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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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 수필 모음

안개에 깃들다 안개 범벅에 사방이 희다. 낙동강이 휘감은 사문의 마을에 닿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십여 분을 걷는다. 이쯤에 돌돔과 광어가 유영하는 수족관이 있는 자리. 저쯤에 치킨 가게와 열쇠가게, 여기 목련과 산수유나무가 있는 자리. 가늠한다는 거. 모름지기 이곳 원주민만의 오랜 관찰과 사유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 어디든 사람 들어 묵고 있을 아파트 불빛들. 먼 바다로 나간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으로 너울거린다. 얼금얼금한 불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한 무더기의 발걸음. 식당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종소리. 사물의 형체는 묻고서 걸음과 종소리가 먼저 도착하는 저녁. 칼날이란 날은 죄다 뭉텅뭉텅 잘라먹고 이도 저도 아닌 흐물거림만 둥둥 떠다니는 섬들 지천이다. 문득 가슴이 ..

좋은 수필 2024.01.12

다듬이 소리/최윤정

다듬이 소리 최윤정 슬하에 육 형제를 둔 시어머님께서는 그 엄청난 빨래감을 혼자서 해내셨다. 내게 힘든 일은 안 시켰지만 푸새질만은 반드시 내가 시어머님 옆에 있어야 했다. 이불 홑니는 흰 옥양목이 으뜸이다. 봄 풀은 누그럼해야 되고, 여름 풀은 세어야 하고, 가을 풀은 개가 핥기만 해도 빳빳해진다고 한다. 푸새질 날은 앞줄 뒷줄 흰 흩니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알맞게 마른 빨래를 넓은 대청으로 걷어 와, 빨래보를 깔고 잔손질을 한다. 솔기를 펴고, 실밥을 뜯어내고, 네귀를 맞춰 둘로 접는다. 그것을 다시 접어 들고 어머니와 나는 줄어든 홑니를 양쪽에서 잡아 당긴다. 살짝 살짝, 뒤로 넘어지듯 잡아야지 내 손에서 빨래를 놓치면 어머니가 뒤로 넘어지시고, 너무 세게 잡아 당기면 앞으로 넘어진다. ..

좋은 수필 2024.01.12

종이의 나라/김영아

종이의 나라 김양아 등 굽은 새벽이 낡은 손수레에 쌓아올린 묵직한 산을 끌고 간다 어느날 악몽을 꾼 나무들이 두꺼운 종이상자로 변신해 차곡차곡 포개진다 소비를 즐기는 도시는 끊임없이 포장을 벗겨낸다 택배는 쌓이고 박스의 접힌 각이 풀리고 모서리가 무너진다 바깥으로 밀려나 독거노인과 한 묶음이 된다 종이의 나라 그들만의 거래처는 치열하게 움켜쥔 밥줄이다 구역은 쉽게 얻을 수도 없고 내주지도 않는다는 게 그들 사이의 불문율, 땀 한 되에 60원을 쳐준다는 종이박스는 앞 다투어 수거된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로 고단한 노구를 밀어내는 도시 시장골목과 상가를 돌아온 새벽이 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저 아찔함, 다급한 클랙슨이 바퀴를 밀어붙인다 발품을 팔아 엮은 오늘의 노동이 기우뚱거린다 질경이의 꿈 임경묵..

좋은 시 2024.01.12

도시가 키운 섬/최삼용

도시가 키운 섬 ―감천마을 최삼용 비탈길 뒤뚱이며 기어 오른 마을버스에서 내려 까마득한 돌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면 마주 오는 사람 비켜가기 위해 잠시 된숨 놓아도 되는 그래서 노곤이 땟물처럼 쩔어진 골목은 이웃집 형광등 불빛까지 남루가 고인 저녁을 달랜다 액땜인 양 보낸 하루로 얻어진 고단을 눕이려 정처에 들면 허기를 부은 양은냄비의 끓는 물속에서 울혈 닮은 라면 스프 물 붉게 우러나고 몸집 부푼 면발 따라 가난의 죄까지 부풀린다 하느님과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서 살기에 믿음 약해도 하느님을 빨리 만날 것 같은 도시가 키운 섬 거기에 가난과 실패를 혹은 죄 없는 꿈을 혀끝에 단 채 휘황한 도심 발치에 두고 가난을 품앗이한 우리가 산다 ―시집『그날 만난 봄 바다』(그루, 2022) 홀로 산행을 하며 삼각산..

