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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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끓이다/장현숙

책을 끓이다/장현숙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 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 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 다 ​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

좋은 시 2023.11.15

활어/황사라

활어/황사라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 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 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물고기들 나는 잊었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

좋은 시 2023.11.15

널밥/조이섭

파란 하늘에 빨간 댕기가 팔랑거리고 옥색 치마가 풀썩인다. 널뛰기는 정월이나 단오, 추석에 하는 전통 놀이이다. 두 사람이 널빤지 위에서 신명나게 구르고 뛰는 한 판 놀이이다. 어렸을 적, 아이들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세뱃돈 모금이 끝나면 하나둘 배꼽마당으로 모였다. 구슬치기도 하고 제기를 차다 보면 쿵덕 쿵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자들의 널뛰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는 어느 틈에 하던 놀이마저 팽개치고 달려가 구경삼매경에 빠졌다. 처자들은 널을 뛰기 전에, 멍석을 둥글게 말아 만든 널받침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자리를 골랐다. 이윽고 널빤지 위에 올라 눈 맞춤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슬슬 리듬을 타기 시작하더니 무릎을 굽혔다가 힘껏 굴러 하늘 높이 솟구쳤다. 널뛰는 소리가 떡방아 찧는 소리처럼 ..

좋은 수필 2023.11.13

국수/박경순

국수 ‘국수’ 하고 말하면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국수 한 그릇 국물 한 사발 밥보다 많이 먹던 시절 아! 아버지 국수를 덜어주려면 그릇과 그릇을 붙여야 한다 그대에 나눠주듯 어깨를 바싹 붙여야 한다 내 어린 시절 한 끼 식사로 허기진 가슴 넉넉히 채워 주었던 국수 한 그룻 그리고 아 버 지 9월, 후포 밤바다에서 가을을 만나다 가을은 소리로 다가왔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그리움을 울컥 울컥 토해내는 후포바다는 여전히 여름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소나무 숲과 길을 잃은 검은 개 한 마리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갈매기와 노을을 잊은 후포바다는 등기산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 너머 고기를 잡으러 간 내 아버지와 내 아버지의 아버지는 대게 몇 마리 가슴에 품고 오실는지 녹등, 홍등 등대는 걱정스레 반짝..

좋은 시 2023.11.12

땀/정경해

땀 외 1편 정경해 손톱 세운 겨울바람 목을 휘감는 한신빌라 골목길 폐지 줍는 노인 등에 안개 자욱하다 저 굽은 능선에 그려지는 생의 지도枝道 밭은기침에 움푹움푹 길이 파이고 박스가 쌓일 때마다 새길이 자란다 무수한 시간을 누덕누덕 기운 오래된 등에 내일을 여는 하루가 다시 박인다 땀 줄기 깊어진 어깨에 가래처럼 달라붙은 납작한 삶이 모락모락 고개를 들고 질긴 숨줄, 한 땀 한 땀 하루를 깁는다 슬리퍼 욕실 슬리퍼 한 짝 화장실 문 닫을 때마다 빼꼼히 고개 내밀다가 번번이 한 소리 듣는다 목이 끼어 숨도 못 쉬면서 기어코 발꿈치를 붙든다 궁금한 게 뭐 그리 많냐고 윽박지르면 풀 죽어 구석에 엎드려 있다 깜깜한 화장실에 갇혀 오죽 바깥세상 그리웠을까 가벼운 몸을 들어 바로 눕히니 흠뻑 젖은 얼굴로 미안하다..

좋은 시 2023.11.12

멍에 / 이건청

멍에 / 이건청 개펄을 끌고 밀면서 왕십리쯤을, 대학 캠퍼스 인문관 쪽 가파른 계단을 오르곤 하였다 검은 염색 군복을 입은 그가 옆구리에 낀 책이 '국어학사'였던가, '현대시론'이었나, 아직 찬바람 속을 명주나비가 날아들곤 하였다. 4월이었던가, 목월 선생의 목련꽃도, 꽃 그늘 아래로 툭, 떨어져 내리곤 하였다 강의실 난간 쪽에서 바라보면 썰물의 바다, 끌고 밀며 가야할 개펄이 멈춰 있곤 하였다. 숨가쁜 개펄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힘든 개펄을 버리려고, 산등성이까지 달려갔다가 되돌아오곤 했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개펄이 그냥 멍에로만 있는 게 아니라 까아맣게 널려진 딱정게들이 드나들며 꿈꾸는 집이며, 백합조개들이 뻘 속에서 진주를 키우는 우주라는 것을 평생을, 깊이 빠지는 개펄을 끌고 밀..

