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1 54

정끝별 시

..한 걸음 더.. ​ 낙타를 무릎 끓게 하는 마지막 한 짐 거목을 쓰러뜨리는 마지막 한 도끼 ​ 사람을 식게 하는 마지막 한 눈빛 허구한 목숨을 거둬가는 마지막 한 숨 ​ 끝내 안 보일 때까지 본 일 또 보고 끝을 볼 때까지 한 일 또 하고 ​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몰리니까 한 걸음 더 ​ 댐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한 줄의 금 장군!을 부르는 마지막 한 수 ​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 이야기를 끝내는 마지막 한 문장 ​ 알았다면 다시 할 수 없는 일 알았다 해도 다시 할 수 밖에 없는 일 ​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모르니까 한 걸음 더 ​ ​ ​ ..세상의 등뼈.. ​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께를 대주고 ​ 대준다는 것..

좋은 시 2024.01.15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보증 서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순간..

좋은 시 2024.01.15

무한계단육면체 / 박수현

무한계단육면체 / 박수현 계단들이 여기저기 장마 끝 푸성귀처럼 웃자라고 있다 무릎에 철심을 박고 나사를 조인 뒤부터 계단을 밟는 게 허공을 밟는 듯 오금이 저린다 돌아보면 세상은 계단의 참혹한 식민지다 동네병원부터 지하철 마트며 뒷산 산책로까지 나는 밀실에 숨은 채 등사기를 돌려 전단지를 찍는 비장한 레지스탕스는커녕 식민지의 적자(赤子)가 되어 무참하게 굴복한다 난간에 기댄 채 심장이 간이 마구 오그라드는 듯하다 그러니까 정작 복합골절을 당한 쪽은 무릎이 아니라 내 애먼 심장이나 간 어디쯤일 성싶다 층층 계단 어차피 계단 삐꺽 계단 다짜고짜 계단 나는 계단을 오르는지도 내리는지도 모르고 계단참에 껌딱지처럼 물끄러미 달라붙은 채로 서 있다 나는 무작정 펼쳐진 악보의 참 서러운 도돌이표가 된 게 틀림없다 여..

좋은 시 2024.01.15

배짱 없는 베짱이 / 문경희

배짱 없는 베짱이 / 문경희 우화, '개미와 베짱이'의 결미는 나라마다 다르게 각색된단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개미가 과로사를 면치 못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시스템에 익숙한 쿠바의 경우, 베짱이는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개미들이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은 아름다운 노래로 귀를 즐겁게 해 주었노라고, 그러자 개미는 일밖에 몰랐던 스스로를 뒤돌아보며 '이제부터는 함께 춤추며 살자'는 호의로 쾌히 식량을 나누었다나. 미국편은 좀 더 다이내믹하다. 자신의 밥은 자신이 버는 법이라며, 개미는 베짱이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 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낙심한 베짱이가 노래로 자신의 처지를 달래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음반기획자가 이를 듣게 된다. 뛰어난 노래 실력을 인정받은 베짱이..

좋은 수필 2024.01.14

두루미 /안병태

두루미 /안병태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좋아한다. 묵직하고 도톰하여 돈다운 맛도 맛이려니와, 그보다는 동전의 뒷면에 나를 닮은 두루미 한 마리가 창공을 날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 숲 노송 위에 한 다리를 접고 서서 사색에 잠긴 두루미,그 고고한 자태에다 나를 비교한다는 것이 가당찮은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그의 가냘픈 육신을 보고 있노라면 적어도 외모만큼은 내가 그를 닮았거나 그가 나를 닮았거나 둘 중 하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 가끔 저울에 올라가 본다. 바늘이 반 바퀴를 겨우 돌아가 멈춘다. 구십 근인가? 옷, 구두까지 몽땅 합쳐도 백 근이 못되는 체중이다. 사반세기 전 인사기록카드에 기록했던 몸무게가 지금껏 변함이 없다. 허리띠를 새로 사면 삼분의 일쯤 잘라낸다. 그냥 두르면 두 바퀴나 돌아가..

