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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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 임동윤

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 임동윤 ​ ​ 감자꽃이 시들면서 정수리마다 자글자글 땡볕이 쏟아졌다 장독대가 봉숭아꽃으로 알록달록 손톱물이 들고 마른 꼬투리가 제 몸을 열어 탁 타닥 뒷마당을 흔들 때, 옥수수는 길게 늘어뜨린 턱수염을 하얗게 말리면서 잠자리들은 여름의 끝에서 목말을 탔다 싸리나무 울타리가 조금씩 여위면서 해바라기들이 서쪽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철 이른 고구마가 그늘 쪽으로 키를 늘이면서 작고 여린 몸도 하루가 다르게 튼실해졌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옥수수 줄기처럼 빠르게 말라가던 어머니는 밤마다 옥수수 키만큼의 높이에 가장 외로운 별들을 하나씩 매달기 시작했다 그런 날 나는 하모니카가 불고 싶어졌다 문득, 아버지가 켜든 불빛이 그리워졌다 그 여름이 저물도록 어머니는 가마솥 가득 모락..

좋은 시 2024.02.10

껌 - 김기택

껌 - 김기택 ​ ​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것 뭉개..

좋은 시 2024.02.10

김행숙의「서랍의 형식」감상 / 김기택

김행숙의「서랍의 형식」감상 / 김기택 서랍의 형식 김행숙(1970~ )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까지 열었다 서랍 속의 서랍 속의 서랍 속까지 닫았다 똑같지 않았다 다시 차례차례 열었다 다시 차례차례 닫았다 세계의 구석구석을 끌어모은 검은 아침이 서서히 밝아왔다 누군가, 누군가 또 사라지는 속도로 ......................................................................................................................................................................................... 잘 사용하지 않는 서랍이 있다. 그 안의 물건들은 언제 무엇을 넣었는지 ..

좋은 시 2024.02.09

구두의 내부 - 동행 / 박성민

구두의 내부 - 동행 / 박성민 ​ ​ 절름발이 여자가 벙어리 사내에게 눈빛으로 손가락으로 말들을 꿰매고 있다 아파트 모서리에 놓인 초원 구두 수선집 ​ 사내는 구두를 받자 닳은 뒷굽을 떼어낸다 초원 끝에서 들려오는 말갈족의 말굽소리 사내는 구름 속에 들어가 지평선을 깁고 있다 ​ 벙어리의 저린 가슴을 헤집고 나온 말의 뿌리 한 번도 사랑한단 말, 못 해주고 살아온 사내의 착한 눈망울은 디딜 곳 없는 허공이다 ​ 못처럼 박혀드는 널 남겨두곤 죽을 수 없다 마른 입술 축이는 사내의 눈이 들어가는 구두의 닳아진 내부는 저녁처럼 어두워진다 ​ 한 평 반의 수선점은 낡고도 비좁은데 어둠이 막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하늘에 사내는 성긴 별들을 총총히 박아 놓는다 ​ ​ ​ ​ ​ ​ 시집 『쌍봉낙타의 꿈』(고요아침,..

좋은 시 2024.02.09

빗방울은 구두를 신었을까 - 송진권

빗방울은 구두를 신었을까 - 송진권 ​ ​ 아직 발굽도 여물지 않은 어린것들이 소란스레 함석지붕에서 놀다가 마당까지 내려와 잘박잘박 논다 징도 박을 수 없는 무른 발들이 물거품을 만들었다가 톡톡 터트리다 히히히힝 웃다가 아주까리 이파리에 매달려 또록또록 눈알을 굴리며 논다 마당 그득 동그라미 그리며 논다 놀다가 빼꼼히 지붕을 타고 내려가 방바닥에 받쳐둔 양동이 속으로도 들어가 논다 비스듬히 기운 집 안 신발도 신지 않은 무른 발들이 찰방찰방 뛰며 논다 기우뚱 집 한채 파문에 일렁일렁 논다 ​ ​ ​ *힐데가르트 볼게무트(Hildegard Wohlgemuth)의 동화 제목

좋은 시 2024.02.09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 ​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벼야 하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밖이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여진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늘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의 얼음 위에..

좋은 시 2024.02.09

맨발/문태준

맨발- 문태준 ​ ​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

좋은 시 2024.02.09

수필가 반숙자 초기작품- 수필집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80편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 반숙자 1. 5월이 오면 해마다 봄이 오면 친정 집 뒤뜰에 붓끝 모양의 푸른 잎이 무더기 무더기 돋는다. 아버지는 생전에 이 꽃을 유난히 사랑하고 상사화(想思花)란 세칭을 피하여 당신만은 모사화(母思花)라 이르셨다. 해토(解土)가 되기 무섭게 지표를 뚫고 용감한 기세로 돋아나는 모사화 잎은 오직 잎만 피우기 위한 듯 무성하게 자란다. 그리고 어느 날 무더위가 시작 될 즈음 초록빛 융성한 잎은 모두 죽어 거름이 되고 거기 죽음 같은 꽃 잎을 물고 연보라 빛이 피어난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 또한 잎을 보지 못해 모사화라 이름 지으신 친정 아버지의 속 깊은 불망(不望)의 회한을 이제사 짐작하는 내게 역시 꽃은 아픔으로 피어나고 있다. 어쩌면 꽃잎은 못다한 불효의 한을 저렇듯 슬..

