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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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 / 정은아

전등 / 정은아 빛과 어둠. 켜짐과 꺼짐. 생과 사. 한순간인지도 모른다. 딸깍. 꺼져버린 빛이 불현듯 켜지길 기다렸다. 어둠 속에 머무르긴 싫으니까. 이미 빛을 잃은 생이, 다시 빛날 수 있을까. 무작정 주저앉아 기다릴 순 없다. 일으켜 세웠다. 아이가 걸을 수 없다며 다시 앉았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서 투정 부리는 거라고 여겼다. 아이는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아기가 되었다고 놀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5살 아이를 업고 동네병원에 갔다. 고관절에 염증이 생겼다는 말과 함께 소염진통제를 처방받았다. 되도록 걷지 말고, 뛰지도 말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좋다고 했다. 아이를 다시 업었다. ‘보고 있는 거야? 애 낳고 한 달도 안 된 산모가 보이긴 해?’ 병원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실내가 순식간에..

좋은 수필 2024.02.04

해지/정은아

해지 / 정은아 핸드폰을 해지하러 대리점에 갔다. 주인 잃은 핸드폰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다. 해지 전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전원을 켰다. 다시 생명을 얻듯 불빛이 반짝였다. 갑자기 노래가 흘러나왔다. 잘못 누른 걸까. 재빨리 소리를 줄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음악 파일이 재생 중이었다. 꿈속에선 보이나 봐. 꿈이니까 만나나 봐. 그리워서 너무 그리워. 꿈속에만 있는가 봐. - ‘부활’의 노래. ‘생각이 나’ 남편의 핸드폰은 다시 살아나 노래를 불렀다. 가슴이 일렁거렸다. 눈물샘은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대리점 안은 고객들로 소란스러웠고,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머리카락 안으로 숨었다. 가려진 작은 공간에서 노래가 하..

좋은 수필 2024.02.04

손톱 / 허효남

손톱 / 허효남 손톱은 그리움이다. 가만히 있어도 스멀히 자라나서 잘라내도 또 자라나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쇠붙이를 들고 톡탁여도 웃자란 그리움들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길 잃은 마음들이 사방천지로 흩뿌려지며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깎을수록 더 단단히 돋아나는 그리움은 기약 없는 시간을 맹세한 채 영원토록 잘라내야 할 형벌을 내린다. 그리움이 지난 것을 불러 내 앞에 붙들어 세운다. 아이의 손톱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주말에 할머니가 봉숭아물을 들여 준 것이라 했다. 돌 위에 여린 잎을 놓고 찧으며 내 손톱을 물들이던 시간들도 있었다. 백반가루를 넣어 곱게 풀린 꽃잎들을 손끝에 올려주던 분도 내 할머니였다. 아이의 할머니도, 내 할머니도 앙증맞은 손을 잡으며 어떤 마음이셨을까. 꽃잎처럼 단아하고 향이..

좋은 수필 2024.02.04

군불을 지피며/정원정

군불을 지피며 정 원 정 나뭇광으로 쓰이는 지하실에는 아궁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입구(口)자 모양의 쇠틀을 벽에 붙인 함실아궁이다. 마치 거대한 아귀 한 마리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형국이다. 내 키와 엇비슷한 높이에 있는 그 아궁이는 네모난 쇠판때기로 막지 않는 한, 일 년 열두 달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큰 물고기가 아가리를 마음껏 벌리고 먹을 것을 기다리는 모양 같았다. 생뚱맞긴 하지만, 방고래 속을 엄청 큰 물고기의 뱃속으로 상상을 하면 재밌다. 물고기의 먹을거리로 아궁이에 땔감을 지피는 나의 임무는 날마다 지속되었다. 쇠판때기 문을 열고 긴 굴속 같은 어웅한 아궁 안을 들여다보면 바닥에는 어제 먹다 남은 나뭇재만 소도록이 쌓여 있다. 부지깽이로 재를 뒤적거려 보면 꼬마별 같은 불씨들이 요리..

좋은 수필 2024.02.02

갈목비 / 전영임

갈목비 / 전영임 어두운 터널의 수렁과도 같았던 시간들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셨다. 여우비가 내리던 날 금빛 모래 쓸리어 내리는 강을 건너, 진달래가 흐드러진 산길을 지나, 너울너울 꽃상여를 타고 먼 길을 떠나셨다. 살아온 인생길 가장 화려하고 호강스런 순간이었다. 동구길에서 아버지를 보내고 일곱 계단을 올라 두 평 남짓 당신의 체취가 배인 사랑방을 찾았다. 문을 열자 움츠려있던 방의 기운이 보무라지처럼 풀썩 일어나 소스락거렸다. 당신의 향기였다. 아버지는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가녀린 몸으로 농사일을 하셨다. 너울가지가 없어 아무 말 없이 혼자 사는 할머니들의 밭갈이며 힘든 일을 도와주시던 듬쑥한 분이었다. 풀에 할퀴고 밭일에 무디어진 손으로 농사일이 끝나면 쉬지 않고 갈목비를 엮으셨다..

