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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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 1 / 양현근

감꽃 1 / 양현근 마당에 감꽃을 내려놓고 안산 너머 보리밭 사이로 바람이 길을 내며 건너가면 서쪽 하늘이 홍시처럼 익어갔다 엎질러진 계절을 주머니에 주워 담던 손끝에 해마다 감물이 들었다 붉은 기억의 저편 골목길을 지키는 감나무에 풋감처럼 매달린 기억들 높이 올라가면 푸른 하늘에 닿을 거라고 긴 장대를 휘젓던 아이 그날의 풋내 나는 미소를 깔고 앉아 홍시처럼 물러 떨어진 꿈을 생각했다 유년의 뒤란에 다닥다닥 매달린 떫은 시간들 해거름 배고픈 송아지 울음이 감꽃에 앉았다가 후두둑 쏟아진다 묵은 감나무 그늘이 출렁거린다 -양현근 시집 「기다림 근처」 기억은 아직 소화되지 않은 맛이다. 덜 익은 감을 씹었을 때 입안에 달라붙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타닌 성분처럼 혀끝을 다시 한 번 굴려보게 하는 것이다. 그 ..

좋은 시 2023.12.29

쇠똥구리 아젠다 / 김영찬

쇠똥구리 아젠다 / 김영찬 역사상 가장 아름답게 태어난 나는 서사성 짙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밤잠을 거른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쓴 글 높새바람에게 던져주고 남은 날숨을 구름옥상 위에 방치한다 까막까치가 날아와서 불순물 섞인 운문을 쪼아 먹으리 역사상 가장 힘들게 고고한 자태로 버텨야 하는 나는 내가 나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연필심에 침을 바른다 -김영찬 시집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그중 나는 더욱 소중하다. 이 세상 올 때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이 오지 않았을 것이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귀한 존재로 살아가라 왔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나의 귀함을 잘 모른다.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나를 무시하거나 때로 없는 존재로 취급하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모르는 세상, 밤잠을 이루..

좋은 시 2023.12.29

굴참나무 자서전/신영애

굴참나무 자서전 =신영애 기억을 지우니 바람이 분다 요양원 뒤뜰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은 통나무 의자들 말을 내려놓을 때마다 무뎌진 감정이 진물 흐르는 사연을 훔치고 있다 마음이 머물지 않아도 집이 될까 힘겹게 옮겨진 몸에는 세풍을 견딘 흔적이 옹이로 자리 잡았다 어스름한 산마루에 머무는 시선 노을이 잦아들자 산 그림자 길다 어느 서고에 한자리 차지하고 뿌리 깊은 수령을 전하고 싶었지만 골만 깊어진 몸뚱이는 바람도 머물지 못한다 재생을 멈춘 세포들은 사라지고 있다 다만 꿈결에 스치던 바람과 무성했던 온기와 산불과 병치레와 뿌리까지 흔들던 태풍을 마른 자서전에 기록해 놓았을 뿐이다 소멸을 위해 버티는 곳 아프지 않아도 아픔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풍장으로 사라질 날까지 끝내 그의 거처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좋은 시 2023.12.29

두부 이야기/정끝별

두부 이야기 =정끝별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쏟아진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처럼 시작된다 비 긋는 늦여름 저녁 식탁에 놓일 숟가락 개수를 결정해야 해, 그게 라스트신이거든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으깨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낼수록 순해진다 매 순간의 물과 불 앞에선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 준다 몽글한 웅얼거림과 뜨거운 울먹임이 뒤섞여 엉겼다가 무명 보자기에 걸러지면서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 아니면 꿈이라 할까 담담한 눈빛과 덤덤한 낯빛으로 맞이하는 밥상에서 만만찮은 희망으로 만만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콩밭 매는 마음과 콩밭에 간 마음을 쓸어 담아 써 내려가야 ..

좋은 시 2023.12.29

몸의 기억력/이주언

몸의 기억력/이주언 햇살이 은사처럼 감겨있는 목련나무의 몸에는 이제 막 떠난 꽃잎의 몸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첫 만남의 설렘과 하얀 웃음과 뾰로통한 향기가 나무의 껍질과 물과 자궁벽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새의 발가락엔 꽉 붙잡았던 나뭇가지의 질감이 내 몸에는 아버지에게서 풍겨나던 갯내음 배를 쓸어주시던 할머니의 꺼칠한 손바닥 네 몸의 문장들이 음각되어 있다 몸이 받아 적은 것들은 작은 파문이 일 때마다 절로 살아나 천 년 전 주법을 기억하는 박물관의 악기처럼 달빛의 어조로 바람의 문법으로 때론 칼금 무늬로 음각되어 목련은 목련나무의 몸속에 그들은 내 몸속에 욱신거리며, 있다. (시감상) 어느 때는 머리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것이 있다. 오랜 습관이나 몸에 익어버린 기억이나 손길, 할..

