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6/26 7

늦게 오는 사람/이잠

늦게 오는 사람 ​​ 이잠​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좋은 시 2024.06.26

풍경에 속다/김정수

풍경에 속다김정수오죽 못났으면허공벼랑에 매달린 배후일까범종도 편종도 아닌 종지만 한 속에서소리파문 파먹고 사는주춧돌 위 듬직한 기둥이나 들보 서까래도 아닌추녀마루 기와등 타고 노는어처구니 잡상만도 못한항상 바람과 놀고 있는 풍경은 무상이려니눈곱때기 창이나 벼락치기 문이려니오죽 힘들었으면죽음 끝에 매달려 살려 달라살려 달라 스스로 목을 맸을까10년 행불 소리 소문 없이 보내고 보니어딘가 끝에라도 매달려 손등 문지르고 싶은숨과 숨 사이진짜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바람에 풍경 들여 불이였음을같은 것 하나 없는빠끔, 원통인 것을

좋은 시 2024.06.26

사소한 혁명/이언주

사소한 혁명이언주 ​​​  콩에서 나물까지 거리를  혁명이라 한다면 혁명의 끝은  보자기만한 하늘을 밀어올리기 위해  남발된 언어를 찾아 헤매는 것  바가지로 퍼붓는 비를 맞는다  시루 안에서 허리 세워야하는 직립이란  빽빽한 절망을 꿈꾸는 일  내가 꿈꾸는 詩  빛이 왜 독이 되는지  내막도 모르는 채  빛을 찾아 고개 쳐드는 족속이었음을    당신에게 고백하여야 하나?  별 없는 검은 하늘이 들썩인다  태를 끊으려는 욕망  부리 속 푸른 혓바닥을 숨기고  벽을 두드린다  지독하게 환해지는 어둠  신열 앓는 발이 가렵다   멋대로 일어서는 미친 발가락들

좋은 시 2024.06.26

남편 /김비주

남편 /김비주    다친 다리로 몸을 욕조에 걸치고 머리를 감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곧은 슬픔 하나가 지나간다 한평생 같이 살면서 그의 슬픔이 무언지 짐작만 하였지 묻지 못한다 꿈 속에서만 키워오던 나의 희망이 너무나 간절하여 그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의 틈새에 이는 바람에 잠시 너스레를 실어본다   괜찮아, 아프지?   종골 두개가 나가도록 그를 짓눌렀던 삶의 무게가 무언지 시간을 넘어선 후에 기민해진다. 모두 각기 슬픔에 갇혀있는지라 슬픔의 뿌리 앞에 송두리째 내주는 날을 만난다 엉성하게 내리는 초겨울의 남도 비 사이로 덜 끓은 육자배기가 지나간다 늘 함께이지만 언제나 혼자인 사람들 속에   새빨간 동백이 자지러진다

좋은 시 2024.06.26

고물사 / 이봉주

고물사  /  이봉주  ​부처가 고물상 마당에 앉아 있다  금으로 된 형상을 버리고 스티로폼 몸이 된 부처왕궁을 버리고 길가에 앉은 싯다르타의 맨발이다  바라춤을 추듯 불어온 바람의 날갯짓에 고물상 간판 이응받침이 툭 떨어진다  반야의 길은 낮은 곳으로 가는 길일까속세에서 가장 낮은 도량, 古物寺  주름진깡통다리부러진의자코째진고무신기억잃은컴퓨터몸무게잃은저울목에구멍난스피커전생과 현생의 고뇌가 온몸에 기록된 낡은 경전 같은 몸들이 후생의 탑을 쌓는다  금이 간 거울을 움켜쥐고 있던 구름이 후두둑 비를 뿌린다뼈마디들의 공음空音, 목어 우는 소리가 빈 병 속으로 낮게 흐른다  오직 버려진 몸들만 모이는 古物寺  스티로폼 부처는 이빨 빠진 다기茶器 하나 무릎 아래 내려놓고 열반에 든다  먼 산사에서 날아온 산새 ..

좋은 시 2024.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