좋은 시 2024.01.11

​​만년필 / 송찬호

​ ​ 만년필 / 송찬호 ​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

좋은 시 2024.01.11

조개의 꿈/김추딘

조개의 꿈 김추인 갯모래 머금은 혓바닥 하나 몸을 삼으니 석화된 입이 무기다 발바닥 생을 숨긴 집이다 만입이 다 열려 있어도 ​ 묵黙 묵黙 적寂 묵黙 ​ 어느 전생의 세치 혀가 불러온 업보인지 딱딱한 입술 두 쪽에 혓바닥 하나 숨겨 생애를 건너가는 중이다 물속에서 내다뵈는 것은 먼 깜박임 저건 시리우스 저건 좀생이 별 저기에도 생을 기댈 짭조름한 물이 있을까 바람 칠수록 명멸하는 찬란을 본다 ​ 머나먼 거기 뉘 손짓이 저리 반짝이는지 조개는 날개를 펴듯 움찔 움찔 패갑을 열었다 닫곤 한다 ㅡ시집『오브제를 사랑한』(미네르바, 2017) ------------------------------ 조개의 꿈 -생명의 환(幻) 김추인 갯 모래 머금은 혓바닥 하나 몸을 삼으니 석화된 입이 무기다 발바닥 생을 숨긴 집..

좋은 시 2024.01.11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2011년가을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 *문창2011년가을 ​ 1.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짐승의 눈빛이었다고 했다. 열정을 넘어 광기의 눈빛이었다고 했다. 학생들의 그런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쓰러졌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이미 한쪽 눈을 잃었고, 남은 한쪽 눈마저 멀어갈 때 그래도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붙잡았던 시였는데……, 나는 쓰러졌다. 늦깎이로 들어간 대학원, 아이러니하게도 ‘시창작’ 수업시간에 나는 쓰러졌다. 2001년, 그날 이후 혼미해진 의식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고,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는 그만 막막한 적막 속에 갇히고야 말았다. 끊임없는 고통이 밀려왔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극한상황으로 치달았다. 병원에서는 그 원인을..

평론 2024.01.11

물레가 구른다 / 김희숙

물레가 구른다 / 김희숙 흙꽃이 핀다. 손가락을 슬쩍 비트니 오므린 몽우리가 보시시 벌어진다. 흙 한 줌에서 생명력이 살아난다. 허공을 메울 잔가지나 바람에 하늘거릴 이파리 하나 돋지 못한 줄기지만 꼿꼿하게 버티고 섰다. 앞으로도 꽃송이 서너 개쯤은 거뜬히 피워낼 수 있으리라. 코끝을 간질거리는 향기와 눈길을 사로잡는 빛깔은 없어도 투박한 질감이 마음을 당긴다. 그릇은 오롯이 인간의 도구다. 사발에 김 오른 밥을 담고 종지의 짠기를 더해 밥심을 돋운다. 너나없는 콘크리트 삶 속에 작은 토분이나마 식물을 심어 자연을 벗한다. 연잎 화반에 꽃불을 켜 주위를 밝히고 달항아리를 들여 희로애락을 품는다. 때때로 사람은 스스로를 그릇에 담는다. 제멋대로 크기까지 정하여 정신을 가두는 오류도 범한다. 땅에서 생명이 ..

좋은 수필 2024.01.10

동바리, 천 년을 잇는다 /윤미영

동바리, 천 년을 잇는다 주초에 압착되어 간다. 균형을 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짓누르는 무게에 굴복하고 마는 두리기둥. 사지의 힘줄은 이미 터져버렸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다. 한 치 오차 없이 결구해야 한다. 어긋나면 천 년이 위태하다. 보경사寶鏡寺 대웅전이 푸른 하늘아래 시대의 미감을 드러낸다.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인 사찰은 대덕 지명법사가 팔면경을 묻고 금당을 건립한 천년고찰이다. 팔작지붕의 기와와 외부 하중을 직접 받는 선자연의 날렵한 끝선이 받침목인 갈모산방(散防)에서 멎는다. 작도와 치목이 까다로워서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만 볼 수 있다는 선자연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한다.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려면 희생이 뒤따른다. 대웅전 네 칸 기둥의 밑동이 세월의 격랑에 결이 갈라..