좋은 수필 2024.02.02

경계 / 전미경

경계 / 전미경 봉분에 달라붙은 잔디가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 매서운 한파 속에 잔디를 입힌 탓에 둥지를 틀지 못할까 봐 가슴 졸였는데, 온전히 뿌리내려 자리 잡은 걸 보니 내심 마음이 놓인다. 군데군데 잡풀이 눈에 띈다.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뽑히는 걸 보니 잡풀은 제집이 아님을 아는 모양이다. 상석에 술과 포를 올리고 절을 한다. 당장이라도 헛헛한 웃음 지으며 걸어 나오실 것 같은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우리 딸 왔나.' 하며 반긴다. 마른 풀이 바람에 들썩인다. 힘겹게 받치고 있던 삶의 무게를 떨어뜨리기 위해 헤아린 흔적을 바람도 아는 눈치다. 자신의 시든 삶을 정리하다 살아온 결대로 남고 싶은 풀의 절규인지도 모른다. 봉분을 사이에 두고 현세와 내세의 길이 너무 멀다. 몇 걸음도 되지 않는 거..

좋은 수필 2024.02.02

말뚝 / 이은정

말뚝 / 이은정 ​ ​ 텃밭 반만 갈아 퇴비를 뿌려놓았다. 짐승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그물을 두를 계획이다. 목장갑을 끼고 적당한 위치를 찾아 말뚝을 박는다. 세운 말뚝을 붙잡고 좌우로 흔들어준다. 제가 놓일 자리를 찾으란 뜻이다. 흔들흔들. 점쟁이 굿하듯, 노인네 지팡이 흔들 듯, 흔들흔들 흔든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한다. 한쪽 끄트머리를 망치로 내려치기 시작한다. 쿵 소리 한 번에 말뚝의 키가 훌렁 줄어든다. 세 군데 말뚝을 박았다. 니은 모양으로 양쪽 끄트머리와 가운데 코너 부분이다. 튼튼하게 박힌 걸 확인한 후 초록색 그물망을 두른다. 한쪽 끝에 박은 말뚝에 그물망을 고정하고 코너를 돌아 다른 끝에 가서 고정한다. 제법 그럴싸한 그물 벽이 생겼다. 가운데..

좋은 수필 2024.01.30

통화 / 김경미

통화 / 김경미 통화 / 김경미 "아침에 일어나면 늘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좀 덜 슬플 수 있을까 생각해요......" 오래 전 은동전 같던 어느 가을날의 전화. 너무 좋아서 전화기 째 아삭아삭 가을 사과처럼 베어먹고 싶던. 그 설운 한마디. 어깨 위로 황금빛 은행잎들 돋아오르고. 그 저무는 잎들에 어깨 집혀 생이라는 밀교. 밤의 어디든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던. 돌아와 찬 이슬 털며 가을밤. 나도 자주 잠이 오지 않았었다.

좋은 시 2024.01.28

의자왕 / 신미균

의자왕 / 신미균 (1996년 현대시 등단작) 금요일 오후 파고다 공원 십층 석탑 밑 정년퇴직한 의자왕이 돌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파고드는 바람을 날짜 지난 신문으로 가리며 연신 굽신거리는 비둘기들의 호위를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탑의 꼭대기가 서서히 왕의 어깨를 누르려고 한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눈도 꿈쩍 안 하던 왕이 어깨를 움직여 햇빛 쪽으로 돌아앉는다 감기에 걸린 경순왕은 몇 번 뒤채더니 조용해졌고 소주에 찌들은 이성계는 벌써 길게 누워 버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는 알고 있다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서로 통성명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저 적당히 떨어져 앉아 무심한 척 하..

좋은 시 2024.01.28

不惑의 구두 / 하재청

不惑의 구두 / 하재청 예고도 없이 불어닥친 바람 이미 거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낙엽은 더 이상 밟히는 존재가 아니다 동강동강 인화된 가을이 구두코에 부딪치며 몰려오던 날 그다지 바쁠 것 없는 귀가는 신발장에 버려진 낡은 구두처럼 고요하다 발뒤꿈치를 타고 가슴에 차 올라오는 먼 귀가길 모퉁이에 매달린 소용돌이 때론 먼지처럼 뚝뚝 피어나던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현관문을 열다 뒤돌아보곤 한다 내가 걸어온 이정표가 골목골목 훤하게 적시는 순간 예정된 귀가는 늘 서툴고 불편하다 신발장 구석 낡은 구두가 허리 아픈 아내보다 먼저 인사를 한다 구두 속 갇혔던 하루가 불쑥 튀어나와 나를 맞는다 그렇구나, 나를 맞는 하루의 시작이 지금부터구나 不惑을 넘긴 사람은 안다 저물녘이 고요에 젖어 흔들린다는 것을, 한 쪽으로 삐..