좋은 시 2023.11.12

반건조 살구 / 안희연

반건조 살구 / 안희연 버리러 다녀왔습니다 꼭지를 떠나려면 결심이 필요하니까요 떨어져 봐야 흙바닥인 삶이지만 아픔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요 버릴 땐 큰 것 위주로 버립니다 휑한 느낌이 좋아서요 속에 뭐가 많은 봄날이에요 나 하나로도 버겁다는 뜻입니다 이 집에 나와 간장 종지만 남은 사연입니다 누가 더 옹졸한가 겨루는 대국입니다 바둑에서는 하수가 흑을 잡는다면서요 양보합니다, 이 집엔 결국 간장 종지가 남을 거예요 그리울까요 가지 끝에 매달린 요람을 흔들어 주던 바람 밤과 나의 은밀한 결속이었던 달빛 실금들 언젠가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저를 만난다면 흙은 살살 털어 주세요 처음은 텁텁하고 떫은 법이잖아요 시간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신맛보단 단맛이 강해질 테죠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쫀득해질 거예요 위안이 있다면..

좋은 시 2023.11.12

나는 자주 위험했다/김성희

나는 자주 위험했다/김성희 #골목 늦은 밤 골목은 세계의 끝으로 가는 미지다 곡선의 완곡어법으로 사라짐의 결말을 서술하는 문장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모퉁이에서 그만 눈빛을 잃은 후 얼굴이 무심한 사람과 동행했던 그때 나는 몹시 위험했다 #불면 짙은 어둠은 청춘의 외연을 감싸고 있었지 들키고 싶은 나를 포장하느라 달의 껍질을 벗겨냈던 불면 별들이 감꽃같이 반짝이던 봄밤이었고 캄캄한 슬픔에서 칸 칸 피어났던 허기진 문장들로 막무가내 시인을 열망했던 그때 나는 끝도 없이 위험했다 #비 우산 속에서 발끝만 보고 걷는 버릇이 있지 발끝에 날름거리는 물의 혀를 좇는 내 눈동자는 어두워 선과 악이 섞여 흐르는 물의 계단을 밟고 올라갔지 불편한 이름들이 물에 번식하는 축축한 공간 그때 서랍 속에 있어야 할..

좋은 시 2023.11.11

조금만(灣)/정상미

조금만(灣)/정상미 아쉬움이 담긴 말엔 물소리가 납니다//옆구리 깊이 파여 먼 곳을 바라보면//돌아온 파도의 말이 귓전에 쏟아집니다//퉁퉁 부은 발목들이 찾아드는 늦저녁//슬리퍼도 운동화도 물소리에 녹아듭니다//차르르 지워진 발자국, 만 가득 들이칩니다//해초 냄새 덜 밴 기다림을 매만질 때//짠물을 맞아 봤거나 흘려본 사람들은//발돋움 숨어 자라는 조금만의 근육입니다 「시와문화」(2021, 여름호) 정상미 시인은 2021년 등단했다. 등단작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를 담백하고 정갈한 언어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금만(灣)’은 제목이 특이하다. 시작도 새롭다. 아쉬움이 담긴 말엔 물소리가 납니다, 라는 첫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퍽이나 감각적이다. 이러한 참신한 발상은 신인으로서 어떤 ..

평론 2023.11.11

납작한 바다 / 정상미

납작한 바다 / 정상미 바다는 가볍게 구워져 입안에서 부서져요 도토리묵 위에서 흩어지기도 하죠 한때 갯바위가 되고 싶었던 나는 파도의 음률을 사랑했어요 돌에 뿌리내리고 자란 가느다란 몸을 선호했지요 촘촘하게 펼쳐 놓은 하루를 말려 수평선을 당겨오면 시간의 껍질처럼 포개진 초록 잎사귀들 곡선밖에 모르는 춤으로 출렁이다가 온몸으로 바다를 받아적어요 듬성듬성한 연초록 사이 따개비 놀래미를 보여주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소리를 버리고 슬픔이란 슬픔 죄다 흡입해서 갯내를 뿌려요 매운 연애의 비렁길을 돌아 심해에 묻어둔 스물세 살의 무거운 말들이 달려 나와요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기억들 , 얇은 바다를 깔고 밥과 감정을 넣어 돌돌 말아요 당신도 결국엔 납작해졌고 지금은 습기를 버린 얇은 이별의 바다 한 장 길고 ..

좋은 시 2023.11.11

가족 / 이길옥

가족 / 이길옥 아랫목에 앉아 발을 뻗으면 한 뼘 자투리가 남는 윗목까지의 거리 그 비좁은 오두막에도 봄볕이 기웃거립니다. 한 번도 떳떳하게 허리 펴보지 못하고 한 번도 자신 있게 앞서보지 못하신 아버지 고된 피곤을 어머니 치마폭에 털어놓고 목에 걸리는 한숨으로 방안을 채웁니다. 방을 채운 한숨이 봄볕에 버무려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자식들은 불평을 깔고 앉아 곱고 탐스런 꽃으로 벌 나비를 불러 모읍니다. 더 작다고 샘내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더 적다고 강짜 놓거나 기죽지 않습니다. 살 비비고 숨결 합치면서 기대어 삽니다. 아버지의 지친 몸을 받쳐주고 어머니의 아린 속에서 아픔을 건져냅니다.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이엉을 이고 힘 겨워하는 토담집 낡은 문턱을 봄볕이 걸터앉아 방안의 칙칙한 어둠을 ..