좋은 수필 2024.01.10

평범한 날의 평범한 이야기/허창옥

평범한 날의 평범한 이야기 허창옥 친구는 지금 한 시간째 이야기를 하는데 끊어지는가 하면 이어진다. 나란히 앉아 있으므로 나의 시선은 그의 옆얼굴에 머물러 있다. 그의 얼굴은 단아하지만 좀 지쳐 보인다. 그는 갈색 주름스커트에 아이보리색 반소매 니트를 입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다. 검소하나 세련되어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척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범어로터리의 횡단보도는 길다. 따라서 신호등이 바뀌는 시간도 길다. 인도의 횡단보도 사이에는 그래서인지 조그만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백 년 수령, 수피는 거의 다 벗겨졌고 세월만큼 옹이도 깊게 패였다. 하지만 잎사귀들은 싱싱한 초록이다. 돌에 새겨진 나무의..

좋은 수필 2024.01.09

마늘 까던 남자/민혜

마늘 까던 남자 민 혜 언젠가부터 마늘을 까는 일은 그 남자의 몫이 되었다. 퇴직하고 하릴없이 늙어가는 터수에 아내를 도와 마늘 좀 깠기로서니 유난 떨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 이변이요 사건이었다. 왕년의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 밥 한 끼 챙겨먹지 못했으며 자기 마누라가 허리 다쳐 누워 있을 때도 설거지 한 번 도와주지 못했던 남자였으니 말이다. 퇴직하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집 밥 먹는 남자를 '삼식이'라 한다는데 그는 정말 집 밖을 모르는 원조 삼식이었다. 착실한 삼식이 생활로 접어든지 어언 6년, 까칠해진 마누라의 눈치를 의식한 거였을까. 어느 날 그는 아내인 내가 바가지에 수북 담아 놓은 마늘을 보더니 까주겠노라고 자청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몇 해 전만 해도 김장철에 마..

좋은 수필 2024.01.09

유화 한 점/김윤재

유화 한 점/김윤재 꼭 그 모습이다. 사십 년 전 그때처럼 집안으로 선듯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이신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어린 시절 당신이 뛰놀던 앞마당이 나오고 오른편엔 외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배어 있는 사랑채가 있는데, 대문 앞에서 지루하게 서성거릴 뿐이다. 나는 차 안에서 마른 침을 삼켰다. "어서 들어가요 엄마. 괜찮아요. 어서." 그러나 어머니는 꼭 그때처럼 끝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느티나무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셨다. 작고 마른 그림자가 주인을 따라 나섰다. 동네 어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무심하고도 나른한 노인의 모습이다. 느티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땅 위로 드러난 뿌리는 각질이 벗겨졌고 몸통엔 군데군데 옹이가 박혔다. 한쪽으로 기운 가지엔 벌레 먹은 나..

좋은 수필 2024.01.09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 피귀자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 피귀자 나는 지금 눈물 없이 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겨드랑이가 가려워 몸이 뒤틀린다. 몸속을 달리는 혈관들의 반란도 잠재우기 힘들다. 주인은 나의 존재를 잊은 건지 밀폐된 박스에 나를 쳐 박은 채 몇 달째 방치하고 있다. 이슬에 젖은 풋풋한 흙과 풀냄새를 맡고 싶다. 아니, 자갈밭에라도 맨발을 묻고 싶은 심정이다. 파란 하늘이 보고 싶고, 바람의 향기를 맡으며 흔들리고 싶다. 어느 집 창고인지 부엌인지 알 수 없는 이곳이 너무나 답답하다. 어서 빨리 이 고통을 이기고 땅 속으로 파고들고 싶다. 사람들은 터져 나오는 내 신체의 일부를 '감자 싹'이라고 부른다. 작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리는 것이 사람인가. 여름의 초입부터 삶아먹고 지져먹고 볶아서 입맛..

좋은 수필 2024.01.09

비밀 있어요/김산옥

비밀 있어요/김산옥 나는 누군가의 왼쪽이 그리운 여자에요. 해서 그대가 언제나 내 오른쪽에 있어주길 바란답니다. 식사를 할 때, 함께 걸을 때,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탈 때도 언제나 그대가 내 오른쪽에 있어주기를 바라지요. 어쩌다 기회를 놓쳐서 그대 오른쪽에 있는 날에는 너무 슬프답니다. 네, 이런 날은 얼굴을 붉히며 그대 입만 쳐다봐요. 수줍어서 말도 못하죠. 대부분 내가 알아서 그대 왼쪽으로 가지만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거든요. 그런 날은 그대에게 오해로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더욱 마음이 쓰인답니다. 언제가 문인협회십포지엄에 다녀오던 날이었어요. 버스 안에서 어느 멋진 시인과 함께 앉게 되었죠. 난 그의 왼쪽이 그리운데 오른쪽에 앉는 불운을 맞았지 뭡니까. 버스 안이라 너무 시끄러..