좋은 시 2024.01.28

가족사진 -고경숙

가족사진 -고경숙 기와집 마당에 일가가 서 있다 집 안에 유일하게 있는 입식의자 두 개도 나왔다 자리 잡고 앉은 일대 조부 무릎에 기대고 뻗정다리로 서 있는 삼대 손자들 몸을 뒤틀고 있다 싫다는 객식구 김 씨와 박 씨까지 불려 나와 어색하게 뒷줄에 자리 잡았다 서 있는 이대 가장에게 초점을 맞추다 멈칫, 양복 윗도리 옆에 부엌에서 일하다 뛰어나온 앞치마 혼자 대열 밖으로 도드라져 사진사는 무안하지 않게 다들 옷매무새 한번씩들 정리해달라고, 모인 사람들 옷마다 단추란 단추는 다 채워지고 포마드로 쓸어올린 머리칼 한 올 허투루 날리지 않는다 앞치마 여자는 젖은 손으로 머리칼만 귀 뒤로 넘긴다 이제 모두 정면을 응시한다 오래된 기와지붕도 그 너머 대밭도 그 위를 지나던 구름도 구석에 받쳐놓은 낡은 자전거도 햇..

좋은 시 2024.01.28

등의 방정식​ / 현경미

등의 방정식​ / 현경미 ​ ​ 꿈결인가. 등이 따뜻하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자 내 등에 맞닿은 그의 등이 느껴진다. 침대 위아래에서 잠이 들었건만 등과 등 사이 바람 한 톨 비집고 들 틈 없을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인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도, 등을 돌리고도 편안하게 각자의 잠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 등을 돌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러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치 우리만의 세상이 끝장나기라도 하는 듯 애틋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 듯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던 신혼의 단꿈을 꾸던 때였다. 서로의 앞만 바라보느라 등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등이 있어도 등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 조금씩 거리가 느껴졌다고 할까. 등과 등 사이 거리가 마치 그와 나..

좋은 수필 2024.01.28

막차 / 문경희

막차 / 문경희 출발 10분 전, 실내 조명등이 켜진다. 내내 굳건한 함구를 풀지 않던 슬라이딩 도어도 스르르 빗장을 열어젖힌다. 당신의 모든 것을 허용하겠다는 따뜻하고도 너그러운 호의에 감전되듯, 사람들은 하나둘 텅 빈 사각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 우람한 네 바퀴가 나를 인도해 줄지니. 한 시간 남짓, 언젠가부터 그에게 나를 맡기는 고요의 시간이 좋아졌다. 그를 무한 신뢰하며 무거운 다리를 쉬게 하고, 졸다, 깨다, 혼곤하게 정신의 풀기를 눕혀도 본다. 붉은 띠가 선명한 내 집행 시외버스의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에 동승하기 위해 나도 기다림을 추스르고 탑승구로 들어선다. 모바일 승차권을 다운받는다. 본의 아니게 최근 들어 자주 도시를 오가다 보니 내가 애호하는 일인용 좌석을 선점하기 위해 스마트하..

좋은 수필 2024.01.25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외 4편 / 조영심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외 4편 / 조영심 가막만은 별빛 자르르한 옥토였다 먼 바다 돌아온 달이 외진 포구 넘너리에 고삐 매어두는 밤, 개밥바라기별 앞세워 대경도 소경도 물결 찰방이는 소리에 우수수 우수수수 쏟아지던 별의 금싸라기, 뭍에서나 물에서나 별의 숨결 받아먹고 숨탄것들 탱글탱글 여물던 찰진 별 밭이었다 큰바람도 여기 와선 숨을 고르고 별들과 뒹굴었다 언제부턴가, 경도 큰 고래 작은 고래 등허리에 줄지어 내걸린 큰 전등이며 나뭇가지 친친 감은 색색의 꼬마전구에 밀려 그 많던 별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바다에 고랑 이랑을 내고 별빛을 경작하던 바람도 이제 길을 잃었다 전설이 죽고 꿈도 사라졌다 밤낮없이 먹고 마시고 노느라 팽개쳐버린 별빛은 이제 더 이상 바다에 이르는 길을 내지..

