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1 54

마늘 까던 남자/민혜

마늘 까던 남자 민 혜 언젠가부터 마늘을 까는 일은 그 남자의 몫이 되었다. 퇴직하고 하릴없이 늙어가는 터수에 아내를 도와 마늘 좀 깠기로서니 유난 떨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 이변이요 사건이었다. 왕년의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 밥 한 끼 챙겨먹지 못했으며 자기 마누라가 허리 다쳐 누워 있을 때도 설거지 한 번 도와주지 못했던 남자였으니 말이다. 퇴직하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집 밥 먹는 남자를 '삼식이'라 한다는데 그는 정말 집 밖을 모르는 원조 삼식이었다. 착실한 삼식이 생활로 접어든지 어언 6년, 까칠해진 마누라의 눈치를 의식한 거였을까. 어느 날 그는 아내인 내가 바가지에 수북 담아 놓은 마늘을 보더니 까주겠노라고 자청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몇 해 전만 해도 김장철에 마..

좋은 수필 2024.01.09

유화 한 점/김윤재

유화 한 점/김윤재 꼭 그 모습이다. 사십 년 전 그때처럼 집안으로 선듯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이신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어린 시절 당신이 뛰놀던 앞마당이 나오고 오른편엔 외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배어 있는 사랑채가 있는데, 대문 앞에서 지루하게 서성거릴 뿐이다. 나는 차 안에서 마른 침을 삼켰다. "어서 들어가요 엄마. 괜찮아요. 어서." 그러나 어머니는 꼭 그때처럼 끝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느티나무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셨다. 작고 마른 그림자가 주인을 따라 나섰다. 동네 어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무심하고도 나른한 노인의 모습이다. 느티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땅 위로 드러난 뿌리는 각질이 벗겨졌고 몸통엔 군데군데 옹이가 박혔다. 한쪽으로 기운 가지엔 벌레 먹은 나..

좋은 수필 2024.01.09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 피귀자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 피귀자 나는 지금 눈물 없이 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겨드랑이가 가려워 몸이 뒤틀린다. 몸속을 달리는 혈관들의 반란도 잠재우기 힘들다. 주인은 나의 존재를 잊은 건지 밀폐된 박스에 나를 쳐 박은 채 몇 달째 방치하고 있다. 이슬에 젖은 풋풋한 흙과 풀냄새를 맡고 싶다. 아니, 자갈밭에라도 맨발을 묻고 싶은 심정이다. 파란 하늘이 보고 싶고, 바람의 향기를 맡으며 흔들리고 싶다. 어느 집 창고인지 부엌인지 알 수 없는 이곳이 너무나 답답하다. 어서 빨리 이 고통을 이기고 땅 속으로 파고들고 싶다. 사람들은 터져 나오는 내 신체의 일부를 '감자 싹'이라고 부른다. 작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리는 것이 사람인가. 여름의 초입부터 삶아먹고 지져먹고 볶아서 입맛..

좋은 수필 2024.01.09

비밀 있어요/김산옥

비밀 있어요/김산옥 나는 누군가의 왼쪽이 그리운 여자에요. 해서 그대가 언제나 내 오른쪽에 있어주길 바란답니다. 식사를 할 때, 함께 걸을 때,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탈 때도 언제나 그대가 내 오른쪽에 있어주기를 바라지요. 어쩌다 기회를 놓쳐서 그대 오른쪽에 있는 날에는 너무 슬프답니다. 네, 이런 날은 얼굴을 붉히며 그대 입만 쳐다봐요. 수줍어서 말도 못하죠. 대부분 내가 알아서 그대 왼쪽으로 가지만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거든요. 그런 날은 그대에게 오해로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더욱 마음이 쓰인답니다. 언제가 문인협회십포지엄에 다녀오던 날이었어요. 버스 안에서 어느 멋진 시인과 함께 앉게 되었죠. 난 그의 왼쪽이 그리운데 오른쪽에 앉는 불운을 맞았지 뭡니까. 버스 안이라 너무 시끄러..