좋은 시 2023.12.29

도둑질/김현숙

도둑질 김현숙   저는 매일 도둑질을 합니다. 말 그대로 남의 것을 탐낸다는 말입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닌 줄도 알고 그러면 안 되는 줄도 압니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가장 욕심내는 것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일회성 말들입니다. 쓸 만한 게 많아서 주섬주섬 가져오다보니, 제 머릿속과 책상 위는 늘 포화상태입니다. 정리하지 않고 며칠 그대로 쌓아두면 쓰레기장을 방불케 합니다.  때로는 그 일회성이라는 것이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동네마트에 갔더니, 신선코너 담당인 박주임이 마이크를 잡고 이러는 겁니다. ‘자 세상살이 우리만큼 아는 애호박이요. 오늘은 특가로 나와 앉았네요’ 말씀 참 맛깔나게 하시지요. 애호박이 세상사는 맛을 안다는 얘기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박주임..

좋은 수필 2023.12.28

나의 시적인 엄마 / 김현숙

나의 시적인 엄마 / 김현숙 일주일에 한 번 엄마가 오시는 날이다. 처음엔 한 달에 두 번만 오겠다 하셨지만 요즘은 수요 장날에 맞춰 꼬박꼬박 다녀가신다. 시장 구경도 하시고, 반찬거리도 장만하시고, 딸내미한테 글 쓰는 것도 배우고, 엄마 말씀대로 안 올 이유가 없는 날이 되어버렸다. 지난 4월 처음 오셨을 때를 돌아보면, 우선 문 열고 들어오시며 '숙아' 하고 부르는 일은 없어졌다. 그렇다고 선생님이라 불러주시지도 않는다. 또 의자 안쪽까지 등허리를 깊게 묻을 만치 자리도 편하게 잡으셨다. 하지만 쪽파며, 연근이 당신 공부할 동안 골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만은 여전하시다. 잠시라도 냉장고에 넣어두자하면 꼭 이러신다. '이게 뭐라고 전기 써가며 공을 들이냐'고. 당신 발아래다 모셔놓고 한 번씩 들여다보는 ..

좋은 수필 2023.12.28

내외담/황미연

내외담 황미연 사랑채는 고요하다. 오수에 빠진 햇살이 다리를 죽 뻗고 누워있을 뿐 찾아드는 손님은 없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범절 있는 사대부가 나타나길 기다리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미(未)시가 한참 지난 후였다. 사랑채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읽고 있던 규방가사를 덮어두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내외담 구멍으로 내다보았다.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지만 안채에서는 사랑채가 보였다. 손님상을 차리려고 과객인지 벗인지 종친인지 살펴보았으나 손님은 이미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로 올라서고 있다. 옥색 도포를 입은 뒷모습이 마치 지난번에도 며칠 묵고 간 적이 있는 그 사람 같다. 외출하려고 막 대문을 나서다가 집안으로 들어서는 그와 부딪쳤다. 깜짝 놀라 손을 놓치는 바람에 장옷이 벗겨져..

좋은 수필 2023.12.27

달을 품은 여자 / 황미연

달을 품은 여자 / 황미연 ​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 그 남자, 가난처럼 쓸쓸한 눈매를 하고서는 사과 몇 알씩을 들고 그녀를 찾아왔다. 눈을 지그시 감고 사과를 코끝으로 가져가 향기를 흡입했다. 온돌을 데워 가난을 눕히고 싶었다. 짙은 향기가 방안을 장식했다. 해가 저물고 고요한 어둠이 찾아오면 푸른 달빛을 놓치지 않으려 서로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발을 묶은 어둠은 방문 앞까지 와서는 더 이상 들어오지 못했다. 남자를 닮아 선량한 눈매며 도톰한 입술을 가진 아이 하나 낳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련만,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많은데 간절히 바라는 그녀..

좋은 수필 2023.12.27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디로 / 권현옥​​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디로 / 권현옥​ ​ ​ 다 말할 수가 없다. 사실은 할 말이 많아서 그렇다. 아름다워도 '말할 수 없이'라고 하고 가슴 아파도 '말할 수 없는'이란 수식을 붙이지만 나는 그런 뉘앙스와는 비껴나 있다. '말을 다해봐야 뭐가 좋다고…'라는 뜻에 가깝다. 햇살이 기분 좋을 만큼 따스하고 창밖엔 가을 풍경이 가득하여 장의차 안에서 상복을 입고 있는 나를 잠시 잊고 있었다. 차창 밖 횡단보도 앞에서 어떤 분이 두 손을 배 앞에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절을 두 번인가를 한다. '아, 우리 차를 보고 그러는구나. 옛날 예의 법도인가 보다.' 망자와 천붕지통을 앓는 가족을 향한 절인가 보다. 모르는 죽음 앞에 고개를 숙인 그분의 숙연함이 따뜻하게 전해왔다. 버스가 도시를 빠져 ..

