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6 57

고무신/고경숙

고무신/고경숙 한 짝은 멀리 부엌문 앞으로 날아간 채나머지 한 짝이 우는소리 들렸다엎어져 땅에 코를 박고메리처럼 울었다꺾어진 골목 막다른 셋집낙엽이 수북이 쌓인 토방 밑에서가끔 우는 고무신은어느 저녁엔 밀린 기성회비가 되었다가서리 내린 아침엔시든 무청 한 단처럼 무거운 다리를 끌고우체국 앞을 서성이며 전신환을 기다리다가어느 한밤엔 수족 잃은 늙은 바람처럼코를 풀어대며 울었다밑창이 닳아 야들야들한 위장은선뜻 대문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죽은 전나무 이파리 우수수부서져 내린 저물녘필통을 덜그럭거리며 돌아오다아이는 괜히 메리만 을렀다

좋은 시 2024.06.14

슬리퍼를 찾다가/황금모

슬리퍼를 찾다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다른 쪽을 위해열심히 그 행방을 쫓았다아니, 이미 그것에 길들여진허전한 내 발을 위해눈길 닿는 곳곳을 훑다가가 닿은 곳,깊숙한 침대 밑에어둑한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찾다가 포기해 버린 귀고리 한 짝튕겨 나온 퍼즐 몇 조각억울하게 화풀이의 대상이 된찢어진 과속 범칙금 고지서까지관심에서 밀려난 눅눅한 사연들이저들의 언어로 웅성거리고 있다따지고 보면햇빛 안 드는 세상이 어디 그곳뿐이랴나는 그곳에서급하게 서두르다가얼결에 빗나간 발길질 한번 한 것뿐인슬리퍼 한 짝을 찾아내어먼지를 털고 제 짝을 맞춰 주었다다시 편해진 건내 발이다

좋은 시 2024.06.14

옴팡눈의 사내/ 김진진

옴팡눈의 사내/ 김진진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마치 된장 밑에서 오래 묵었다가 금방 꺼낸 무장아찌처럼 검고 찌글찌글한 그런 느낌의 사내였다. 변변찮은 산골 오지에서 그저 손바닥만 한 땅뙈기나 일구다가 어느 날 불쑥 도심 한복판에 출현한 무지렁이 촌부와 똑같았다. 둥근 테가 넓게 돌아간 낡아빠진 카키색 모자의 그늘 밑으로 움푹 주저앉은 두 눈은 이상스런 광채를 품고 있는 듯해서 심연의 이끼처럼 검푸르고 칙칙했다. 그 눈은 주먹만한 얼굴 위로 무지막지하게 뛰어나온 광대뼈 때문에 더욱 작고 깊게 가라앉아보였다. 눈과 마찬가지로 폭삭 꺼져 내린 양 뺨 사이로 우묵하게 말려들어간 입술은 영락없이 꾀죄죄한 노인의 행색이었다. 중키도 못되는 바짝 마른 몸매의 이 사내는 대체 몇 살이나 되었을까?​'완전히 깜씨로군...

좋은 수필 2024.06.11

물집 [박후기]

물집 [박후기]    선운사 배롱나무 관절을 어루만지다가당신 멍든 복숭아뼈를 생각했습니다몇 해 전, 날 저문 산길부어오른 당신 복숭아뼈를 만지던내 마음도 그만 쓸리고 접질렸던 것인데요그날, 허리 숙여 절을 하며 엎드릴 때당신 얼굴 슬며시 제 등에 업히더군요      * 요즘 학생들은 집에 책상과 의자가 있어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을 일이 없을 게다.우리 땐 밥상 같은 접이식 책상에 이른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야 했다.몸의 하중이 복숭아뼈에 실리므로 물집이 잡힐 만도 하다.좀 오래 되면 살이 단단한 껍질이 되어 시꺼먼 게 볼썽사납게 된다.내 경우엔 왼발 복숭아뼈에 하중이 실려 시꺼멓게 껍질이 생겼고가끔 껍질을 벗겨주어야 한다.한 꺼풀 벗겨내도 다시 껍질이 생긴다.평생을 어루만져주어야 되는 짐인 셈인데마음의 ..