좋은 수필 2024.01.14

소풍, 두 알의 감자가 있는 / 곽재구

소풍, 두 알의 감자가 있는 / 곽재구 높은 산길에 올랐습니다. 857번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길이었지요. 안녕! 나는 길의 초입에 잠시 멈춰 서서 초면례를 합니다. 길은 금세 내 인사에 대꾸를 해옵니다. 토끼풀꽃들이지천으로 피어 있고 산괴불주머니와 씀바귀 꽃, 현호색들이 어지럽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싸리나무 꽃들이 옅은 보라색의 구름들을 산기슭에 드리우고 있군요. 꽃향기들이 고즈넉한 시간들 사이로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았습니다. 오래전부터 나는 길 위에 핀 꽃들을 길의 신이 내게 건네주는 꽃다발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꽃다발을 넙죽 받아든 나는 한없이 행복해져서 죽은 다음 세상에는 길귀신이나 되어 쓸쓸한 날 길의 신의 말동무나 되리라 생각했지요. 길의 신이라 해서 왜..

좋은 수필 2024.01.14

묵언의 바다/곽재구

묵언의 바다/곽재구 저문 시간이면 순천만에 나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개펄이 좋고 개펄 냄새를 이리저리 실고 다니는 바람의 흔적이 좋다. 키 넘게 훌쩍 자란 갈대숲. 갈대들의 목은 꺽여 져 있다. 모두 같은 방향이다. 바람은 가끔씩 갈대숲 사이로 들어온다. 그럴 때 갈대들은 자신의 내면 안에 숨긴 낡고 오래 된 악기의 소리를 낸다. 어디로 갈까... 고개를 숙이고 끝없이 걸어가는 갈대들의 행렬은 순례자의 그것을 닮아 있다. 바람은 순례자의 옷깃을 흔들고 , 일찍 도착한 철새 몇 마리가 순례자의 이마를 선회한다. 시베리아로부터의 비행을 거친 그들의 날갯 짓은 은빛으로 빛난다. 조류학자들이 먹이를 위해 혹은 번식을 위해 새들은 먼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때, 나는 고개를 젓는다. 어쩌면 더 형이상학..

좋은 수필 2024.01.14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황동규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황동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 비슷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버릇이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자기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사람들은 흔히 사랑 혹은 애정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애착의 도(度)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착각의 도도 높아진다.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 ‘애정을 쏟았으나 상대방이 몰라주었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우정이든 성정(性情)이든 진정한 애정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데서 비롯된다.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가능한 한 편안하게 해주려는 노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나 사람과 사물의 관계를 생각하면 자명해진다. 우리가 조..

좋은 수필 2024.01.13

풍장/황동규

풍장/황동규 ​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좋은 시 2024.01.13

윤영 수필 모음

안개에 깃들다 안개 범벅에 사방이 희다. 낙동강이 휘감은 사문의 마을에 닿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십여 분을 걷는다. 이쯤에 돌돔과 광어가 유영하는 수족관이 있는 자리. 저쯤에 치킨 가게와 열쇠가게, 여기 목련과 산수유나무가 있는 자리. 가늠한다는 거. 모름지기 이곳 원주민만의 오랜 관찰과 사유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 어디든 사람 들어 묵고 있을 아파트 불빛들. 먼 바다로 나간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으로 너울거린다. 얼금얼금한 불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한 무더기의 발걸음. 식당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종소리. 사물의 형체는 묻고서 걸음과 종소리가 먼저 도착하는 저녁. 칼날이란 날은 죄다 뭉텅뭉텅 잘라먹고 이도 저도 아닌 흐물거림만 둥둥 떠다니는 섬들 지천이다. 문득 가슴이 ..