카테고리 없음 2024.01.09

어린 날의 초상/문혜영

어린 날의 초상 문혜영 우리 가족은 이북에서 살다가 1·4후퇴 때 월남하였습니다. 피난 오면서 아버지를 잃고 또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 남은 사람은 어머니와 올망졸망한 우리 네 자매뿐이었습니다. 사선을 넘으면서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어려웠던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 주먹으로 어느 도시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곳의 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방 한 칸 마련할 수조차 없었던 우리의 처지를 생각했음인지 학교에서는 관사에서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말이 관사지 방이 둘, 부엌이 둘 있는 작은 일본식 집이었습니다. 그나마 방 하나는 숙직실로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방 하나만을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집이 눈에 선합니다. 방과 후면 ..

좋은 수필 2024.01.06

지난 11월에는... / 김훈

지난 11월에는... / 김훈 나는 자연사한 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숲 속의 그 많은 새들이 어디로 가서 죽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내 창 앞 모과나무 가지에서 우는 새도 내가 모르는 어디론지 가서 죽을 것이다. 겨울 철새들은 11월에 날아온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오는 겨울 철새들이 시베리아로 돌아가서 죽는지, 을숙도에서 죽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을숙도 갈대 숲에 새들의 시체는 없다. 그러므로 시베리아의 전나무 숲속에도 새들의 시체는 없을 것이다. 새들은 올 길 갈 길에 하늘에서 죽어서 바다로 떨어져 내리는 것인가. 새들은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면서 날아오고 또 날아오지만, 새들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자연사한 벌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여름 풀밭의 그 많던 벌레들은 다들 어디로 가서..

좋은 수필 2024.01.06

으짜꺼시냐 / 정지민

으짜꺼시냐 / 정지민 격월로 초등학교 동창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그날은 일부러 치과원장인 정훈이의 옆자리에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정훈아, 어제 친구들이랑 채석강에 놀러갔다가 말이지... . 엿장수가 엇따, 엿 먹어라! 하면서 길을 막고 공짜 엿을 내미는 거야. 덜컥 받아먹다가 어금니 쪽 땜질한 금니빨이 그만 쓸려나왔어.” 나는 손가락으로 입속을 가리키며 정황을 얘기한 후 내일 그의 치과병원에 들르겠노라 했다. 어릴 때부터 코부랭이에 욕쟁이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는 마시던 술잔이 든 손을 훼훼 저으며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야! 무슨 소리? 너희 동네엔 치과 없어?” 아는 사람 오면 귀찮기도 하거니와 오늘밤 술을 실컷 마실 것인즉 손 떨려 치료 못한다는 것이다. 토악질이 유독 심해 치료 받을 때 의..

좋은 수필 2024.01.06

잉아/이상수

잉아/이상수 날실을 걸자 베틀 위로 흰 강물이 흐른다. 수백 겹 가닥이 물결이 되어 잔잔한 파문을 만든다. 잉앗대가 위로 들려지고 그 사이로 씨실을 넣고 바디를 조여 베를 짜기 시작한다. 덜그럭 탁, 덜그럭 탁, 어머니는 한 척의 돛단배처럼 밤늦도록 강물 위를 덜컹거리며 떠다닌다. 잉아는 베틀의 부품이다. 날실을 한 칸씩 걸러서 끌어올리도록 고정해 놓은 굵은 줄을 말한다. 실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날실을 촘촘하게 매어놓은 모양이 마치 국숫발을 장대에 널어놓은 것 같다. 스물하나에 어머니는 동갑내기 남편을 만났다.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학생이던 시동생 둘을 맡기고 입대해버렸다. 오롯이 가장이 된 당신은 병환으로 앓아누워 있던 시모를 비롯한 세 식구를 혼자서 감당하게 되었다. 남..

좋은 수필 2024.01.05

몽당연필 / 최선자

몽당연필 / 최선자 모시 적삼을 생각나게 했던 날씨가 지쳤는지 수그러들었다. 가는 곳마다 솔 향 가득한 강릉, 혼자서 떠나온 이 박 삼 일간의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숙소를 나오자 해변에서 들었던 파도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침 산책길에 만났던 청설모도 눈에 아른거렸다. 문학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좋았지만 자연에 흠뻑 취할 수 있어 더 좋았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행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김시습 기념관을 가기 위해 들렀던 버스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월의 발자국 가득한 얼굴, 닳고 닳아버린 손톱에 눈길이 멈췄다. 순간, 낯선 할머니 손을 덥석 잡고 만지자 마음이 손등을 타고 마음으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그윽한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아! ..

좋은 수필 202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