카테고리 없음 2024.01.09

어린 날의 초상/문혜영

어린 날의 초상 문혜영 우리 가족은 이북에서 살다가 1·4후퇴 때 월남하였습니다. 피난 오면서 아버지를 잃고 또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 남은 사람은 어머니와 올망졸망한 우리 네 자매뿐이었습니다. 사선을 넘으면서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어려웠던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 주먹으로 어느 도시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곳의 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방 한 칸 마련할 수조차 없었던 우리의 처지를 생각했음인지 학교에서는 관사에서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말이 관사지 방이 둘, 부엌이 둘 있는 작은 일본식 집이었습니다. 그나마 방 하나는 숙직실로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방 하나만을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집이 눈에 선합니다. 방과 후면 ..

좋은 수필 2024.01.06

지난 11월에는... / 김훈

지난 11월에는... / 김훈 나는 자연사한 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숲 속의 그 많은 새들이 어디로 가서 죽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내 창 앞 모과나무 가지에서 우는 새도 내가 모르는 어디론지 가서 죽을 것이다. 겨울 철새들은 11월에 날아온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오는 겨울 철새들이 시베리아로 돌아가서 죽는지, 을숙도에서 죽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을숙도 갈대 숲에 새들의 시체는 없다. 그러므로 시베리아의 전나무 숲속에도 새들의 시체는 없을 것이다. 새들은 올 길 갈 길에 하늘에서 죽어서 바다로 떨어져 내리는 것인가. 새들은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면서 날아오고 또 날아오지만, 새들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자연사한 벌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여름 풀밭의 그 많던 벌레들은 다들 어디로 가서..

좋은 수필 2024.01.06

으짜꺼시냐 / 정지민

으짜꺼시냐 / 정지민 격월로 초등학교 동창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그날은 일부러 치과원장인 정훈이의 옆자리에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정훈아, 어제 친구들이랑 채석강에 놀러갔다가 말이지... . 엿장수가 엇따, 엿 먹어라! 하면서 길을 막고 공짜 엿을 내미는 거야. 덜컥 받아먹다가 어금니 쪽 땜질한 금니빨이 그만 쓸려나왔어.” 나는 손가락으로 입속을 가리키며 정황을 얘기한 후 내일 그의 치과병원에 들르겠노라 했다. 어릴 때부터 코부랭이에 욕쟁이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는 마시던 술잔이 든 손을 훼훼 저으며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야! 무슨 소리? 너희 동네엔 치과 없어?” 아는 사람 오면 귀찮기도 하거니와 오늘밤 술을 실컷 마실 것인즉 손 떨려 치료 못한다는 것이다. 토악질이 유독 심해 치료 받을 때 의..

좋은 수필 2024.01.06

잉아/이상수

잉아/이상수 날실을 걸자 베틀 위로 흰 강물이 흐른다. 수백 겹 가닥이 물결이 되어 잔잔한 파문을 만든다. 잉앗대가 위로 들려지고 그 사이로 씨실을 넣고 바디를 조여 베를 짜기 시작한다. 덜그럭 탁, 덜그럭 탁, 어머니는 한 척의 돛단배처럼 밤늦도록 강물 위를 덜컹거리며 떠다닌다. 잉아는 베틀의 부품이다. 날실을 한 칸씩 걸러서 끌어올리도록 고정해 놓은 굵은 줄을 말한다. 실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날실을 촘촘하게 매어놓은 모양이 마치 국숫발을 장대에 널어놓은 것 같다. 스물하나에 어머니는 동갑내기 남편을 만났다.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학생이던 시동생 둘을 맡기고 입대해버렸다. 오롯이 가장이 된 당신은 병환으로 앓아누워 있던 시모를 비롯한 세 식구를 혼자서 감당하게 되었다. 남..

좋은 수필 2024.01.05

몽당연필 / 최선자

몽당연필 / 최선자 모시 적삼을 생각나게 했던 날씨가 지쳤는지 수그러들었다. 가는 곳마다 솔 향 가득한 강릉, 혼자서 떠나온 이 박 삼 일간의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숙소를 나오자 해변에서 들었던 파도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침 산책길에 만났던 청설모도 눈에 아른거렸다. 문학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좋았지만 자연에 흠뻑 취할 수 있어 더 좋았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행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김시습 기념관을 가기 위해 들렀던 버스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월의 발자국 가득한 얼굴, 닳고 닳아버린 손톱에 눈길이 멈췄다. 순간, 낯선 할머니 손을 덥석 잡고 만지자 마음이 손등을 타고 마음으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그윽한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아! ..