좋은 수필 2024.01.12

다듬이 소리/최윤정

다듬이 소리 최윤정 슬하에 육 형제를 둔 시어머님께서는 그 엄청난 빨래감을 혼자서 해내셨다. 내게 힘든 일은 안 시켰지만 푸새질만은 반드시 내가 시어머님 옆에 있어야 했다. 이불 홑니는 흰 옥양목이 으뜸이다. 봄 풀은 누그럼해야 되고, 여름 풀은 세어야 하고, 가을 풀은 개가 핥기만 해도 빳빳해진다고 한다. 푸새질 날은 앞줄 뒷줄 흰 흩니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알맞게 마른 빨래를 넓은 대청으로 걷어 와, 빨래보를 깔고 잔손질을 한다. 솔기를 펴고, 실밥을 뜯어내고, 네귀를 맞춰 둘로 접는다. 그것을 다시 접어 들고 어머니와 나는 줄어든 홑니를 양쪽에서 잡아 당긴다. 살짝 살짝, 뒤로 넘어지듯 잡아야지 내 손에서 빨래를 놓치면 어머니가 뒤로 넘어지시고, 너무 세게 잡아 당기면 앞으로 넘어진다. ..

좋은 수필 2024.01.12

종이의 나라/김영아

종이의 나라 김양아 등 굽은 새벽이 낡은 손수레에 쌓아올린 묵직한 산을 끌고 간다 어느날 악몽을 꾼 나무들이 두꺼운 종이상자로 변신해 차곡차곡 포개진다 소비를 즐기는 도시는 끊임없이 포장을 벗겨낸다 택배는 쌓이고 박스의 접힌 각이 풀리고 모서리가 무너진다 바깥으로 밀려나 독거노인과 한 묶음이 된다 종이의 나라 그들만의 거래처는 치열하게 움켜쥔 밥줄이다 구역은 쉽게 얻을 수도 없고 내주지도 않는다는 게 그들 사이의 불문율, 땀 한 되에 60원을 쳐준다는 종이박스는 앞 다투어 수거된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로 고단한 노구를 밀어내는 도시 시장골목과 상가를 돌아온 새벽이 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저 아찔함, 다급한 클랙슨이 바퀴를 밀어붙인다 발품을 팔아 엮은 오늘의 노동이 기우뚱거린다 질경이의 꿈 임경묵..

좋은 시 2024.01.12

도시가 키운 섬/최삼용

도시가 키운 섬 ―감천마을 최삼용 비탈길 뒤뚱이며 기어 오른 마을버스에서 내려 까마득한 돌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면 마주 오는 사람 비켜가기 위해 잠시 된숨 놓아도 되는 그래서 노곤이 땟물처럼 쩔어진 골목은 이웃집 형광등 불빛까지 남루가 고인 저녁을 달랜다 액땜인 양 보낸 하루로 얻어진 고단을 눕이려 정처에 들면 허기를 부은 양은냄비의 끓는 물속에서 울혈 닮은 라면 스프 물 붉게 우러나고 몸집 부푼 면발 따라 가난의 죄까지 부풀린다 하느님과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서 살기에 믿음 약해도 하느님을 빨리 만날 것 같은 도시가 키운 섬 거기에 가난과 실패를 혹은 죄 없는 꿈을 혀끝에 단 채 휘황한 도심 발치에 두고 가난을 품앗이한 우리가 산다 ―시집『그날 만난 봄 바다』(그루, 2022) 홀로 산행을 하며 삼각산..

좋은 시 2024.01.11

​​만년필 / 송찬호

​ ​ 만년필 / 송찬호 ​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

좋은 시 2024.01.11

조개의 꿈/김추딘

조개의 꿈 김추인 갯모래 머금은 혓바닥 하나 몸을 삼으니 석화된 입이 무기다 발바닥 생을 숨긴 집이다 만입이 다 열려 있어도 ​ 묵黙 묵黙 적寂 묵黙 ​ 어느 전생의 세치 혀가 불러온 업보인지 딱딱한 입술 두 쪽에 혓바닥 하나 숨겨 생애를 건너가는 중이다 물속에서 내다뵈는 것은 먼 깜박임 저건 시리우스 저건 좀생이 별 저기에도 생을 기댈 짭조름한 물이 있을까 바람 칠수록 명멸하는 찬란을 본다 ​ 머나먼 거기 뉘 손짓이 저리 반짝이는지 조개는 날개를 펴듯 움찔 움찔 패갑을 열었다 닫곤 한다 ㅡ시집『오브제를 사랑한』(미네르바, 2017) ------------------------------ 조개의 꿈 -생명의 환(幻) 김추인 갯 모래 머금은 혓바닥 하나 몸을 삼으니 석화된 입이 무기다 발바닥 생을 숨긴 집..

