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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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를 반조返照하다 / 김휼

갓바위를 반조返照하다 / 김휼 ​ ​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서 번번이 앓아누웠다 ​ 당신이 망치와 날랜 정을 들고 들어설 때 나는 삼학도를 바라보며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층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지 ​ 맨머리로 하늘을 받들고 살아가야 하는 일이, 슬픔을 가려 줄 갓 하나 갖고 싶은 마음이, 어찌 당신만의 일이겠는가 연대기를 따라 단단한 침묵을 쪼아내는 손끝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늑골에 스미는 한기와 통증을 견뎌야만 했느니 ​ 바람조차 뼈와 살을 헐어냈다 패인 곳마다 고여 드는 울음 계절은 밀려왔다 밀려가고 달빛은 발끝을 세우며 다녀갔다 눈뜨지 못하는 방향 끝으로 파도가 들이쳤다 ​ 더는 무엇이 남아있지 않은 순간까지 붉은빛 쏟아내는 노을을 보며 사라져 더욱 선명해지는 것들을 떠올리곤 했다 ​ 피멍 든 ..

좋은 시 2023.12.20

마루의 품 / 허정진

마루의 품 / 허정진 대청마루에 누워본다. 어느 시골 한옥마을의 여름 한낮이다. 한달살이하는 친구가 텃밭에 푸성귀를 따러 간 사이 사지를 뻗고 마루에 몸을 맡겼다. 삽상한 바람이 출렁이고 갓 맑은 푸름이 치렁하다. ‘빨리’란 낱말이 낯설어지고, 시계 침 소리도 느려지는 것 같다.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에도 쩍, 허공에 금이 갈 것 같은 고요다. 담장 너머로 덩두렷한 산 능선이 정물화처럼 걸려있고 땡볕의 마당에는 먼 산 뻐꾹새 울음이 휑뎅그렁 뒹군다. 마루가 시원하면서도 따뜻하다. 청정(淸淨)이고 정숙(靜淑)이다. 마룻바닥에 세 들어 사는 바람이 술래잡기하듯 처마와 들창을 들랑거린다. 시공을 초월해 시절 좋은 사극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어렴성 없는 강아지 한 마리 마루 밑에서 턱을 고인 채..

좋은 수필 2023.12.19

김장 버티기 / 은유

김장 버티기 / 은유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는데, 찬 바람이 불면 내 마음엔 커다란 김장독이 산다. 남도의 땅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김치를 중시했다. 배추김치는 기본에 깍두기, 총각김치, 갓김치, 파김치, 물김치를 번갈아 담갔고 김장철엔 손이 더 커졌다. 김치 가져가라는 전화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선 냉장고에 자리도 없는데 또 담갔냐고 기어코 한 소리 하기도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10년, 엄마 김치를 못 먹게 된 지 10년이다. 김치 가뭄으로 엄마의 부재를 실감한다. 시댁에서 가져온 김치는 빨리 동나고 산 김치는 비싸서 감질나고, 나는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 가사노동, 양육노동, 집필노동으로 꽉 채워진 일상. 내 인..

좋은 수필 2023.12.17

겨의 노래/김선주

겨의 노래/김선주 등겨를 본 지가 오래다. 어린 날, 부모님은 식구가 먹을 양식만큼만 마을 앞 들녘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가을 추수를 마친 대청마루에 쌓인 것이 나락과 싸라기, 등겨였는데 이제 정미된 쌀 이외는 구경하기 어렵다. 지난 추석 무렵이다.“어무이예, 명절 잘 쇠시이소오." 농사짓는 오빠의 선배로부터 찹쌀 한 포대를 선물 받았다. 포대를 풀어 헤치고 한 줌 쥐었다. 마트에 포장된 찹쌀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맑은 우유 빛깔에 곁들인 촉촉함이 더없이 부드러웠다. 야들한 속살의 맵시를 자랑하는 사이로 여느 것과는 다른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살며시 손바닥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살폈다. ‘뉘' 였다. 정미된 찹쌀 포대 속의 외돌토리다.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많은 과정을 거치며 내게로 오기..