좋은 시 2023.11.10

바닥을 친다는 것에 대하여 / 주용일 (1964~2015)

바닥을 친다는 것에 대하여 / 주용일 (1964~2015) ​ 모든 수직이 수평으로 눕는 바닥은 세상에 널려 있지만 진정으로 바닥을 칠 줄 아는 이는 드물다 바닥을 슬픔으로 칠 때 통곡은 통곡다워지고 웃음은 뛸 듯한 기쁨이 되기도 한다 길바닥이나 지하도 바닥 같은 생의 밑바닥 깔고 앉아 뭉그적거려 본 뒤에야 바닥을 치는 일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바닥 치고 일어서면 거기서부터 다시 길인 것도 알게 된다 물에 빠져 익사직전 캄캄한 숨막힘의 순간, 발바닥에 닿는 강바닥의 촉감에는 바닥을 친다는 것이 바닥을 찬다는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솟구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버려지거나 버림 받은 것들이 마지막으로 이르는 곳이 바닥이지만 바닥이 없다면 호수는 하늘을 담지 못하고 우물은 목마른 이의 갈증 풀어..

좋은 시 2023.11.08

섬 / 김윤선

섬 / 김윤선 식당은 널찍하고 천장이 높아서 쾌적했다. 게다가 흘러나오는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률이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시어머닌 휠체어에 앉은 채, 나는 그 곁에 자리를 잡았다. 지독히도 조용했다. '수다 금지'라고 했는지 입을 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조용함이 지나쳐 묵직하고 음울하게 느껴졌다. 그 때문에 나는 더욱 어색하고 긴장됐다. 처음엔 낯선 동양인을 관찰하느라 다들 조용한 줄 알았는데 식탁마다 음식이 놓여도 어느 한 사람 선뜻 수저를 드는 사람이 없었다. 퀭한 눈동자로 멀거니 딴전만 펴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표정 없는 얼굴들,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지만 설사 눈을 마주쳐도 반응이 없었다. 종이인형들 같았다. 어떤 맛이 당신 구미를 당긴 것일까, 넙죽넙죽 꽤나 잘 받..

좋은 수필 2023.11.05

멀구슬나무/이명길

멀구슬나무/이명길 늦가을 호수는 푼푼하다. 물오리들의 행렬이 물 위로 미끄러지고, 둥치만 남은 물 버들은 잠잠히 하늘을 읽는다. 물속을 거꾸로 인 채 말라버린 연 대궁은 삶을 회상하듯 묵묵하다. 호수가 생의 지론이라도 강의 중인지 물이랑 사이로 바람을 일깨운다. 오랜만에 친구와 근교의 호수공원을 둘러본다. 활짝 열린 하늘은 새털구름마저 지웠다. 낱낱이 떨어지는 햇볕을 이고,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호수 에움길을 벗어나 언덕 위로 발길을 옮기니 이름표를 목에 건 나무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이다. 간간이 하늬바람이 스쳐갈 때면 신록의 수다가 들리는 듯하다.. 언덕 위로 특별한 나무가 있어 눈길이 간다. 멀구슬나무 줄기에 왕벚나무가 업혀 있다. 뻐꾸기나무라 한다. 나무 아래 표지판에는 남의 둥지에..

좋은 수필 2023.11.05

어자문魚子紋 / 김보성

어자문魚子紋 / 김보성 막사발이 무수한 알을 품었다. 둥글게 살아온 생도 궁핍한 뒷골목의 삶도 따스하게 껴안는다. 뜨거움을 삼켜 향기로 스미면 투명 알이 꿈틀거린다. 껍데기는 말랑해지고 복아는 부푼다. 크고 작은 알, 뭉그러지고 당실하고 길쭉한 알들이 부화해 제자리를 찾는다. 흙빛 양수 속에서 볕내가 난다. ​ 막사발 안과 밖에 실금이 가 있다. 빙렬氷裂이다. 흙이 가마 안에서 화마의 시련을 이겨내고 얻은 표식이고 유약이 화신에게 하사받은 문신이다. 모두 불이 잉태하고 낳은 생의 지도다. 사발에 작은 물고기 알 모양으로 금이 갔으니 어자문魚子紋이라 칭한다. ​ 반달을 닮은 막사발을 만든다. 내가 원하는 대로 빚고 고유의 색채를 지닌 그릇은 편안하고 소담하다. 달 안에 빛이 담기면 금 간 상처들이 서로를 ..