좋은 시 2024.01.24

보리 굴비 / 박찬희

보리 굴비 / 박찬희 깊은 곳, 동안거에 들 날이 가까워지면 옆구리가 가려웠다 수년을 가로거침 없던 길 없는 길이 아른거리기만 하고 바싹 말라버린 감정이 압착된 채 눌어붙어 겉보리 색깔이다 ​ 꼬아 내린 새끼줄이 미명을 건져 올리는 때마다 조금씩 빠져나가는 기억, 잊은 물질의 기법을 유추해 켜켜이 돋워 꿰면 아가미에서 배어 나오는 소금기 바람이 낙관을 찍고 갈 때마다 입술이 들썩거리고 항아리 깊은 속에서 오장육부를 비워내면 아가미를 통해 내통하는 바다와 육지 ​ 숨이 찬 시절이 건조되는 동안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흘러 빠져나가는 너울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음께를 바람이 변주하면 뭉툭하던 허리를 조여 맨 상처가 껍데기에서 바삭거린다 ​ 잠이 깰 때 아무 느낌이 없게 될지도 모르는 귓속말을 차곡차곡 채우면 봄..

좋은 시 2024.01.24

삶의 본때/황동규

삶의 본때/황동규 어머님, 백 세 가까이 곁에 계시다 아버님 옆에 가 묻히시고 김치수, 오래 누워 앓다 경기도 변두리로 가 잠들고 아내, 벼르고 벼르다 동창들과 제주도에 갔다. 늦설거지 끝내고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끝난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도 없다. 마른 잎이 허공에 몸 던지는 기척뿐, 소리도 없다. ​ 외로움과 아예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엔 외로움에게 덜미 잡히지 않게 몇 발짝 앞서 걷거나 뒷골목으로 샐 수 있게 몇 걸음 뒤져 걷진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것다. ​ 창밖으로 금 간 클랙슨 소리 하나 길게 지나가고 오토바이 하나 다급하게 달려가고 늦가을 밤 치고도 투명하게 고즈넉한 밤. ​ 별말 없이 고개 기울이고 돌고 있는 지구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좋은 시 2024.01.23

복숭아씨/박혜자

복숭아씨/박혜자 과일가게 주인이 맛보라며 복숭아 한쪽을 준다. 토실토실 살이 올라 단 냄새를 물씬 풍기던 복숭아는 살을 다 발라내자 씨만 남았다. 주인이 복숭아씨를 휴지통에 던지고는 복숭아 한 개를 또 깎는다. 복숭아씨가 맨 몸으로 휴지통에 웅크리고 있다. 평생 땅 한 뙈기 가져 본 적이 없는 아버지 이름으로 땅이 생겼다. 비가 와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산 아래의 천수답이었다. 천수답이 생긴 후로 아버지는 더욱 일에 매달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농작물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가는데 아버지의 몸은 마른 장작처럼 말라갔다. 복숭아 알이 주먹만큼 커지고 매미소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던 날 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터널 앞에서 내린다는 것을 그만 터널을 지나서 내리고 말았다. 무엇이든 때가 있다. 아버지가 ..

좋은 수필 2024.01.21

장작을 패며/오세영

장작을 패며 오세영 ​ 장작은 나무가 아니다. 잘리고 토막 나서 헛간에 내동댕이친 화목(火木), 영혼이 금간 불목하니. 한 때 굳건히 대지에 뿌리를 박고 가지마다 무성하게 피워 올린 잎새들로 길가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기도 했다만, 탐스런 과육(果肉)으로 지나던 길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도 했다만 잘려 뽀개진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안으로, 안으로 분노를 되새기며 미구에 닥칠 그 인내의 한계점에 서면 내 무엇이 무서우랴. 확 불 지르리라. 존재의 빈터에 버려져 처절히 복수를 노리는 저 차가운 이성, 잘린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금간 것들은 이미 어떤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좋은 시 2024.01.19

신동엽의 「산문시 1」 평설 / 신형철

신동엽의 「산문시 1」 평설 / 신형철 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

평론 2024.01.19

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평설 / 신형철

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평설 / 신형철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중략) 연인들이여, 어울려 만족하는 그대들이여, 너희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너희들은 손을 꼭 잡는다.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 자신의 두 손도 서로를 느끼고, 혹은 그 두 손 안에 지친 얼굴을 묻고 쉬는 일도 있다. 그것이 얼마간은 나 스스로를 감지하게도 한다. 허나 누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연인들이여, 서로가 상대의 환희 속에서 성장하는 너희들. 끝내는 압도되는 상대가 , 하고 애원하는 너희들 ─ 서로의 애무 속에서 풍년 든 포도처럼 풍요하게 영그는 너희들. 다만 상대가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소멸하는 너희들. 너희에게 묻는다,..

평론 2024.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