좋은 수필 2023.12.17

무서운 년/김점선

무서운 년/김점선 마흔을 훌쩍 넘겼던 어느 해의 어느 날, 부모님이 우리 집에 왔다. 구석방에서 남편을 앉혀놓고 내 이야기를 했다. 나는 관심도 없었다. 부모님이 가고 난 후 남편이 내게 말했다. “자기는 무서운 년이래”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내게 한 푼의 돈도 더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더없이 완강했다. 아무리 그런다고 내가 포기하겠나. 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동생들을 다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다 학교에서 자퇴해라. 너희들의 월사금은 다 내가 쓰겠다. 너희들 중 한 놈도 밤새워 공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수한 놈도 없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놈도 없다. 미래에 대한 야망도 없는 너희들은 어정쩡한 놈들이다. 그러니 ..

좋은 수필 2023.12.17

젊은 아버지의 추억 / 성석제

젊은 아버지의 추억 / 성석제 ​ 내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는 늘 중년이다. 아버지는 환갑의 나이에 돌아가셨는데도 지금도 나의 아버지, 하면 반사적으로 중년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중년을 나이로 환산하면 서른 살에서 쉰 살 정도일까. 연부역강. 사나이로서는 알맞은 경륜에 자신감 있는 행동이 조화를 이루는 황금기다. 그렇지만 내가 아버지를 중년으로만 기억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 열세 살이 되기 직전의 겨울, 나는 전형적인 사춘기적 증상과 맞부딪쳤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주제 파악 불량에서 기인하는 자존망대형 조발성 천재 증후군’이라 하겠는데. 그 증상은 먼저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일단 그 증상에 관해 아버지의 아들인 이상, 아버지도 나와 같은 나이에 나와 같은 문제로 고민했..

좋은 수필 2023.12.17

아버지의 추억 - 은희경

아버지의 추억 - 은희경 나의 아버지는 한시라도 재미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분이다. 피란지에서 보낸 대학시절에는 늦둥이 막내아들답게 부모를 속여 타낸 돈으로 친구들과 바닷가를 쏘다녔고, ‘증산 수출 건설’의 시대에는 뇌물과 접대로 굴러가는 노가다 판의 젊은 건설업자로서 재미있을 만한 일은 모두 다 해봤다. 심지어는 일흔 되던 해 암이 재발해서 의사들이 손도 못 대보고 환부를 덮어버린 지 한 달 만에 골프장에 나갔던 분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배짱과 낙천성뿐이었던 아버지는 그리 행운이 따르지 않는 자신의 인생을 지략과 언변으로 돌파해 나가려고 했다. 거기에 또 한 가지 아버지의 밑천이 있다면 그것은 농담이다. 아버지는 늘 농담을 해서 주변 사람을 웃게도, 또 기가 차게도 만들었다. 부도가 나서 현장 십장..

좋은 수필 2023.12.17

현장 / 장미숙

현장 / 장미숙 늦잠에 빠진 도시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버스가 지나간다. 눈 밝은 버스는 꼬부라진 길을 잘도 달려와 정류장에서 긴 하품을 쏟아낸다. 눈곱도 떼지 않은 가로등은 골목의 어둠을 쫓느라 긴 손을 휘젓는다. 형광색 옷을 입은 사람 하나, 밤새 쌓인 소음을 쓰느라 분주하다. 아침 일곱 시, 밤을 새운 사람들은 어둠을 끌어들이고 아침을 맞이한 사람들은 빛을 불러들이는 시간이다. 누군가는 주차장에서 자가용을 빼내느라 애를 쓰고, 어떤 이는 묵직한 오토바이에 묵직한 몸을 얹는다. 날렵한 자전거 한 대 그들 옆을 가뿐하게 스쳐간다. 사계절, 불 꺼진 적 없는 상가의 간판이 피로에 찌들어 파르르 떤다. 낡은 수레 하나가 뒤척이는 아침을 힘겹게 끌고 온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손잡이에 매달린 채 그네를 ..