좋은 수필 2024.02.08

아버지의 집, 송석헌(松石軒) / 조현미

아버지의 집, 송석헌(松石軒) / 조현미 집을 떠나는 것이 세계의 운명이 되어 가고 있다 - 하이데거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기왓장엔 버짐이 피었고 기왓골에선 와송이 자라고 있었다. 보(樑)와 기둥, 서까래와 난간에 세월이 먹물처럼 스며있었다. 대문은 버름했고 마루는 앙상했다. 수척한 지팡이와 고무신 한 켤레가 ‘아직 사람이 기거 중’이라는 듯 늙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미명에 젖은 집의 표정은 무거웠고 주련(柱聯)속 글귀는 낯설었다. 마치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쯤 한 노인이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갓과 잿빛 두루마기, 흰 고무신이 먼 옛날로부터 걸어 나온 차림새였다. 주름 깊은 표정이 그 집을 꼭 닮아있었다. 이윽고 지팡이를 쥔 노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긴한 용무가 있..

좋은 수필 2024.02.08

입원단상(결벽증) / 안병태

입원단상(결벽증) / 안병태 별로 자랑할 만한 감투는 아니지만 이 병실에 오래 머물다보니 환자들이 나를 ‘실장님’이라고 부른다. 오늘 우리 병실에 새 환자가 들어왔다. 그동안 환자가 수없이 갈마들었지만 저런 별종은 처음이다. 입실하자마자 간호사를 호출해 소독솜을 청구하더니 자신의 병상을 닦기 시작한다. 별의별 환자가 다 거쳐 갔을 터이니 별의별 병균이 다 묻어있을 거란다. 나 역시 병실의 청결상태에 막연한 불안감을 갖지 않은 건 아니나 저렇게 구체적으로 의심해보진 않았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내 병상에서도 각종 병균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지네처럼 옷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아 몸이 근질거린다. 병상을 구석구석 닦은 신참이 TV 리모컨, 출입문 손잡이, 링거 거치대, 화장실 손잡이, 특히 변기의 하수용 ..

좋은 수필 2024.02.08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 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기에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속은 서릿몸 신경 줄까지 드러낸 헝큰 마음 언 땅에 비켜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좋은 시 2024.02.08

부부 / 김시헌

부부 / 김시헌 밤중에 잠을 깰 때가 있다. 대개는 용변 때문이다. 일어나서 툇마루를 지나 마당에 내려서면 어떤 때는 달빛이 하다. 오밤중에 보는 둥근 달은 신비하기조차 하다. 티 없이 트인 달의 얼굴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 달처럼 환해진 것 같은 자기 마음에 대한 착각이리라. 화장실이 마당을 건너가야 나타나기 때문에 밤에 달을 보는 것은 화장실로 해서 얻는 부수입이다. 달빛이 아까워서 마당에서 좀 서성거리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 문을 다 열어 놓은 방안은 달빛의 여광으로 사람과 물건을 낮같이 볼 수 있다. 방에는 아내가 혼자 잠들어 있다. 아내의 나이는 지금 오십에 육박하고 있다. 여름이어서 이불을 걷어찬 채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모기장 속에 갇혀서 세상을 잊고 있는 아내의 몸 전체..

좋은 수필 2024.02.07

포장마차를 타다 /심선경

포장마차를 타다 심 선 경 분명 이름은 마차인데 포장마차엔 말馬이 없다. 그래서 이 마차는 당신이 원하는 곳까지 달려가지 못한다. 다리가 잘려버린 말 대신, 의족처럼 둥그런 바퀴를 끼워 놓았지만, 그마저도 수술이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지붕을 덮은 방수 천막은 네 귀를 잡아당겨 못질을 단단히 하고, 아예 멀리 도망가지 못하게 무거운 약수통으로 눌러 꼬리를 바닥에 들러붙게 했다. 수시로 포장을 열고 닫으며, 마차에 오르거나 내리는 사람들을 마부는 친절히 맞이하고 또 배웅한다. 가끔은 “나 여소,” 하며 포장을 걷어 올려 승객의 접근성이 용이하도록 마차로 유인할 때도 있다. 강철같이 두텁고 육중한 세상의 벽에 여러 번 부딪쳐 본 이들은 안다. 세상은 그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한 것이 없다는 것..

