주인의 생각인 듯하다. 호롱을 본 순간, 보고 싶었던 옛 친구를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듯 반가웠다.지난 시절 고향에는 전기가 없었다. 해가 지고 대지에 어둠이 깔리면 동네에는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졌다. 그때는 호롱불 하나를 켜놓고 그 밑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저녁밥을 먹었고, 그날 일어났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걱정하고 위안을 받았다. 석유를 아끼려고 웬만한 어둠에는 불도 켜지 않았기에 저녁밥도 어둡기 전에 먹어치웠다.집안에 잔치가 있거나 섣달 그믐날이 되면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게 사방에 유리를 끼운 등불을 처..

좋은 수필 2024.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