좋은 수필 2023.12.16

신발의 꿈 / 강연호

신발의 꿈 / 강연호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발짝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온 기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해어져 저렇게 버려지기도 전에 스스로를 먼저 내팽개치고 싶은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

좋은 시 2023.12.16

활엽의 생존방식 /김이랑

활엽의 생존방식 /김이랑 겨울산은 묵묵하고 담담하다. 골격을 드러낸 채 참선에 든 수묵담채화 속에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뜨거운 숨을 내쉬다보면 마음도 시나브로 담백해진다. 산은 철마다 매력이 있지만, 삶의 장식을 하나씩 털어내는 인생의 가을이라서 그런지 이제는 겨울에 마음이 더 끌린다. 발가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시절, 산골에서는 산이 친구였다. 마음이 나만한 다람쥐와 도롱뇽에게 장난을 걸고, 진달래, 산딸기를 따먹고, 머루랑 다래랑 놀다보면 어느새 키가 한 뼘쯤 자랐다. 때가 묻지 않은 연둣빛 소년에게 나무는 두 가지 심상을 주었다. 햇살바람에 이파리를 팔랑이는 활엽수는 친근감이 들었고 하늘도 찌를 듯 뾰족한 침엽수는 경외감이 들었다. 산에서 꿈을 키운 소년은 청년이 되자 산골을 떠났다. 법관이 되기 ..

좋은 수필 2023.12.15

숫돌 / 도복희

숫돌 / 도복희 칼날이 지나가기 위해서는 물을 적당히 축이고 일정한 리듬과 손목을 통해 가해지는 힘이 필요하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몸과 몸이 섞이며 만들어 낸 날 선 눈빛으로 아침이 싹둑 잘려 나간다 잘려나간 아침들이 오래된 공복을 든든하게 채우리라 받아들일 때마다 얇아지는 살들의 쓰린 기억을 잊고 내 몸은 늘 똑같은 자세로 너를 향해 눕는다 닳고 닳는 것이 내 길이어서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다면 내 전부를 내어주며 빛나는 너만을 지켜보겠다 날 선 날이 지나갈 때마다 온 몸으로 토해내는 소울음 노래로 들릴 때까지 나, 부동의 자세 바꾸지 않겠다 검은 눈물이 앞강을 채우고 움푹 패인 유방암 환자의 절망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해도 네가 지나간 그 시간의 기억으로 즐겁게 우주를 떠다니고 싶다 바람이 되고 물이 ..

좋은 시 2023.12.13

자운영, 저 여자 / 배한봉

자운영, 저 여자 / 배한봉 ​ ​ 우포늪 둔치 만개한 저 여자 일생의 바닥 축축하다, 참고 견딘 오욕이 참 오래도록 삶을 삭혔겠다 스물여섯 신혼의 단꿈 채 익기도 전에 돈 벌어 오겠다며 집 나가 딴 살림 차린 사내 때문만은 아니리라 고딩잽이* 삼십 년 목숨이란 것도 늪 바닥만큼이나 시리고 깊은 것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라 이제 대학교 졸업반 된 딸아이가 흰 날개를 저어 더 큰 세계로 날아오르기만 기다리는 저 여자, 설한雪寒의 바람 미쳐 날뛰어도 검은 잠수복을 입고 늪 가운데 서서 찬밥덩이 김치 몇 쪽으로 씹어 삼키며 너럭지** 가득 고딩이를 잡아 담았다지 어둠 밀려올 때서야 빙점의 물 헤치고 나오면 살 속 뼛속 서릿발 같은 통증이 우당탕탕 관절을 무너뜨려 한참이나 눈보라 속에 시커먼 죽음의 실타래를..

좋은 시 2023.12.12

칼잠 / 최일걸

칼잠 / 최일걸 ​ ​ 칼잠을 자 본 사람은 알고 있다 삶이 얼마나 마모되어야 잠이 번득이는 날을 세워 칼에 이르는 건지 녹슨 양철지붕 같은 밤, 어떤 폭압이 저들을 협소한 공간에 몰아넣어 포화상태에 이르게 한 걸까 꿈마저 바닥을 드러낸 사람들이 바로 누울 수도 없는 생의 갈피갈피를 비비며 칼갈이를 하지만, 단 한 번도 칼잡이를 꿈꿔보지 못한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아 온돌이 되어 아랫목을 넓혀 가며 아궁이 보다 깊게 서로의 속을 헤아린다 부지깽이 같은 손으로 서로를 다독거리다 보면 군감자 보다 더 따스해서 입김 호호 불며 한 덩어리가 된 삶을 나누어 먹는다 겹겹의 칼날을 이룬 그들이 허기의 단속을 피해 곤한 잠으로 풀어지려면 무허가의 밤은 도대체 얼마나 울음을 삼켜야 할까