좋은 수필 2024.02.05

무릎의 문양 - 김경주

무릎의 문양 - 김경주 ​ ​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

좋은 시 2024.02.04

시인의 직업은 발굴/신형철

시인의 직업은 발굴 언젠가 김경주의 첫 번째 시집에 대해 쓰면서 나는 "시인 김경주는 전천후다"라는 말로 말문을 열었더랬다. 참으로 여러 얼굴을 갖고 있는 시인이어서 종잡을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자기가 누구인지 아직 잘 모르는 사람만이 뿜어낼 수 있는 에너지가 좌충우돌하는 시집이었다. 두 번째 시집 (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읽어보니 점입가경이다. 이제는 더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마음껏 놀고 있구나. 시인은 그래도 된다. 시장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놀 수 있는 세계가 시 말고 또 어디 있겠나. 이 시인의 여러 얼굴을 더듬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한편으로는 이제 두 번째 시집쯤 되고 보니 이 사내의 얼굴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한결 또렷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

평론 2024.02.04

허연, 면벽

허연, 면벽 ​ ​ ​ 사람들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들의 주변부에서 내가 산다. ​ 벽을 보고 누워야 잠이 잘 온다. 그나마 내가 세상을 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다. 세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밥이나 먹고 살기로 작정한 날부터 벽 보는 게 편안하다. 물론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은 없는 일이다. 여기는 히말라야 가 아니다. ​ 누구는 세상 한가운데 산정(​山頂)에서 살고 누구는 세 상 한 귀퉁이에서 산다. 하여튼 뭘 해서 먹고 산다는 건 두 렵고 신기한 일이다. 근데 그게 가끔 말썽이다. 난 또 한 사 람을 잃었다. 이젠 기까지 약해져서 땅을 치고 후회한다. 아침마다 섞어 버린 이름들이며 술병들이며 뭐 그런 것들 이 남는다. ​ 지리멸렬해졌다. 말없이 바퀴나 굴리는 낙오자다 나는. 늘 작년 이맘때쯤처럼..

좋은 시 2024.02.04

손택수의 ‘방심’/ 시인 문태준

손택수의 ‘방심’/ 시인 문태준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 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 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손택수, 「방심」 전문 ‘마음을 놓다’라는 말 참 오랜만이다. 마음을 풀어 놓아버린 일 얼마나 오래 되었나. 마음 졸이며 염려하고 살아왔을 뿐. 시인은 대청마루에 큰 대 자로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최대한 마음과 몸을 느슨하게 하고서. 바다처럼 편편하고 넓..

평론 2024.02.04

허공한줌/나희덕

허공한줌/나희덕 ​ 이런 얘기를 들었어. ​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어. ​ 그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 그 순간 엄마는 숨이 멈춰버렸어. 다행히 아기는 엄마 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우는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그치고 아..

좋은 시 2024.02.04

살구 / 정은아

살구 / 정은아 검뿌연 하늘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온 사방에 꽂혔다. 잎사귀 사이로 몸을 숨겨보지만, 무작위로 쏘아대는 화살을 피할 수 없다. 설익어 단단한 것들은 화살을 맞아도 끄떡없이 앳된 얼굴로 의기양양하다. 어느 정도 무르익은 것들은 쏟아지는 화살에 몸을 떤다. 스치듯 살짝 맞아도, 무른 살이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상처는 짓무르고 점점 커져만 갔다. 한동안 마른장마의 연속이었다.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살구에게는 축복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당분을 축적하고, 농부가 퍼 올려주는 지하수를 빨아 먹고는 몸뚱이를 불려 나갔다. 풋내나는 초록빛이 차츰 줄어들고 노란빛을 돌기 시작했다. 이제 수확이 멀지 않았다. 살구의 당도는 농익은 주황빛이 띨 때가 제일 높지만, 상품성은 노란빛을 띠고, 물컹하지 않을..

좋은 수필 2024.02.04

와이셔츠 / 정은아

와이셔츠 / 정은아 언젠가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한 남자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아내가 그리울 때마다 옷장을 열어 아내의 옷을 쓰다듬고, 입어보는 장면. 남겨진 이의 아픔과 그리움이 처절하게도, 괴이하게도 보였다. 왜 저렇게도 잊지 못할까? 그때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남편이 한마디 말도 없이 내 삶에서 빠져나갔다. 칫솔, 스킨, 로션, 면도기, 속옷, 티셔츠, 남방, 바지, 벨트, 점퍼, 정장, 코트, 양말, 운동화....... 그의 물건들도 그를 따라 사라졌다. 서로를 지탱하며 걸어갈 삶은 아직 초입인데, 나와 아이만 길 위에 남겨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이들에게는 언제, 어떻게, 어떤 얼굴로 설명해야 하나. 남편이 사라진 날 이후로, ‘아빠는 출장 중’이어야 했다. 아이가 아..

좋은 수필 2024.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