좋은 수필 2024.01.05

이유 / 송혜영

이유 / 송혜영 어찌 저리도 크고 원만하게, 온화한 빛으로 잘 늙었을까. 황혼의 호박을 그윽이 바라보노라니 호박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진다. 살구꽃이 질 때쯤이면 종묘상 앞이나 장터 난전에 모종이 나타난다. 땅이 일 년 농사를 허한다는 신호다. 어서 밭에 가자고 성화를 하는 모종 중에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건 호박이다. 일단 울 밑에 심을 호박부터 챙겨놓고 고추며 가지, 토마토 등속을 보태는 건 호박이 밭작물 중에서 으뜸이어서이다. 호박 모종은 잎이 세 장 정도 나와 있다. 사람으로 치면 갓 젖 떨어진 정도의 어린잎이지만 스스로 생존하기에 모자람이 없이 오롯하다. 용수철 같은 넝쿨은 당장 내 손끝이라도 잡고 올라올 기세다. 어린 저것이 뿌리를 내리고, 땅심을 받아 잎이 무성해지고,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호..

좋은 수필 2024.01.05

누빈다는 것​/조미정

누빈다는 것​/조미정 ​ ​ ​ 한지함 속에서 누비 한복 한 벌을 꺼낸다. 쪽빛 삼회장저고리와 감색 두 폭 치마가 펄럭거리며 강물처럼 펼쳐진다. 시집간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염원과 기도가 박여서일까. 비단 천을 만지작거리자 안팎으로 가지런하게 누벼진 바늘땀이 가슴으로 굽이친다. 누비는 두 겹의 옷감 사이에 솜을 두고 한 땀 한 땀 홈질하여 짓는다. 눈 뜨자마자 시작해서 해거름까지 붙잡고 있어도 한 평 남짓 누빌까. 조급증이 일렁이지만 급한 성질머리를 꾹꾹 눌러 담는다.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뻐근하다. 그래도 누비는 낱장인 천들을 한 장으로 만드는 화합의 침선이다. 누비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몸의 치수대로 마름질한 후 품이 조금 더 넉넉하게 재단한다. 촘촘히 박은 땀이 주변의 천을 물고 들어..

좋은 수필 2024.01.05

민어회/안도현

민어회 안도현 집에서 멀리 나가 혼자 어둑하게 누워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은 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밤 등대처럼 울지 모르겠으나, 나는 곧장 목포 유달산 밑으로 가서 영란횟집 계산대 앞에 민어 한 마리로 누워 있겠다 벗겨 손질한 껍질 옆에다 소금 종지를 두고 내장을 냄비에 끓여 미나리도 반드시 몇 가닥 얹겠다 혹여 전화하지 마라 올 테면 연분홍 살을 뜨는 칼처럼 오라 바다의 무릉도원에서 딴 복사꽃을 살의 갈피마다 켜켜이 끼워둘 것이니 때로 살다가 저며내고 발라내야 할 것들 때문에 뼈는 아리지 그래도 오로지 뼈만이 폭풍 속에 화석을 새겨넣지 그러므로 당신은 울지 마라 소주병처럼 속을 다 비워낸 뒤에야 바닷가 언덕에 서서 호이호이 울어라

좋은 시 2024.01.01

삼계탕/ 권오범

삼계탕/ 권오범 수컷 구실 한번 하지 못하도록 애당초 몽달귀로 낙인 찍혔다지만 천명이 턱없이 에누리당해 얼굴마저 저당잡혀 볼썽사납다 행여 머나먼 저승길 허기질세라 대추 밤 찰밥 미리 얻어 먹고 지옥 물에 목욕재계하고 나니 골수마저 녹아내려 온몸이 녹작지근하다 어린 것이 다리 꼬고 누워 인삼 하나 끌어안고 남세스럽게 누드쇼는 하지만 버젓한 한류스타이기에 여한은 없다 저승사자인 인간들이여 마지막 가는 길 부탁 하나 하자 젖가락으로 잔인하게 꼬집어도 좋으니 뼈 마디마디 깔끔하게 추려 해탈시켜다오.

좋은 시 2024.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