좋은 시 2023.12.12

라이따이한 재봉사 / 최일걸

라이따이한 재봉사 / 최일걸 ​ ​ 되돌려박기엔 너무 늦었지만 보트피풀처럼 막막한 날들을 노루발로 고정시키고 터져 나오려는 절규부터 박음질해 아버지 나라에서 온 한국인 사장이 재단한 하루를 쫓아 재봉틀을 돌리며 겉감에 안감 달고, 끝끝내 들키지 않는 한반도를 속감으로 솜뭉치 사이에 끼워 넣지 한국인 사장의 빈틈없는 눈길이 줄자처럼 치밀하게 내 움직임을 체크해도 골무처럼 단단히 오므린 채 사장의 매서운 가위질에도 상처 입지 않게 호지명루트처럼 바느질 선을 감춰 한국인 피가 섞였다고 말했을 때 한국인 사장은 잠시 들킨 것처럼 움찔하더니 38선보다 더 분명하게 선을 그었지 실패에 감긴 시간은 쉽게 풀리지 않지만 빳빳하게 깃을 세우고 소매단을 달고 속주머니 깊숙이 끝내 부치지 못할 편지를 찔러 넣으면 폐기 처분..

좋은 시 2023.12.12

국수를 말다 / 최정란

국수를 말다 / 최정란 택배로 관棺 하나가 배달되었다. 삼 킬로그램의 진혼곡을 개봉한다. 잘 건조된 미라들, 종이 수의 안에 빼곡히 몸을 눕히고 있다. 손에 집히는 시신 몇 구 끓는 물 속에 던져넣는다. 수장이다. 물에서 났 으니 물로 돌아가라. 아득한 남해 바다 죽방렴의 기억이 은빛 지느 러미를 꿈틀거린다. 쉴 새 없이 아가미를 벌름거리며 출렁거리는 삶 의 파도소리를 실토한다. 한참을 뼛속깊이 뜨거운 절망 속에서 펄펄 끓었을까. 한 방울의 비린 심연까지 다 쏟아내고 거품으로 끓어오르 는 주검을 건져낸다. 얼마나 오래 영혼을 우려내며 국수발처럼 살아 야 하나. 남의 생의 내력에 잔치국수를 만다. 멸치국물에 국수를 잘 말던 그를 우려낸 연못에 그 해 유달리 큰 연꽃이 피었다

좋은 시 2023.12.12

전생前生을 생각하다 / 서안나

전생前生을 생각하다 / 서안나 책상서랍을 정리하다보면 책상의 前生이 보인다 책상 표면에 매끄럽게 그려진 결마다 뿌리와 가지의 힘이 모여 있다 나이테로 몰려든 경계와 경계를 넘나들던 힘들이 물을 빨아올리던 뿌리의 힘들이 나무의 옹이를 향해 제 몸을 둥글게 구부려 단단한 우주를 만들고 있다 중력을 떨치며 태양을 향해 방사선으로 피어나던 잎들이 숲을 지탱하던 나무들이 결국은 책상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밤마다 책상에서 뿌리들이 뻗어 나와 오래된 기억들을 점자책처럼 더듬어 읽어간다 책상모서리마다 나사못들이 단단하게 조여져 있다 맞닿은 곳마다 숲의 온기가 생생하다 내 방엔 결가부좌한 책상의 前生이 서로의 몸을 껴안으며 살고 있다 밤새 먼지 내려앉은 책상을 손으로 쓸어보면 단단하게 조립된 생나무들의 숨결이 별에 닿고..