좋은 수필 2023.12.27

엄마의 외출 / 이복희

엄마의 외출 / 이복희 그렇게 좋아하는 짜장면을 반도 못 먹은 채 애꿎은 젓가락 장난만 하고 있었다. “왜 안 먹어?” “그냥, 배가 아파서...” 하지만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날은 모처럼 엄마가 학교엘 오셨던 날이었다. 다른 엄마들과 달라 거의 학교에 온 일이 없던 엄마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적어도 그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 형무소 아래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그 남자는 엄마의 고향 사람이며 바로 그 형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수인사만 나누고 그냥 헤어질 법도 한데 중국집까지 들어간 것을 보면 아마 친분이 꽤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짜장면을 시켜 주었는데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엄..

좋은 수필 2023.12.27

2월 / 서성남

2월 / 서성남 새벽 새소리가 가장 듣기 좋은 달이 2월이다. 어느 달보다 많이 지저귄다. 그 소리는 영하의 날씨를 뚫고 맑기도 하다. 집수리 중인 까치들은 둥지 주위에서 쉴 새 없이 상대를 부른다, 높지 않고 부드럽다. 여럿이 토론하듯 날카롭게 짖는 것과는 달리 온화하다. 다른 새들도 서로 부르는 소리에 교태가 있다. 숲의 악사인 청딱따구리 수컷의 연주를 자주 듣는 달도 2월이다. 속 빈 나무를 부리로 두드려대는 음은 드럼 소리 같기도, 대나무 통에 구슬이 구르는 듯도 하다.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눈앞을 가로지르던 직박구리도 날갯짓과 소리가 한결 순하다. 냇물 소리가 가장 정겨운 달이 2월이다. 채 녹지 않은 얼음 밑으로 흐르는 냇물, 아기 옹알이 같고 엄마의 자장가 같다. 물이 잠깐 멈춘 자리에는..

좋은 수필 2023.12.27

쌀밥전傳 / 김용삼

쌀밥전傳 / 김용삼 ​ 사람들 앞에 벌거벗고 선 기분이었다. 이제부터 ‘넌 혼자야’라는 판결문을 거머쥐고 법원 문을 나설 때, 사람들의 시선은 돋보기 해 모으듯 나를 향했고 간혹 수군거림까지 환청으로 귀에 박혔다. 이미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은 주위에서 갖은 처방을 들이댈수록 울컥울컥 부아로 나타났다. 생채기는 이대로 두면 더 곪을 것 같았다. 만원 버스에서 갑자기 가슴을 조여 오는 증세가 병이란 것을 알았을 때 ‘도피’를 감행했다. 큰 저수지를 품에 안은, 꽤 높은 농장을 도피처로 정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세상과 완전 차단된 곳은 아니지만 애써 사람을 청하지 않으면 그나마 ‘관계’에서 오는 복잡함은 덜만 했다. 때맞춰 쌀밥도 거기로 들어왔다. 녀석은 아직 내 손이 필요한, 갓 젖 뗀 애송이였다. 맑고 ..

좋은 수필 2023.12.27

우화를 위하여 / 공순해

우화를 위하여 / 공순해 ​ ​ 아침부터 집안에 낯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막냇손자 때문이었다.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캠핑을 겸해 갖는 슬립 오버 생일잔치에 간다. 이제 여섯 살 된 본인은 멋모르고 가겠지만 가족에겐 낯선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몇 아이를 이렇게 치렀으나 처음 보내는 그때마다 낯선 긴장감은 가시질 않는다. 이렇게 성장해 나가는 거겠지, 아련한 심정으로 즐거워하는 아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즐겁고 흥분된 감정 외에는 집 떠나는 서운함 또는 두려움 등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른들만 대책 없이 긴장했을 뿐이다. ​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김 선생님이었다.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미리 안녕을 고하고 전화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음성은 갈라져 지치고 피곤하게 들렸다..

좋은 수필 2023.12.27

오징어 / 정해경

오징어 / 정해경​ ​ ​ 기억도 가물가물한 옛날, 할머니를 따라서 시장에 갔다. 어느 가게에 들어서는데 통로 양쪽에 둥그런 멍석이 펴져 있고 각기 다른 물건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쪽은 볶은 땅콩이었고 한쪽은 오징어 다리를 오므라지지 않도록 가느다란 나무 꼬챙이에 꿰어 말린 것이었다. ​ 처음에는 그것이 온전한 마른오징어 한 마리인 줄 알았다. 외눈이긴 하지만 눈도 하나 달려 있고 어찌 보면 가느다란 머리카락 같은 것이 위로 뻗쳐 날리고 있었다. 다른 것은 있는 둥 마는 둥 보잘것없는 것이 다리는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자그마치 열 개나 되었다. 그때, 내 나이 예닐곱 살쯤, 1부터 10까지 쓰는 연습을 한창 하고 있었는데 오징어 다리가 열 개라는 것이 왠지 흐뭇했다. 지금 같으면 '오징어 참 수학적 ..