좋은 시 2024.06.09

논두렁 [이덕규]

논두렁 [이덕규]      찰방찰방 물을 넣고간들간들 어린모를 넣고 바글바글 올챙이 우렁이 소금쟁이 물거미 미꾸라지 풀뱀을 넣고온갖 잡초를 넣고 푸드덕, 물닭이며 논병아리며 뜸부기 알을 넣고햇빛과 바람도 열댓 마씩 너울너울 끊어 넣고무뚝뚝이 아버지를 넣고 올망졸망 온 동네 어른 아이 모다 복닥복닥 밀어 넣고 첨벙첨벙 휘휘 저어서 마시면, 맨땅에 절하듯누대에 걸쳐 넙죽넙죽 무릎 꿇고 낮게 엎드린 생각들 길게 이어 붙인저 순하게 굽은 등짝에 걸터앉아미끈유월, 그 물텀벙이 한 대접씩 후르륵 뚝딱 들이켜면허옇게 부르튼 맨발들 갈퀴손가락들 건더기째 꿀떡꿀떡 넘어가겠다                                     시집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좋은 시 2024.06.09

혼밥/이덕규[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혼밥[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낯선 사람들끼리벽을 보고 앉아 밥을 먹는 집부담없이혼자서 끼니를 때우는목로 밥집이 있다혼자 먹는 밥이서럽고 외로운 사람들이막막한 벽과겸상하러 찾아드는 곳밥을 기다리며누군가 곡진하게 써내려갔을메모 하나를 읽는다“나와 함께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다”그렇구나, 혼자 먹는 밥은쓸쓸하고 허기진 내 영혼과함께 먹는 혼밥이었구나(하략)―이덕규(1961∼)혼밥은 한때 예사롭지 않은 단어였는데 지금은 흔한 단어가 됐다. 바쁘니까 빨리 먹어야 하고, 빨리 먹으려면 말없이 혼자 먹어야 한다. 사람이 싫고 말하기도 싫고 그러다 나마저 싫어질 것 같을 때는 휴대전화나 보면서 혼자 먹어야 한다. 이럴 때는 식사가 아니라 끼니가 된다. 이런 사람이 나 포함,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렇게 혼밥이 낯설지..

좋은 시 2024.06.09

홍어 - 이정록

홍어 - 이정록​​욕쟁이 목포홍어집마흔 넘은 큰아들골수암 나이만도 십사 년이다양쪽다리 세 번 톱질했다새우 눈으로 웃는다​개업한 지 이십팔 년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할매는 곰삭은 젓갈이다​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 좆을 내온다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꽃잎 한 점 넣어준다​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밤늦도록 홍어 좆만 주물럭거렸다고만만한 게 홍어 좆밖에 없었다고얼음막걸리를 젓는다​얼어 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박복한 이년을 합치면,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소주병을 차고 곁에 앉는다​우리 집 큰놈은 이제쓸모도 없는 좆만 남았다고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막걸리거품처럼 웃는다​

좋은 시 2024.06.09

고등어의 골목 / 이종진

고등어의 골목 / 이종진 저녁 찬거리는 고등어였다살아온 날 만큼이나 무뎌진 식칼이고등어의 푸른 등줄기를 몇 차례 내려치고토막토막 나면서 오븐렌지 속에 들어가자고등어는 결국 바다에서의 푸른 생을 끝냈다 한때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리식솔들을 이끌고 바다의 이 골목 저 골목으로밥을 찾아 끝없이 유영했으리가끔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우연찮은 골목의 끝을 지나배고픔을 달래며 다시 되돌아온 적도 있었으리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은 참으로 길었다골목마다 끝없이 출렁거리는 바다 물결에 밀려얼마 만큼인지 흘러가고 나서야 나의 서투른귀소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은 모처럼 고등어 찜을 해먹자며푸릇푸릇한 등줄기를 토막 내며새 칼을 하나 사든지 아니면 숫돌에서 갈아야 한다며무뎌진 식칼을 아내가 내 앞에 쓰윽 내밀자난..

좋은 시 2024.06.09

막장 시

막장 / 김나영​ 폐광이 태백이나 정선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리부도에는 삭제되어 있는 없는 게 없는, 서울특별시에도 폐광이 있다. 단돈 850원이면 몇 시간 안에 도착하는​ 이곳을 접근금지 구역으로 지정하자는 사람들과 뜨거운 밥 퍼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몇 년째 대안 없이 불거지고 가끔 아이의 두 눈을 치마폭으로 가린 풍경이 빠져나가고 나면​ 잠시 술렁거렸던 공기가 다시 흑연 가루처럼 가라앉는​ 이곳에 갱도(坑道)나 채탄(採炭)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그들의 외투와 손과 신발이 검은 때로 반질반질하다. 햇빛도 그들의 몸에 닿자 순식간에 빛을 잃어버리고 희망이 차단된, 가느다란 빛도 새어나오지 않는​ 두 개의 막막한 구멍들과 나는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영등포역 고가다리 아래, 서울역 주변이 아니더라도 기..