좋은 시 2024.01.11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2011년가을 배우식 / 죽음 앞에서 만난 북어 *문창2011년가을 ​ 1.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짐승의 눈빛이었다고 했다. 열정을 넘어 광기의 눈빛이었다고 했다. 학생들의 그런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쓰러졌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이미 한쪽 눈을 잃었고, 남은 한쪽 눈마저 멀어갈 때 그래도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붙잡았던 시였는데……, 나는 쓰러졌다. 늦깎이로 들어간 대학원, 아이러니하게도 ‘시창작’ 수업시간에 나는 쓰러졌다. 2001년, 그날 이후 혼미해진 의식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고,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는 그만 막막한 적막 속에 갇히고야 말았다. 끊임없는 고통이 밀려왔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극한상황으로 치달았다. 병원에서는 그 원인을..

평론 2024.01.11

물레가 구른다 / 김희숙

물레가 구른다 / 김희숙 흙꽃이 핀다. 손가락을 슬쩍 비트니 오므린 몽우리가 보시시 벌어진다. 흙 한 줌에서 생명력이 살아난다. 허공을 메울 잔가지나 바람에 하늘거릴 이파리 하나 돋지 못한 줄기지만 꼿꼿하게 버티고 섰다. 앞으로도 꽃송이 서너 개쯤은 거뜬히 피워낼 수 있으리라. 코끝을 간질거리는 향기와 눈길을 사로잡는 빛깔은 없어도 투박한 질감이 마음을 당긴다. 그릇은 오롯이 인간의 도구다. 사발에 김 오른 밥을 담고 종지의 짠기를 더해 밥심을 돋운다. 너나없는 콘크리트 삶 속에 작은 토분이나마 식물을 심어 자연을 벗한다. 연잎 화반에 꽃불을 켜 주위를 밝히고 달항아리를 들여 희로애락을 품는다. 때때로 사람은 스스로를 그릇에 담는다. 제멋대로 크기까지 정하여 정신을 가두는 오류도 범한다. 땅에서 생명이 ..

좋은 수필 2024.01.10

동바리, 천 년을 잇는다 /윤미영

동바리, 천 년을 잇는다 주초에 압착되어 간다. 균형을 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짓누르는 무게에 굴복하고 마는 두리기둥. 사지의 힘줄은 이미 터져버렸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다. 한 치 오차 없이 결구해야 한다. 어긋나면 천 년이 위태하다. 보경사寶鏡寺 대웅전이 푸른 하늘아래 시대의 미감을 드러낸다.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인 사찰은 대덕 지명법사가 팔면경을 묻고 금당을 건립한 천년고찰이다. 팔작지붕의 기와와 외부 하중을 직접 받는 선자연의 날렵한 끝선이 받침목인 갈모산방(散防)에서 멎는다. 작도와 치목이 까다로워서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만 볼 수 있다는 선자연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한다.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려면 희생이 뒤따른다. 대웅전 네 칸 기둥의 밑동이 세월의 격랑에 결이 갈라..

좋은 수필 2024.01.10

평범한 날의 평범한 이야기/허창옥

평범한 날의 평범한 이야기 허창옥 친구는 지금 한 시간째 이야기를 하는데 끊어지는가 하면 이어진다. 나란히 앉아 있으므로 나의 시선은 그의 옆얼굴에 머물러 있다. 그의 얼굴은 단아하지만 좀 지쳐 보인다. 그는 갈색 주름스커트에 아이보리색 반소매 니트를 입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다. 검소하나 세련되어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척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범어로터리의 횡단보도는 길다. 따라서 신호등이 바뀌는 시간도 길다. 인도의 횡단보도 사이에는 그래서인지 조그만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백 년 수령, 수피는 거의 다 벗겨졌고 세월만큼 옹이도 깊게 패였다. 하지만 잎사귀들은 싱싱한 초록이다. 돌에 새겨진 나무의..

좋은 수필 2024.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