좋은 수필 2023.12.27

나의 손 / 최금진

나의 손 / 최금진 나는 어느새 늙었고, 내 손은 그걸 잘 알고 있어서 누군가를 만나면 뒷짐을 지거나 짐짓 팔짱을 낀다 내 과거는 토굴이었고, 손바닥은 언제나 더러운 때가 끼어 있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이웃들의 당돌한 악수가 무서웠다 나는 아픔이 아픔인 것을 모르던 어린놈이었다 소금 반찬으로 밥을 먹고, 혼자 학교에 갔고 학교에선 숙제를 안 해온 죄로 손바닥을 맞고 아이들은 입을 가리고 웃는 나를 계집애라고 놀렸었다 이제 그 손이 늙은 것이다 찌릿찌릿 경련도 오고, 각질이 때처럼 일어난 손이 어느 날, 맥없이 늙어버린 것이다 노란 단무지 같은 얼굴로 혼자 몸살을 앓다가 나를 사랑할 이유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때 남에게 싹싹 빌던,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기 위해 입을 가렸던 내 손이 곁에 누워 나를 쓰..

좋은 시 2023.12.27

비굴한 굴비 / 공순해

비굴한 굴비 / 공순해 깊은 바닷속은 깜깜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별천지가 벌어져 있을까? 빛이 투과할 수 없으니 깜깜할 게다. 그러나 깊은 바닷속 사진을 보면, 뜻밖에도 화려한 빛깔로 일렁인다. 붉은 말미잘, 초록 꼬리에 검은 바탕 흰 줄무늬 물고기, 노랑 꼬리에 검정 바탕 청색 줄무늬 물고기, 흔들리는 연초록색 수초들... 노랗거나 주황색인 비늘을 번뜩이는 물고기에 이르면 찬탄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이건 아예 파스텔화(畵)가 아닌가. 들여다보노라니 슬며시 의문이 인다. 인간이 볼 수 없는 심연(深淵)에 어찌 저런 세계가 존재할까? 깊은 산 골짜기, 인적 없는 모퉁이에서 홀로 피고 지는 꽃 같구나. 안타깝다. 그래, 이게 바로 생명이다. 미물조차 생명을, 존재함을 드러내려 그 깊은 심해(深海)일망정 ..

좋은 수필 2023.12.27

말/김지란

말 -만성위염 속이 쓰리다 마음이 앉을 자리가 없어 더 쓰리다 의사는 내 속을 도통 모르겠다며 내시경으로 들여다보자고 한다 첨단 의료기기 앞에서 음흉한 속이 들킬까 공손해진다 몇 번의 구역질 끝에 도착한 햇빛조차 들지 않는 곳 내 몸 중심을 차지한 지척의 거리가 쉽게 닿을 수 없는 멀고 먼 거리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들이켜는 술잔에 감쪽같이 스며들어 벌겋게 물들인 속을 의사는 단풍이 들었다고 했다 오랜 시간 알아달라고 얼마나 숨죽여 울었던 건지 이유 없이 열이 나고 온몸이 떨렸던 적도 내게 온 만개한 가을을 알리는 위급한 신호였다 통증을 키우는 나는 단풍나무 관리인 그 사람이 던지고 간 인연이라는 말을 아직도 놓지 못해 사무치는 핏빛으로 단풍이 들면 한 세상 함께 건너가야 한다 [출처] 12..

좋은 시 2023.12.22

바람의 목소리/마경덕

바람의 목소리 마경덕 작업실 이층 추녀 끝에서 풍경이 운다. 잠잠하던 풍경 하나가 입을 열고 있다. 바람의 크기에 따라 풍경의 목소리가 달라진다. 가볍게 스치는 바람은 들릴 듯 말 듯 허공을 건너오다가 이내 흩어져버린다. 바람이 센 날은 요란해서 별로 감흥이 없다. 자발맞게 몸을 흔드는 소리는 소음이 되기도 한다. 그저 곁을 스치듯 슬쩍슬쩍 등을 미는 정도가 좋다. 고요가 몸을 여는 소리, 침묵이 아람처럼 벌어지는 소리, 허공의 징검돌을 밟고 조심조심 건너오는 소리는 귓맛이 있어 깊이 스민다. 무언가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그 애련하고 가녀린 소리는 길가 냉이꽃의 목을 흔들던 한 줄기 바람이거나 풀잎을 어루만지던 바람일 것이다. 아마도 바람이 다니는 길이 있을 것이다. 허공의 오솔길을 걸어 내게로 올 ..

좋은 수필 2023.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