좋은 수필 2023.11.05

바게트/황진숙

바게트/황진숙   터질 대로 터져라. 쿠프가 벌어지고 속살이 차오른다. 칼금을 그은 껍질 사이로 속결이 뚫고 나올 기세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맘껏 팽창한다. 노릇하게 제 색을 갖추자 오븐 밖으로 나온다. 안과 밖의 온도 차로 바삭거리는 소리가 생동한다. 저다움을 구현하는 소리가 거침없다.반으로 잘라 베어 문다. 한입에 느껴지는 맛이 아니다. 바삭한 껍질과 폭신한 속결은 씹어야 배어든다. 씹을수록 바삭한 껍질의 ‘바게트다움’이 전해져 온다.바게트는 세상 한가운데서 저만의 호흡을 이어간다. 여타 반죽처럼 치대는 레시피를 따르지 않는다. 억지로 주무르지도 않는다. 반죽에 힘을 가하지 않고 오랜 시간 발효한다. 반죽틀에 갇힌 정형을 거부하며 스스로 모양을 찾아간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깊은 맛을 끌어낸다.이보..

발표작 2023.10.29

처마/김응숙

처마/김응숙 몸피 얇은 것들이 찾아들었다. 하루살이며 나방이었는데, 진즉에 진을 치고 기다리던 거미줄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도 처마 깊숙이에 먼지 같은 알을 까고 새끼를 쳤다. 비가 오는 날이면 민달팽이나 지렁이가 덜 젖은 땅을 찾아 기어 나왔다. 그들은 처마 밑 벽에 몸을 붙이고 비를 그었다. ​ 그날도 가을비가 왔다. 슬레이트 지붕이 다닥다닥 닿아있는 언덕빼기 동네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 집은 신작로로 들창이 난 길갓집이었다. 그 처마 밑으로 바싹 마른 아이들이 찾아 들었다. 예닐곱 살, 열두 살로 보이는 형제였다. 황급히 뛰어나왔는지 작은 아이는 맨발이었다. ​ 동네 중턱에서 고함과 비명이 따라왔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술만 마시면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이었다. 우산을 쓴 아버지가 싸움을..

좋은 수필 2023.10.29

눈빛 / 김혜주

눈빛 / 김혜주 ​ 텅 비어 있는 눈빛은 슬펐다. 아무도 눈 맞춰 주지 않는 허공을 서성대고 있는 시선은 그래서 더 애잔했다. 그녀의 눈빛이 그랬다. 쌍꺼풀이 진 큰 눈에 눈물 한 방울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의 그 막막한 눈빛. 꽉 닫힌 문 앞에 서서 속절없이 빠져버린 문고리의 흔적을 장님마냥 더듬고 있는 눈빛. 그런 그녀를 만난 것은 병실이었다. 그녀는 하얀 시트 위에 석고상처럼 굳은 육신을 뉘고 있었다. 몇 날을 두통에 시달리다 동네 병원을 찾았다. 치료를 했으나 차도가 없자 의사는 더 정확한 검진을 위해 큰 병원에 가기를 권했다. 감기가 오래가는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데 왼손에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그제야 부랴부랴 병원을 찾아갔다. 검사 결과는 가벼운 뇌출..

좋은 수필 2023.10.21

구두 밑에서 말발굽소리가 난다 / 손택수

구두 밑에서 말발굽소리가 난다 / 손택수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치며 걸을 때마다 창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던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따그락 따그락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 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좋은 시 2023.10.20

재봉틀의 포란/조미정

재봉틀의 포란/조미정 ​ ​ ​ 재봉틀이 오동나무 탁자 위에 앉아 갸르릉거린다. 얼핏 차가워 보이는 쇠붙이임에도 어쩌면 저리도 섬세한 몸짓일까.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손길에 형형색색의 실들이 퐁당퐁당 땀을 낳는다. 홈질, 박음질, 새발뜨기 등 밤새도록 박은 바느질 종류가 많기도 하다. 재봉틀은 삼거리 중고 가게에서 우연히 눈을 마주친 오래된 골동품이다. 철제다리를 떼어내고 좌식으로 개조한 구닥다리다 보니 눈에 잘 띄는 곳에 버젓이 내놓기는 뭣하다. 그래도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 중의 하나이다. 무엇인가를 이어 붙이는 데에 재봉틀만 한 것이 있을까. 힘주어 발판을 구르면 침목 위의 기차처럼 시접을 따라 달린다. 윗실과 밑실이 얽혀 한 개의 바느질 땀을 만들어낸다. 노루발이 다 박은 천을 뒤로 밀어내면..

좋은 수필 2023.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