좋은 시 2023.12.12

박일만 시인의 『부뚜막 - 육십령 25』

박일만 시인의 『부뚜막 - 육십령 25』 마땅히 닦아내야 할 무엇도 없는데 닦고 계신다 어른들 말이 법인 줄 알고 사시던 꽃다운 시절부터 큰 상은 시부모와 남편, 작은 상은 시동생들 어머니의 밥상은 따로 두지 않았다 몸 쪼그리고 앉아 먹던 울음밥 부엌과 방 사이를 닳도록 드나들면서 짱짱했던 허리도 활처럼 휘었다 여든이 넘어서도 고향 집을 지키시는 어머니 아버지가 생시에 심어놓은 나무만 꼿꼿하다 솥단지 같은 시절을 가족에게 다 퍼주고도 푸성귀 많은 밥상조차 호사스럽다고 눈물로 쓸고 닦고 지켜 오신 시골집 부엌 훌쩍 자란 나무가 힐끗힐끗 들여다보는 아득히 온기 사라진 부뚜막 대처에 사는 자식들 기다리시는 어머니 밥상에는 태반이 그리움이다. 박일만 시집 『살어리랏다』 -달아실출판사 -중에서 - 부뚜막, 참 정..

좋은 시 2023.12.11

배추를 묶으며/박일만

배추를 묶으며 -육십령 44 박일만 가을이 밭 모서리에 쪼그려 앉아 조각 볕을 쬐는 날 널브러진 팔을 가지런히 묶어준다 맨 바깥 잎은 엄마, 아빠의 팔 안쪽 몇 잎은 언니, 오빠의 팔 그 안쪽은 셋째, 넷째의 팔 식구들이 팔을 들어 겹겹이 감싸주자 막내가 포대기에 싸인 듯 중심에서 웃는다 따뜻한 표정, 막내는 이제 속이 꽉 차도록 자랄 것이다 찬바람 막아주고, 서릿발 대신 맞고 방패막이가 된 넓적한 팔들 양팔을 서로 겯고 체온을 모으는 혈족들 한 울타리 속에서 온 가족이 밥 먹고 사는 중이다 찬 기운 스며드는 땅속에 기둥 박고 팔이란 팔 죄다 벌리고 있던 배추 한 포기 가슴께를 단정히 매주자 신공법으로 지은 잘 생긴 집 같다 요즘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 나 홀로 밥 먹고 나 홀로 술 마시고..

좋은 시 2023.12.11

텃밭 / 김선녀

텃밭 / 김선녀 비가 내린다. 테라스 바닥에 빗방울이 피우는 찰나의 꽃들을 본다. 피는 순간 져버리는 꽃이 촘촘하다. 고요한 새벽에 소리로 내리는 꽃을 보며 울컥한다. 비 오는 새벽은 맑은 공기 같으면서도 어둠에 갇힌 숨 같다. 창가에 놓인 전동침대 위 엄마 숨소리 같기도 하다. 하도 조용해서 내 몸도 새벽이 된 것 같은. 스탠드 불빛 아래 놓인 공책에 소리를 담고 꽃을 피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 그런 새벽과 마주하고 있다. 테라스 앞 작은 텃밭은 엄마의 삶이었다. 사계절을 보내는 동안 그곳에 풍경화를 그렸다. 겨울 끝으로 추위가 몸을 털기 시작하면 흙을 토닥여 땅을 깨우고 봄 향기를 입혔다. 깊이를 더듬고 뒤집은 땅에 햇살이 고루 들면 심심한 밭에 거름을 부렸다. 고향의 냄새인 듯 아닌 듯 썩..

좋은 수필 2023.12.10

단나/박순태

단나/박순태 육면체의 근원은 점이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되고 면이 모여 공간을 채워주는 물체가 된다. 입체의 출발은 미미한 점이었으나 결과는 삼차원 예술품이 되었다. 작은 것이 조금씩 모이다 보면 후에는 당초 예상할 수 없었던 큰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내 삶의 삼차원 예술인 단나도 초배기라는 옛날 도시락이 근원이다. 단나는 남을 사랑하여 나눈다는 뜻이다. 이 일은 이순을 코앞에 둔 내 일상의 즐거움이 되었다. 초배기를 만난 것은 포항의 '덕동마을 민속 박물관' 이다. 그곳에는 항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옛날 물건이 많았다. 이름만 들어도 정감이 가는 물건에서부터 아주 생소한 물건까지 진열 되어 있다. 그때 내 눈을 잡은 것은 옛날 도시락, 초배기다. 유리관을 통과한 내 마음이 허기..

좋은 수필 2023.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