좋은 시 2024.06.06

격포

격포 / 고운기​격포라 찾아왔네 십년 만이든가來蘇寺 단풍 곱기도 했는데철없던 계집애들 여관집 밥 먹고차 한 잔 마신다고 몰려갔던 다방사람 드문 바닷가 거기 정담다방나이 든 여자 하나 하품만 하고 있었지십년 세월 깜박했네 어느새든가來蘇寺 단풍 아직 철 이른데어디였는지 정담다방 찾을 길 없고정답던 얘기만 허공 중에 떴겠구나콩국수 말아 먹는 여자 하나입에 든 것 삼키지도 않고“없어졌제라, 칠 년도 넘괐그만그 동안 한 번도 안 왔다요…….”서둘러 자리 뜨는 뒤통수만 가려웠다네.​- 고운기,『섬강 그늘』(고려원, 1995)​​​​격포 / 송유미​​미선나무 등걸에 기대어 속을 다 뒤집고 가는파랑주의보, 허리가 휜 뒷모습 바라본다.양철구름은 나뭇가지에 걸려 뒤뚱거린다.방파제 뒤웅박 안에 든 촛불은 시나브로 혼을 태운..

좋은 시 2024.06.06

서경과 서정의 심장을 녹이는 연륜의 시

서경과 서정의 심장을 녹이는 연륜의 시   김정순 시집 『불면은 적막보다 깊다』(작가마을) 배재경(시인)  김정순 시인이 오랜 침묵을 깨고 두 번 째 시집을 펴냈다. 1990년 《시와비평》으로 등단한 뒤 이제 두 번째 시집이라니, 30여년에 가까운 시력임을 감안해본다면 이는 분명 과작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발표 시들을 무결점의 작품들로 채우려는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의 작품들이 과작에 비하여 정체되거나 침체된 작품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통 지나친 과작의 경우 자기세계를 확보하지 못해 시력에 비하여 2%가 부족한듯한 느낌이 짙다. 그러나 김정순의 시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발표는 더디지만 시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이번 시집 『불면은 적막보..

평론 2024.06.05

골목과 노을과 곡선과 구석의 시인

골목과 노을과 곡선과 구석의 시인- 권상진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 김대호 시집 『실천이란 무엇입니까』  장인수(시인)    권상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은 골목을 노래하고, 노을을 노래하고, 별을 노래한다. 권상진 시인은 골목의 시인이며, 노을의 시인이며, 별의 시인이다. 반면 김대호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실천이란 무엇입니까』는 곡선을 노래하고, 자연산 밥 냄새를 그리워하고, 구석을 노래하고, 추풍령 근처 신암을 노래한다. 김대호 시인은 곡선의 시인이며, 구석의 시인이다. 두 시집은 공통점보다는 개별적인 개성이 더 강해서 따로 감상을 해 보도록 한다. 둘 다 두 번째 시집이다. ▪골목을 노래하는 골목의 시인 향이 심심해 장미 몇 송이 심었습니다소고기나 한 근 끊는다는 것..

평론 2024.06.05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김훈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김훈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어느 해 4월 벚꽃 핀 전군가도全群街道(전주-군산 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다가, 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둥치 밑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나는 내 열려지는 관능에 진저리를 치면서 길가 나무둥치에 기대앉아 있었다. 나는 내 몸을 아주 작게 옹크리고 쩔쩔매었다. 온 천지에 꽃잎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무둥치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바라보면, 만경 평야의 넓은 들판과 집들과 인간의 수고로운 노동이 쏟아져 내리는 꽃잎 사이로 점점이 흩어져 아득히 소멸되어 가고, 삶과 세계의 윤곽은 흔들리면서 풀어지면서, 박모의 산등성이처럼 지워져 가는 것이었는데, 세상의 흔적들이 지워져 버린 새로운 들판의 지평..

좋은 수필 2024.06.04

라면을 끓이며/김훈

라면을 끓이며/김훈 1 사실, 이 글은 오랜 세월 동안 라면을 끓이고 또 먹어온 나의 라면 조리법을 소개하려고 시작했는데, 도입부가 너무 길어졌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라면 포장지에는 끓는 물에 면과 분말스프를 넣고 나서 4분 30초 정도 더 끓이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센 불로 3분 이내에 끓여낸다. 가정에서 쓰는 도시가스로는 어렵고 야외용 휘발류 버너의 불꽃을 최대한으로 크게 해서 끓이면 면발이 불지 않고 탱탱한 탄력을 유지한다. 면이 불으면 국물이 투박하고 걸쭉해져서 면뿐 아니라 국물까지 망친다.또 물은 550ml(3컵) 정도를 끓이라고 포장지에 적혀 있지만, 나는 700ml(4컵) 정도를 끓인다. 물이 넉넉해야 라면이 편하게 끓는다. 라면이 끓을 때 면발이 서로 엉기지 않아야 하는데, 물이 넉넉하..

좋은 수필 2024.06.04